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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약한 자의 슬픔 - 김동인 (열림원)

by handaikhan 2023. 4. 1.

열림원 논술 한국 문학 7

 

목차
일러두기

약한 자의 슬픔
배따라기
태형
감자
명문
K박사의 연구
광염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대동강은 속삭인다
광화사
곰네

김동인의 생애와 문학
논술 / 예술은 그 자체로 먹적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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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 약한 자의 슬픔 (1919년)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아이들과 유쾌히 아주 지낸 그는 낌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오늘은 왜 이리 갑갑한고? 마음이 왜 이리 두근거리는고?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 같군. 어찌할꼬. 어디 갈까 말까. 아, 혜숙이한테나 가보자. 이즈음 며칠 가보지도 못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이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갑갑하던 것이 더 심하여지고 아무래도 혜숙이한테 가보아야 될 것같이 생각된다.

"아무래도 가보아야겠다."

그는 중얼거리고 외출의를 갈아입었다.

'갈까? 그만둘까?'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문밖에 나섰다. 여학생 간에 유행하는 보법으로 팔과 궁둥이를 전후좌우로 저으면서 엘리자베트는 길로 나섰다.

그는 파라솔을 받은 후에 손수건을 코에 대어서 쏘는 듯한 콜타르 냄새를 막으면서 N통, K정 들을 지나서 혜숙의 집에 이르렀다.

그리 부자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경성 중류민의 열에는 드는 혜숙의 집은 광대하지는 못하지만 쑬쑬하고 정하기는 하였다. (p.11-12)

 

그에게는, 두 달 동안 몸이 안 난 것이 생각이 났다. 잉태! 엘리자베트에 대해서는 이것이 '죽을'는 명령보다도 혹독한 것이다.

그는 잉태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미래 - 희미하고 껌껌한 그의 '생' 가운데, 다만 한 줄기의 반짝반짝하게 보이는 가는 광선 - 이러한 미래를 향하고 미끄러져서 나아가던 그는 잉태로 인하여 그 미래를 잃어버렸다. 그 미래는 없어졌다.

엘리자베트의 울음은 이것을 깨달은 때에 나오는 진정의 울음이다. 심장 복판 가운데서 나오는 참눈물이다.

이렇게 한참 운 그는 눈물주머니가 다 마른 후에 겨우 머리를 들고 전등을 켰다. 눈이 붉어지고 눈두덩이 부은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보통보다 곱 이상이나 크게 보였다.

'첫배는 그리 부르지 않는다는데. 게다가 달 반밖에 안 되었는데.' 하고 그는 다시 보았다. 조금도 부르지를 않았다.

'그래도 안 부를 수가 있나?'

하고 그는 또다시 보았다. 보통보다 삼 곱이나 크게 보였다.

쾅쾅 하는 아이의 발소리가 이럴 때에 엘리자베트의 방으로 가까이온다. 엘리자베트는 빨리 어두운 편으로 향하였다. 문이 열리며 여덟 살 된 남작의 아들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에게 저녁을 재촉하였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가 싫은 엘리자베트는 안 먹겠다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가 돌아간 뒤에 엘리자베트는 중얼거렸다.

'꼭 좋은 때 울음을 멈추었군. 좀더 울었더면 망신할 뻔했다.'

조금 후에 부인은 친절하게 죽을 쑤어다가 그에게 주었다. 죽을 먹고 죽 그릇을 돌려보낸 후에, 아까 울음으로 얼마 속이 시원해지고 원기까지 좀 회복한 엘리자베트는 남작과 이환 두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음속에 두 사람을 그린 후에 어느 편이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사랑스러운고 생각해보았다. 사랑스럽기는 이환이가 더 사랑스럽지만, 가깝기는 아무래도 남작이 더 가까운 것같이 생각된다.

이와 같은 결단은 그의 구하는 바를 채우지를 못하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편이 더 가깝고 가까운 편이 더 사랑스럽기를 원하였다. 그렇지만 사랑과 가까움은 평행으로 나가서 아무 데까지 가도 합하지를 않았다. 그는 평행으로 나가는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이 어디까지나 나가는가를 알려고, 마음속에 둘을 그려놓고 그 둘을 차차 연장시키면서, 눈알을 굴려서 그것들을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둘은 종시 합하지 않았다. 끝까지 평행으로 나갔다.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은, 끝까지 분립하여 있었다.

여기 실패한 엘리자베트는 다시 다른 생각으로 그것을 보충하리라 생각하였다.

