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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문학과지성사)

by handaikhan 2023. 4. 3.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

 

목차

약한 자의 슬픔
배따라기
태형
눈을 겨우 뜰 때
감자
광염 소나타
배회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광화사
김연실전
곰네


작품 해설 ㅣ 허공의 비극 / 최시한
작가 연보
작품 목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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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 발가락이 닮았다 (1932년)

 

노총각 M이 혼약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뜻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M은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세태가 갑자기 변하면서 혹은 경제문제 때문에, 혹은 적당한 배우자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단지 조혼이라 하는 데 대한 반항심 때문에,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가기는 하지만, 서른두 살의 총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아직껏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채근 비슷이, 결혼에 대한 주의를 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M은 언제나 그런 의논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는 매우 흥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데) 겉으로는 고소로써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M이 우리가 모르는 틈에 어느덧 혼약을 한 것이외다.

M은 가난하였습니다. 매우 불안정한 어떤 회사의 월급쟁이였습니다. 이 뿌리 약한 그의 경제 상태가 그로 하여금 늙도록 총각으로 지내게 한 듯도 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친구들은 M의 총각 생활을 애석히 생각하여 장가들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뿐은 M이 장가를 가지 않는 데 다른 종류의 해석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의사라는 나의 직업이 발견한 M의 육체적인 결함 - 이것 때문에 M은 서른이 넘도록 총각으로 지낸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p.272-273)

 

M이 결혼한 지 일 년이 거의 된 어떤 날 저녁이었습니다. 그와 나는 어떤 곳에서 저녁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이날 유난히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그는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본시 말이 많지 않은 그가 이날은 더욱 입이 무거웠습니다.

몹시 취하여 더 술을 먹지 못하리만치 되어서, 그는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충혈이 된 그의 눈은 무시무시하게 번득였습니다.

"여보게. 여보게. 속이지 말구 진정으로 말해주게. 내게 생식 능력이 있겠나?"

"글쎄, 검사를 해봐야지."

나는 이만치 하여 넘기려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진찰해봐주게."

"왜 갑자기 - "

그는 곧 대답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오려던 말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술을 한 잔 먹은 뒤에 눈을 푹 내리뜨며 말했습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내게 만약 생식 능력이 없다면 저 사람 (자기의 아내)이 불쌍하지 않나. 그래서, 없는 게 판명되면, 아직 젊었을 때에 헤어져서 저 사람이 제 운명을 다시 개척할 '때'를 줘야지 않겠나? 그래서 말일세."

"진찰해보아야지."

"그럼 언제 해보세."

그 며칠 뒤에 나는 M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검사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M은 그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M의 아내는 임신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M이 검사하겠다던 마음을 짐작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날의 제 말마따나 '아내의 장래를 위하여'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내에 대한 의혹 때문에 해보려는 것일 것이외다. 자기도 온전히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십중팔구는 자기는 생식 불능자일 텐데 자기의 아내는 임신을 한 것이외다.

생각하면 재미있는 연극이외다. 생식 능력이 없는 <은, 그런 기색도 뵈지 않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M에게로 시집을 온 새 아내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제 남편이 생식 불능자인 줄을 모르는 아내는, 뻐젓이 자기가 가진 죄의 씨를 M에게 자랑하고 있을 것이외다. 일찍이 자기가 생식 불능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정을 밝혀주지 않은 M은, 지금 이 의혹의 구렁텅이에서도 제 아내를 책할 권리가 없을 것이외다. 그가 검사를 하겠다 하나, 검사를 하여서 자기의 불구자인 것이 판명된 뒤에는 어떤 수단을 취할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의 음행을 책하자면, 자기의 사기적 행위를 폭로시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그것을 감추자면, 제 번민만 더욱 크게 할 것이외다.

어떤 날 그는 검사를 하자고 왔습니다. 그때 마침 환자가 몇 사람 밀려 있던 관계상, 나는 그를 내 사실에 가서 좀 기다리라 하고, 환자 처리를 다 하고 내려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버렸습니다.

이튿날 그는 다시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돌아가버렸습니다.

나는 사실 어쩌하여야 할지 똑똑히 마음을 작정치 못했던 것이외다. 검사한 뒤에 당연히 사멸해 있을 생식 능력을, 살아 있다고 하자니, 그것은 나의 과학적 양심이 허락지 않는 바외다. 그러나 또한 사멸하였다고 하자니, 이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치버리는 무서운 선고에 다름없습니다. M이라 하는 정당한 남편을 두고도 불의의 쾌락을 취하는 M의 아내는 분명히 책받을 여인이겠지요. 그러나 또한 다른 편으로 이 사건을 관찰할 때에, 내가 눈을 꾹 감고 그릇된 검안을 내린다면 그로 인하여 절대로 불가능하던 M이 슬하에 사랑스런 자식(?)을 두고 거기서 노후의 위안도 얻을 수 있을 것이요, 만사가 원만히 해결될 것이외다.