사랑스러운 편이 자기에게 더 정다울까 가까운 편이 더 정다울까. 그는 생각해 보았다. 어떻든, 둘 가운데 하나는 정다워야만 된다고, 그는 조건을 붙였다. 그렇지만 엘리자베트는 여기서도 만족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아까 생각과 이번 생각이 혼돈되어 나온 결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편이, 물론 자기에게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다운 편은 어느 편인고?'

그는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완전히 해결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속이 답답해졌다.

자기에게는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이 온전히 분립하여 있는 것을 안 엘리자베트는, 어느 편이 자기에게 더 정다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둘이 동 정도로 정답다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 자기가 생각해 보아도 있지 못할 일이다. 남작과 이환새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다.

두 번째 생각도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이나 실패를 한 엘리자베트는, 이번에는 직접 당인으로 어느 편이 자기에게 더 정다게 생각되는가 자문해 보았다.

이환이가 더 정답다 생각할 때에도 마음에 얼마의 가책이 있고, 그러니 남작이 더 정답다 생각할 때에는 더 큰 아픔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는 억지로 생각의 끝을 또 다른 데로 옮겼다.

엘리자베튼 맨 처음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이번도, 사랑스러움은 이환의 편으로 갔다.

'이환이가 더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편이 자기에게 더 가까우니까, 이환이가 자기에게 물론 더 가깝다. 따라서, 정다움도 이환의 편으로 간다.'

그는 억지로 이렇게 해결하였다.

이렇게 해결은 하였지만, 또 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면 가깝던 남작은 어찌 되는가.'

그는 생각해 보았다. 맨 첫 번과 같이 역시 남작은 자기에게는 더 친밀하게 생각되었다. 그럼 이환이는...?

이환에 대한 미안이 마음속에 떠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속이타서 팔을 꼬면서 허리를 젖혔다. 그때에 벽에 걸린 캘린더가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캘린더는 다른 사건을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생각나게 하였다. 이 절박한 새 사건은 이환의 생각을 머리에서 내쫓기에 넉넉하였다. 오늘 밤에는 남작이 오리라 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엘리자베트에게 잉태를 생각나게 하였다. 남작이 오면 모든 일 - 잉태와 거기 대한 대처 - 을 말하리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작에게 할 말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말은 짧지마는, 이 말을 남작에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부끄러움에 다름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고 남작이 알아들어야된다는 조건아래서 할 말을 복안해 보았다. 한 번 지어서 검열한 후 교정을 가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네 번 해보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p.27-31)

 

그의 차차 혼돈되어가는 머리에도 한 가지 생각은 꼭 들러붙어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이환이를 사랑하였다. 이환이도 그를 사랑하였다. (엘리자베트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서로 사랑을 고백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각각 자기 사랑은 짝사랑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을 작사랑이라 생각한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쉽게 몸을 남작에게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 - 거반 성립되어가던 그의 사랑 - 신성한 동애 - 귀한 첫사랑은 파괴되었다. 육()으로 인하여 사랑은 파괴되었다. 사랑치 않던 사람으로인하여 참애인을 잃었다. 엘리자베트의 울음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모, 모, 몸으로 인하여....참사랑.....을...아 - 이환씨...S와 혜숙 고것들도 심하지. 우우 왜 당자에겐 그이...그 - 그이야기를 안 해...남작이. 아 - 잉태.'

일단 멎어가던 그의 울음이 이 새악이 머리에 지나갈 때에 또다시 폭발하였다. 눈물도 조금씩 나기 시작하였다. (p.36)

 

의사는 엘리자베트에게로 와서 저고리 자락을 열고 청진기를 거기 대었다. 의사의 손이 와 닿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무슨 벌레를 모르고 쥐었다가 갑자기 그것을 안 때와 같이 몸을 움쭉하였다. 그러면서도 엘리자베트는 의사의 손에서 얼마의 온미를 깨달았다. 이성의 손이 살에 와 닿는 것은, 엘리자베트와 같은 여성에 대하여서는 한 쾌락에 다름없었다. 엘리자베트가 이 쾌미를 재미있게 누리고 있을 때에 의사는 진찰을 끝내고 의미 있는 듯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남작에게로 향하였다. 남작은 의사에게 눈짓을 하였다.

어렴풋하게나마 이 두 사람의 짓을 본 엘리자베트는 이제껏 연속하고 있던 '어찌할꼬' 뒤로 무한 큰 부끄러움이 떠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는 희미하니 한 가지 일을 생각하였다.

'내가 대합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뒷일은 남작이 다 맡겠지.'

그는 일어서서 기다리는 방으로 나왔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은 일제히 엘리자베트의 편으로 향하였다. 모두 내 일을 아누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아까 전차에서 자기에게로 향한 눈 가운데서 얻은 그 쾌미는, 구하려도 구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눈 가운데서 큰 고통과 부끄러움만 받은 그는 한편 구석에 구겨 앉아서 차마 앞자락을 들여다 보기 시작하였다. 거기는 불에 타진 조그마한 구멍 하나가 엘리자베트의 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구멍이 공연히 미워서 손으로 빡빡 비비다가 갑자기 별한 생각이 나는 고로 그것을 뚝 그쳤다.

'이 세상이 모두 나를 학대할 때에는 나는 이 구멍 안에 숨겠다.'

그는 생각하였다. 이럴 때에 그 구멍 안에는 어떤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첫 번에는 흐릿하던 것이, 차차 똑똑히까지 보이게 되었다.

때는 사 년 전 '춘삼월 호시절,' 곳은 우이동. 피고 우거지고 퍼진 꽃 사이를 벗들과 손목을 마주 잡고 웃으며 즐기며 또는 작은 소리로 곡조를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며 희희낙락 다니던 자기 추억이 그림자로 변하여 그 구멍 속에 나타났다. 자기 일행이 그 구멍 범위 밖으로 나가려 할 때에는 활동사진과 같이 번쩍한 후 일행은 도로 중앙에 와 서곤 한다.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의 엘리자베트와 지금의 엘리자베트 사이에는 해와 흙의 다름이 있다. 그때에는 순전한 처녀이고 열렬한 분홍빛 탄미자이던 그가 지금은...? 싫든지 좋든지 죽음의 갈흑색의 '삶' 안에서 생활치 않을 수 없는 그로 변하였다.

'때'도 달라졌다. 십 년 동안 평화로 지낸 지구는, 오스트리아 황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동원을 한다. 도이치가 싸움을 하련다. 잉글리시가 어떻다, 프랑스가 어떻다, 매일 이런 이야기가 신문에 가뜩가뜩 차게 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주위도 달라졌다. 그의 모든 벗은 다 쪽쪽이 헤어졌다. R은 동경서 미술 공부를 한다. 또 다른 R은 하와이로 시집을 갔다. T는 여의가 되었다. 그 밖에 아직 공부하는 사람도 몇 있기는 하지마는 대개는 주부와 교사가 되었다. 주부 된 벗 가운데는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 된 사람까지 있다. 그들 가운데 한둘밖에는, 지금은 엘리자베트를 만나도 서로 모른 체하고 말도 안 하고 심지어 슬슬 피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혜숙이 - 그는 엘리자베트의 어렸을 때부터의 벗이다. 둘은 같은 소학에서 졸업하고 같이 R학당에 입학하였다가 엘리자베트가 부상에 연속하여 모상으로 일 년 학교를 쉬는 동안에 혜숙이도 연담으로 일 년을 쉬게 되고, 엘리자베트가 도로 상학케 될 때에 혜숙이도 파혼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에게는 유일한 벗이다. 불에 타진 구멍 속에 나타난 그림자 가운데서도 엘리자베트는 혜숙이와 제일 가까이 서서 걸었다.

추억의 눈물이 엘리자베트의 치마 앞자락에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눈물로써, 슬프고 섧고 원통하고도 사랑스럽고 즐겁고 회포 많은 그 그림자가 가리운 고로,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씻고 다시 그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 구멍에는, 참 예술적 활인화, 정조로 찬 그림자는 없어지고 그 대신으로 갈포 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엘리자베트는 소름이 쭉 끼쳤다. 자기가 지금 어디를 무엇 하러 와 있는지 그는 생각났다.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들고 방을 둘러보았다. 어떤 목에 붕대를 한 남자와 어떤 아이를 업고 몸을 찌긋찌긋하던 여자가 자기를 보다가 자기 시선과 마주친 고로 머리를 빨리 돌리는 것밖에는 엘리자베트의 주의를 받은 자도 없고 엘리자베트에게 주의하는 사람도 없다. 그는 갑갑증이 일어났다. 너무 갑갑한 고로 자기 손금을 보기 시작하였다. 손금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자식금도 없고 명금도 짧고 부부금도 나쁘고 복금 대신으로 궁금이 위로 빠져 있었다.

이 나쁜 손금도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못하였다. 그의 심리는 복잡하였다. 텡텡 비었다. 그는 슬퍼하여야 할지 기뻐하여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는, 울고 싶은 생각도 있고 웃고 싶은 생각도 있고 뛰놀고 싶은 생각도 있고 죽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 복잡한 심리는 엘리자베트로서 아무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마음이 텡텡 빈 것 같이 되게 하였다.

이제 자기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약이 생긴다 할 때에 그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의 경우를 생각할 때에 그는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혜숙이와 S를 생각할 때에...