내가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갈림길에 서서, 나는 어느 편 길을 취하여야 할지 판단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p.280-283)

 

그는 다시 입을 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알았습니다. M은 검사도 해보지 않은 것이외다. 그는 무서워합니다. 그는 검사를 피합니다. 자기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상식으로 판단하여 물론 남편의 아이일 것이외다. 거기에 대하여 의심을 품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외다. 의심을 품을 필요도 없는 것이외다. 왜? 여인이 남편을 맞으면 원칙상 임신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깐.

이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을 의심하다가 향기롭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면 이것은 자작지얼로서 원망을 할 곳이 없을 것이외다. 벌의 둥지를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짖이외다. 십중 팔구는 향기롭지 못한 결과가 나타날 '검사'를 M은 회파한 것이외다. 절망을 스스로 사지 않으려, 그리고 번민 가운데서도 끝끝내 일루의 희망을 붙여두려 M은 온전히 '검사'라는 위험한 벌의 둥지를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이외다. 그리고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제 아내의 뱃속에 있는) 자식에 대하여, 억지로 애정을 가져보려 결심한 것이외다. 검사를 하여서 정충이 살아 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사멸하였다면 시재 제 아내와의 새에 생길 비극과 분노와 절망은 둘째 두고라도, 일생을 슬하에 혈육이 없이 보내고, 노후에 의탁할 곳을 가질 가능성조차 없는 절망이 지위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외다.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을 거부하고까지 이런 모험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외다.

이리하여 그는 검사는 단념했지만, 마음에 있는 의혹만은 온전히 끄지를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뒤에 어떤 날, 그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식은 꼭 제 애비를 닮는다면 좋겠구먼..." (p.284-285)

 

내가 자기의 말에 흥미를 가지는 것을 본 M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가 예비하였던 둘쨋말을 마침내 꺼내었습니다.

"게다가 날 닮은 데도 있어."

"어디?"

"이보게."

M은 어린애를 왼편 팔로 가만히 옮겨서 붙안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제 양말을 벗었습니다.

"내 발가락 보게. 내 발가락은 남의 발가락과 달라서 가운데 발가락이 그중 길어. 쉽지 않은 발가락이야. 한데 - "

M은 강보를 들치고 어린애의 발을 가만히 꺼내어놓았습니다.

"이놈의 발가락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 닮았거든..."

M은 열심으로, 찬성을 구하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닮은 곳을 찾아보았기에 발가락 닮은 것을 찾아내었겠습니까.

나는 M의 마음과 노력에 눈물겨워졌습니다. 커다란 의혹 가운데서, 그 의혹을 어떻게 하여서든 삭여보려는 M의 노력은, 인생의 가장 요절할 비극이었습니다. M이 보라고 내놓은 어린애의 발가락은 안 보고 오히려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발가락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 있네."

그리고 나의 얼굴로 날아오는 (의혹과 희망이 섞인) 그의 눈을 피하면서 돌아앉았습니다. (p.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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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1900년 10월 2일~1951년 1월 5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춘사(春士)이다. 필명으로는 금동인(琴童人), 김시어딤, 동 문인(東 文仁) 등을 썼다.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金大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발표했다. 같은 달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朝鮮留學生學友會)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월 26일 풀려났다. 1923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고,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
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39년 4월부터 5월까지 ‘북지(北支) 황군(皇軍)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에「감격과 긴장」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지지했으나, 같은 해 일본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했다가 7월 불경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3년 4월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輔國會)에 참가해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했다. 1945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생활 수감」을 게재했다. 이 밖에 잡지 『조광(朝光)』, 『신시대』 등에 친일소설 및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7년 3월 『백민』에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문단 30년의 자취」 등을 게재했다. 1949년 7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작품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감자」(1925)·「광염(狂炎)소나타」(1929)·「발가락이 닮았다」(1932)·「붉은 산」(1932)·「김연실전(金姸實傳)」(1939)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해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했다.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운현궁(雲峴宮)의 봄」(1933)·「대수양(大首陽)」(1941) 등이 있다. 평론으로는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해 「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1929)·「춘원연구(春園硏究)」(1934·1935) 등이 있다. 그 밖에 「목숨」(1921)·「정희」·「시골 황서방」(1925)·「송동이」(1929)·「반역자(反逆者)」(1946) 등의 단편과 「여인(女人)」(1930)·「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사후 1964년 『동인전집』 전 10권과 1976년 『김동인전집』 전 7권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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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단편선 (에세이퍼블리싱)

감자 - 김동인 (애플북스)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애플북스)

감자 - 김동인 (현대문학)

감자 - 김동인 (글누림) 

감자 - 김동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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