엘리자베트가 손금과 추억 및 미릿생각들을 복잡히 하고 있을 때에 남작이 와서 그에게 약을 주고 빨리 병원을 나가고 말았다.

약을 받은 뒤에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약을 병째로 씹어 먹고 싶도록 애착의 생각이 나는 또 한편에는 약에게 이 위에 더없는 저주를 하고 태평양 복판 가운데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에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일어서서 몰래 가만히 기지개를 한 후에 허둥허둥 병원을 나서서 전차로 집에까지 왔다. (p.42-46)

 

이튿날 아침 열 시쯤 엘리자베트가 탄 인력거는 서울 성밖에 나섰다. 

해는 떴지마는 보스럭비는 보슬보슬 내리붓고 엘리자베트의 맞은편에는 일곱 빛의 영롱한 무지개가 반원형으로 벌리고 있다.

비와 인력거의 셀룰로이드 창을 꿰어서 어렴풋이 이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남작 부인에게 자기 같은 약한 것에는 촌이 좋다고 밝히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반생 이상을 서울서 지낸 엘리자베트는 자기 둘째 고향을 떠날 때에 마음에 떠나기 설운 생각이 없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고 자기에게 끝없이 동정하는 남작 부인이 있지 않으냐. 엘리자베트는 부인이 친절히 준 돈을 만져 보았다.

이렇게 서울에서 섭섭한 생각을 가진 엘리자베트는 몸은 차차 서울을 떠나지만 마음은 서울 하늘에서만 떠돈다. 어젯밤에 밤새도록 잠도 안자고 내일은 꼭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심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그렇게 해결까지 한 그도, 막상 서울을 떠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만약 자기가 말할 용기만 있으면 이제라도 인력거를 돌이켜서 서울로 향하였으리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만 그에게는 그리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제일 말하기가 싫었고 인력거꾼에게 웃기우기가 싫었다. 그러는 것보다도, 그는 말은 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의 어떤 물건이 그것을 막았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인력거는 바람에 풍겨서 한편으로 기울어졌다가 이삼 초 뒤에 도로 바로 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장마 때 바람은 윙! 소리를 내면서 인력거 뒤로 달아난다.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갑자기 '생각날 듯 생각날 듯하면서 채 생각나지 않는 어떤 물건'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한참 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남작, 그는 가렵고도 가려운 자리를 찾지 못한 때와 같이 안타깝고 속이 타는 고로 살눈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작'이 자기 생각의 원몸에 가까운 것 같고도 채 생각나지 않았다.

'남작이 고운가 미운가, 때릴까 안을까, 오랠까 쫓을까.'

그는 한참이나 남작을 두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탁 눈을 츠뜨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야 겨우 그 원몸이 잡혔다.

"재판!"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남작을 걸어서 재판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큰 문제에 다름없었다. 남작 부인에게 얻은 위로금이 재판 비용으로는 넉넉하겠지만, 자기를 끝없이 측은히 여기는 부인에게 남편이 잘못한 일을 알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차마 못 할 일이다. 이 일을 알면 부인은 제 남편을 어찌 생각할까. 엘리자베트 자기를 어찌 생각할까. 남작 집안의 어지러움 -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후 하니 내쉬었다. 그것뿐이냐. 서울에는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다. 만약 재판을 하면 그 일이 신문에 나겠고, 신문에 나면 이환이가 볼 것이다. 이환이가 이 일을 알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 몇백 명 동창은 어떻게 생각할까. 세상은 어떻게 생각할까.

"재판은 못 하겠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남작의 미운 짓을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가만있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바람과 앞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바람과 앞길 밖에 사랑과 벗과 모든 즐거움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그는 후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서울과는 온전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게 되었느냐. 이와 같은 남작을....이와 같은 죄인을...

"아무래도 재판은 하여야겠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로도 재판을 하여야 할 지 안 하여야 할지 똑똑히 해결치를 못하였다. 하겠다 할 때에는 갑이 그것을 막고, 못하겠다 할 때에는 을이 금하였다.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

그는 속이 타는 고로 억지로 이렇게 마음을 먹고 생각의 끝을 다른 데로 옮겼다. (p.50-53)

 

세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온 그의 다리는 엘리자베트의 자유로 되지 않았다. 그는 취한 것같이 비틀비틀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이 허둥허둥 낮은 대문을 들어섰다. 비는 용서 없이 엘리자베트의 머리에서 가는 모시 저고리 치마 구두로 내리쏜다. (p.55)

 

뜰 움푹움푹 들어간 데마다 물이 고였고 물 고인 데마다 비로 인하여 방울이 맺혀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고, 또 새로 생겨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곤 한다. 초가집 지붕에서는 누렇고 붉은 처마물이 그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린다.

한참이나 눈이 멀거니 뜰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오촌모가 밥과 달걀, 반찬, 김치 등 간단한 음식을 엘리자베트를 위하여 차려왔다.

엘리자베트는 점심을 먹은 뒤에 또 뜰을 내다보기 시작하였다. 뜰 한편 구석에는 박 넌출이 하나 답답한 듯이 웅크러뜨리고 있었다. 잎 위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기울어지며, 고였던 물이 땅에 쭈르륵 쏟아지는 것이 엘리자베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 잎들 아래는 허옇고 푸른 크담한 박 하나가 잎이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걸핏걸핏 보였다.

박 넌출 아래서 머구리 한 마리 우덕덕 뛰어나왔다. 본래부터 머구리를 무서워하던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빨리 돌렸다. 머구리에게 무서움을 가지는 동시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아까의 걱정이 떠올랐다.

그는 낯을 찡그리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p.57)

 

엘리자베트의 말을 들은 오촌모는 성난 소리로 책망하였다.

괴로운 침묵이 한참 연속하였다. 아주머니의 책망을 들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울음소리까지 그쳤다.

참 뒤에, 오촌모는 엘리자베트가 불쌍하였던지 이제 방금 온 것을 책망한 것이 미안하였던지 말을 돌린다.

"그래두 재판은 못 한다. 우리는 상것이고 저편은 양반이 아니냐?"

아직 채 작정치 못하고 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이 이 말 한마디로 온전히 작정되었다. 그는 아주머니의 말을 우쩍 반대하고 싶었다.

"재판에두 양반 상놈 있나요?"

"그래두 지금은 주먹 천지란다."

엘리자베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양반 상놈 문제에 얼토당토않은 주먹을 내놓는 아주머니의 무식이 그에게는 경멸스럽기도 하고 성도 났다. 그렇지만 그 말의 진리는 자기가 지낸 일로 미루어보아도 그르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재판은 꼭 하고 싶었다. 그래도 재판은 꼭 하고 싶었다. (p.59)

 

이튿날 엘리자베트는 남작을 걸어서, 정조 유린에 대한 배상 및 위자료로서 오천 원, 서생아 승인, 신문상 사죄 광고 게재 청구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일으켰다. (p.60)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쩍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머니는 방 안에 없었다. 부엌에서 덜겅거리는 고로 거기 있나 보다 그는 생각하였다.

전에는 그리 주의하여 보지 않았던 그 방 안의 경치에서 병인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는 새로운 맛있는 것을 여러 가지 보았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담벽 사면에 붙인 당지들이다. 일본 포속들에서 꺼내어 붙인 듯한 그 당지들을 엘리자베트는 흥미의 눈으로 하나씩 하나씩 건너보았다.

다음에 보인 것은 천장 서까래 틈에 친 거미줄들이다. 엘리자베트는 그 가운데 하나를 자세히 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 욍하니 날아오던 파리가 한 마리 그 줄에 걸렸다. 거미줄은 잠깐 흔들리다가 멎고 어디 있댔는지 보이지 않던 거미가 한 마리 빨리 나와서 파리를 발로 움킨다. 파리는 깃을 벌리고 도망하려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거미줄은 대단히 떨렸다. 그렇지만 조금 뒤에 파리는 죽었는지 거미줄의 흔들림은 멎고 거미 혼자서 발발 파리를 두고 돌아다닌다. 엘리자베트는 바르륵 떨면서 머리를 돌이켰다.

'저 파리의 경우와.내 경우가, 어디가 다를까? 어디가...?'

엘리자베트가 움직할 때에 파리가 한 마리 욍 나타났다. 그 파리의 날기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다른 파리들도 일제히 욍 - 날았다가 도로 각각 제자리에 앉는다.....(p.69)

<해설-이현숙>

엘리자베트는 K남작의 아이를 갖고 서울에서 쫓겨나 오촌모가 있는 시골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소송을 걸어 K남작에게 위자료를 받아내려 하지만 K남작은 변호사를 사서 뱃속에 잉태된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며 가볍게 승소해 버립니다. 그녀는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학교와 친구들이 있는 보금자리로부터 쫓겨나 세상에 버림받은 처지에 놓였을 때 비몽사몽간에 오촌모의 방 천장 서까래에 친 거미줄을 보게 됩니다.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든 파리는 도망치려 하지만, 그럴수록 단단한 거미줄에 걸려들어 옴쭉달싹 하지 못한 채 거미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런 가련한 파리의 모습에서 엘리자베트는 단단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헤매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자신의 운명을 나락에 빠뜨린 K남작은 무지한 힘을 가진 거미이며, 자신은 거기에 걸려든 힘없는 약자라는 인식에 도달합니다.

김동인은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은 강한 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일제에 당한 것도 일제에 비해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요, 엘리자베트가 속절없이 당한 것도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힘없는 약자의 운명은 그것이 나라이든, 민족이든, 개인이든 간에 힘을 가진 세력 앞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의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p.88-89)

 

엘리자베트는 낯을 찡그리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낙태는 죽는 사람두 있너니라..."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하려다가 말이 하기 싫은 고로 그만두었다. 말은 또 끊어졌다. 엘리자베트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대답하려 하였다.

'죽으면 뭣 하는가.'

그는 병적으로 날카롭게 된 머리로 생각해 보았다.

'내게 이제 무엇이 있을까? 행복이 있을까? 즐거움은? 그것도 없다. 반가움은? 물론 없지.. 그럼 무엇이 있을까? 먹고 깨고 자는 것 뿐 - 그 뒤에는? 죽음! 그 밖에 무엇이 있을까? 아, 아! 어떨까? 없다! 그러면? 나 같은 것은 죽는 편이 나을까? 물론. 그럼 자살? 아!"

'자살? (그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모르겠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보자. 죽는 것도 무섭지 않고, 사는 것도 싫지도 않고 - .'

이때에 오촌모가 말을 시작했다.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라."

"그만두세요."

그는 우덕덕놀라면서 무의식히 날카롭게 말하였다.

"그래두 내 잠깐 다녀오지."

아주머니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아주머니가 나간 뒤에 그는 또 생각해 보았다.

내 근 이십 년 생애는 어떠하였는가? 앞일은 그만두고 지난 일로...근 이십 년 동안이나 살면서, 남에게, 사회에게 이익한 일을 하나라도 하였는가? 벗들에게 교과를 가르친 일 - 이것뿐! 이것을 가히 사회에 이익한 일이라 부를 수가 있을까? (그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나 있다! '표본' (그는 괴로운 웃음을 씩 - 웃었다.) 이후 사람을 경계할 만한 내 사적! 곧 '표본! ' 표본 생활 이십 년...아...!

그러니 이것도 내가 표본이 되려서 되었나? 되기 싫어서도 되었지. 헷데로 돌아간 이십 년, 쓸데없는 이십 년. '나'를 모르고 산 이십 년, 남에게 깔리어 산 이십 년. 동안에 번 것은? 표본! 그동안에 한 일은? 표본!

그는 피곤해진 고로 눈을 감았다. 더움과 추움이 그를 쏘았다. 그는 추워서 사지를 보들보들 떨면서도 이마와 모든 틈에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래는 수만 근 되는 추를 단 것같이 대단히 무거웠다. (p.73-73)

 

천장에는 소가 두 마리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였다. 두 마리의 소는 싸움을 시작하였다.

'떨어지면...?' 생각할 때에 한 마리는 그의 배 위에 떨어졌다. 일순간 뜨끔한 아픔 뒤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앍' 소리를 내고 그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소는 역시 두 마리지만 이번은 춤을 추고 있다.

"표본 생활 이십 년!"

그는 중얼거리고 담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거기서는 남작과 이환과 돼지와 파리가 장거리 경주를 하고 있었다.

'흥! 재미있다. 누구가 이길 터인고?'

그는 생각하였다.

조금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수군거렸다.

"표본 생활 이십 년!" (p.76)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덧 역한 냄새 나는 모기장이 그를 덮었고 그의 곁에는 오촌모가 번뜻 누워서 답답한 코를 끌고 있었다. 위에는 불티를 잔뜩 앉히고 그 아래서 숨찬 듯이 할락할락하는 석유 램프는 모기장 밖에서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며 할딱거리고 있었다.

'가는 목숨이로라도 살아지는껏 살아라.'

그 램프는 소곤거리는 것 같다.

엘리자베트는 일어나서 요강을 모기장 밖에서 들여왔다.

한참을 타고 앉았다가 '악' 소리를 내고 그는 엎어졌다. 가슴은 뛰놀고 숨도 씩씩해졌다. 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맥도 푹 났다.

한참 엎디어 있다가 그는 생간난 듯이 벌떡 일어나서 요강을 내놓고 번갯불과 같이 빨리 그 속에 손을 넣어서 주먹만 한 핏덩이를 하나 꺼내었다.

'내 것.'

그의 머리에 번갯불과 같이 이 생각이 지나갔다.

그의 머리에는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내 것.'

참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 핏덩어리에게 일어났다. 

'이것 때문에....'

그는 그 핏덩이에 대하여 무한한 미움이 일어났다.

'이것도 저 아니꼬운 남작의 것. 나는 이것 때문에...'

이 두 가지 생각의 반사 작용으로 그는 핏덩이를 힘껏 단단히 쥐었다. 거기에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 핏덩이를 씹어 먹고 싶었다. 거기도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쥔 채로 드러누웠다. 맥이 나서 앉아 있을 힘이없었다.

드러누운 그에게는 얼토당토않은 딴생각이 두어 가지 머리에 났다. 이것도 잠깐으로 끝나고 잠이 들었다.

이삼 푼의 잠이 그를 스치고 지나간 뒤에 그는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표본 생활 이십 년!"

그 다음 순간 그에게는 별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약한 자의 슬픔!'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논문 비슷이, 소설 비슷이 하나 지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생각해 보았다.

자기의 설움은 약한 자의 슬픔에 다름없었다. 약한 자기는 누리에게 지고 사회에게 지고 '삶'에게 져서, 열패자의 지위에 이르지 않았느냐?! 약한 자기는 이환에게 사랑을 고백지 못하고 S와 혜숙에게서 참말을 듣지 못하고 남작에게 저항치를 못하고 재판석에서 좀더 굳세게 변론치를 못하여 지금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이것은 밖이 약한 것이다. 좀더 깊이, 안으로!'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가 아직까지 한 일 가운데서 하나라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어디 있느냐? 반동 안 입고 한 일이 어디 있느냐? 남작 집에서 나온 것도 필경은 부인이 좀더 있으라는 반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병원안에 들어간 것도 필경은 집으로 돌아올 전차가 안 보임에 있지 않으냐? 병원으로 향한 것도 그렇다. 재판을 시작한 것은? 오촌모가 말리는 반동을 받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이십 세기 사람이 다 그렇다."

그는 힘 있게 중얼거렸다.

"어떻든....응! 그렇다! 문제는 '이십세기 사람'이라고 치고, 첫 줄을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줄을 '현대 사람의 다의 약함'으로 끝내자."

그는 자기 짓던 글을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표본 생활 이십 년이란 구는 꼭 넣어야겠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글을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리 짓고 저리 지어서, 이만하면 완전하다 생각할 때 그는 마지막 구를 소리를 내어서 읽었다.

"현대 사람 다의 약함!"

그런 다음에는 그의 머리에 한 공허가 생겼다. 그 공허가 가슴으로 퍼질 때에 그는 맥이 나고 발끝과 손끝에서 그 공허가 일어날 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이 무한 무거워졌다. 그 공허가 온몸에 퍼질 때에 그는 '후-' 숨을 내쉬면서 잠이 들었다. (p.79-82)

 

"아 - 서울 가보구...."

"걱정 마라. 이제 곧 가게 되지."

"아주머니!"

"왜 그러냐?"

"그 애들이 아직 날 기억할까요?!"

"그 애덜이라니?"

"함께 공부하던 애들이요."

"하하! (한숨을 쉬고) 걱정 마라. 거저 걱정 마라. 내가 있지 않냐? 인젠 그깟 것들이 무엇에 쓸데가 있어? 나하구 이렇게 편안히 촌에서 사는 것이 오죽 좋으냐! 아무 걱정 없이....지난 일은 다 꿈이다. 꿈이야! 잊구 말어라."

'강한 자!'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아주머니는 강한 자이고 나는 약한 자이고...그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을꼬?!"

"내 다녀올 것이니 편안히 누워 있거라."

오촌모는 말하면서 봇짐을 들고 나간다.

"무얼 사다 줄꼬 원. 복숭아나 났으면 사다 줄까. 우리 딸을..."

엘리자베트는 자기 생각만 연속히 하였다. 스스로 알지는 못하였으나 어떤 회전기 위기 앞에 선 그는 산후의 날카로운 머리를 써서 꽤 똑똑한 해결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 나도 사방은 강한 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다. 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 어찌 알 수가 있으리요?! (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 올랐다.) 강한 자라야만 자기의 약한 곳을 찾을 수가 있다.

약한 자의 슬픔! (그는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전의 나의 설움은 내가 약한 자인 고로 생긴 것밖에는 더 없었다. 나뿐 아니라, 이 누리의 설움, 아니 설움뿐 아니라 모든 불만족, 불평 들이 모두 어디서 나왔는가? 약한 데서! 세상이 나쁜 것도 아니다! 인류가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만 약한 연고인밖에 또 무엇이 있으리요. 지금 세상을 죄악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 우리 사람이 약한 연고이다! 거기는 죄악도 없고 속임도 없다. 다만 약한 것!

약함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류에게는 싸움이 안 그치고 죄악이 안 없어진다.. 모든 죄악을 없이 하려면 먼저 약함을 없이 하여야 하고, 지상 낙원을 세우려면 먼저 약함을 없이 하여야 한다.

만일 약한 자는, 마지막에는 어찌 되노?...이 나! 여기 표본이 있다. 표본 생활 이십 년 (그는 생각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참 약했다. 일 하나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것이 어디 있는가! 세상 사람이 이렇다 하니 나도 이렇다, 이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어찌 볼까 이런 걱정으로 두룩거리면서 지냈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요! 하고 싶은 일은 자유로 해라. 힘써서 끝까지! 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고 진리를 발견하리라!

'그렇지만 강한 자가 되려면...'

그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사랑하라!' (그는 기쁨으로 눈에 빛을 내었다.) 그렇다! 강함을 배는 태는 사랑! 강함을 낳는 자는 사랑! 사랑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모든 아름다움을 낳는다. 여기, 강해지고 싶은 자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자는, 삶의 진리를 알고 싶은 자는, 인생을 맛보고 싶은 자는 다 참사랑을 알아야 한다.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에 널려 있는 사랑, 자연에 퍼져 있는 사랑,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

'그렇다! 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

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 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 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 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올랐다. (p.85-87)

 

<작품해설 - 이현숙>

엘리자베트는 K남작에 의해 몸과 마음이 망가진 후, 오촌모가 계시는 시골에서 요양하며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표본 생활 이십 년'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나오는 표본의 의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됨의 본보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엘리자베트는 아름답고 꿈이 많은 여자었지만, 한 번도 자신의 삶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지 못한 인물입니다. 사랑했던 이환에게 한 마디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친구인 S가 이환의 사촌임을 알게 된 뒤에도 오히려 S를 피하는 점에서도 이러한 삶에 대한 의지의 부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가 내세울 만한 아름다운 외모도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써 스스로 지킬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큰 상처받을 조건에 불과합니다. 결국, 엘리자베트가 가진 것은 허황된 공상과 변덕스런 심리뿐입니다. K남작의 유혹이 성공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녀의 내부에는 처음부터 세계와 맞설 어떤 힘도 자신의 의지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계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의 현실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키고 방어하며 인생의 작은 문을 열어가는 사람은 바로 인생의 주인공인 자기 자신입니다. 한 개인의 삶의 변화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좀더 나은 삶에 대한 의지로 노력해 갈 때 가능한 법입니다.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삶이 남에게 하찮은 표본밖에는 안 된다는 절실한 깨달음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한 결과입니다. (p.93-84)

 

강한 자가 되려면 사랑하라. 약한 자는 먼저 강해져야 한다. 강한 자만이 사랑을 베풀고 온누리에 평안을 줄 수 있다. 작가가 소설의 마지막에 참사랑을 말하는 것은 목적도 결과도 아니다. 세상의 평화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며 그 사랑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강해야만 한다. 결국 김동인의 참사랑은 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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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1900년 10월 2일~1951년 1월 5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춘사(春士)이다. 필명으로는 금동인(琴童人), 김시어딤, 동 문인(東 文仁) 등을 썼다.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金大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발표했다. 같은 달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朝鮮留學生學友會)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월 26일 풀려났다. 1923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고,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
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39년 4월부터 5월까지 ‘북지(北支) 황군(皇軍)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에「감격과 긴장」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지지했으나, 같은 해 일본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했다가 7월 불경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3년 4월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輔國會)에 참가해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했다. 1945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생활 수감」을 게재했다. 이 밖에 잡지 『조광(朝光)』, 『신시대』 등에 친일소설 및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7년 3월 『백민』에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문단 30년의 자취」 등을 게재했다. 1949년 7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작품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감자」(1925)·「광염(狂炎)소나타」(1929)·「발가락이 닮았다」(1932)·「붉은 산」(1932)·「김연실전(金姸實傳)」(1939)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해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했다.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운현궁(雲峴宮)의 봄」(1933)·「대수양(大首陽)」(1941) 등이 있다. 평론으로는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해 「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1929)·「춘원연구(春園硏究)」(1934·1935) 등이 있다. 그 밖에 「목숨」(1921)·「정희」·「시골 황서방」(1925)·「송동이」(1929)·「반역자(反逆者)」(1946) 등의 단편과 「여인(女人)」(1930)·「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사후 1964년 『동인전집』 전 10권과 1976년 『김동인전집』 전 7권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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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 김동인 (문하과지성사)

 

김동인 단편선 (에세이퍼블리싱)

감자 - 김동인 (애플북스)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애플북스)

감자 - 김동인 (현대문학)

감자 - 김동인 (글누림) 

감자 - 김동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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