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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우스운 자의 꿈 - 도스토예프스키 (고일 옮김, 작가정신)

by handaikhan 2024. 2. 23.

 

도스토옙스키 - 우스운 자의 꿈 ( 1877년)

 

나는 우스운 인간이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부른다. 만일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예나 다름없이 여전히 우스운 인간이 아니라면 이건 일종의 승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 모두 사랑스럽다. 날 비웃어도 왠지 더 사랑스럽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렇게 슬프지만 않다면 나 또한 나 자신을 비웃고 바라볼 때 그렇게 슬프지만 않다면 나 또한 나 자신을 비웃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으련만. 서글픈 건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아, 혼자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렴, 이해하지 못하고 말고.

예전에 나는 우스운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사실 그랬다. 나는 항상 우스운 인간이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지 않았나 싶다. 내가 우스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건 일곱 살 때였던 것 같다. 이후 난 학교에 들어갔고 대학에서도 공부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우스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더욱 뚜렷이 알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서 익힌 학문들은 몰두하면 할수록 궁극적으로 내가 얼마나 우스운 인간인가를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또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학문에서와 비슷하게 인생에서도 그랬다. 모든 점에서 우스운 나의 몰골에 대한 자각은 해가 갈수록 커져갔고 내 안에서 뿌리를 내렸다. 모든 사람이 항상 날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만일 이 세상에 내가 우스운 인간이라는 걸 가장 잘 아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들이 이걸 모른다는 게 내겐 무엇보다도 큰 치욕이었다. 그러나 그런 데는 내 잘못이 컸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걸 고백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자존심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만 갔다. 그래서 만일 누가 됐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우스운 인간이라는 걸 고백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날 밤으로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내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어렸을 때 행여 견디다 못해 친구들에게 불쑥 고백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끔찍한 성격에 대한 자각은 더욱 깊어갔지만 동시에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영혼 안에서 나의 존재를 초월하는 상황에 대한 동경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세상살이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확신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기는 하나 완전히 확신하게 된 건 뜻밖에도 지난해였다. 세상이 존재하건 안 하건 또 무엇이 어디에 존재하건 안 하건 나와는 상관없다고 갑자기 느낀 것이다. 나는 내 주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에 반해 이전에는 많은 것이 존재했었다고 여겨졌으나 나중에는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 실상은 이전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점차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는 문득 사람들에 대해 화를 내지 않게 되었고 그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도 나타났다. 한 예로 거리를 걷다가 사람들과 자주 부딪쳤는데 생각에 잠겨서 그런 건 아니었다. 생각할 게 없었으니까. 그 당시에 나는 사유 제츨 완전히 중단한 상태였다. 매사에 관심이 없었다. 해결할 문제들이 있었지만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어디 한둘이었나? 아무튼 나는 만사가 귀찮았다. 따라서 어떤 문제든 내게서 멀어져갔다. (p.1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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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이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 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 7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나 15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는 중인 계급이었으므로 넉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매우 거친 성격이었으므로, 자식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도스토옙스키는 1834년 열세 살 때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1837년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자녀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 죽음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1837년 아버지는 장남 미하일과 열여섯 살이 된 차남 도스토옙스키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1838년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다. 소심하고 예민하며 병약했던 소년 도스토옙스키에게 군사 훈련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문학은 유일한 위안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습작을 서로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하던 시기로 도스토옙스키도 이 때 프리드리히 실러에 빠져 있었다.
1839년 6월 6일,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도스토옙스키의 어머니가 죽은 후 영지로 내려가 생활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형제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기 작가 O. 밀레르에 따르면 이 시기에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1841년 8월,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문학으로 기우는 열정을 저버리지 못하고, 작가가 되어 문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1844년 10월 제대하였다.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 '제 2의 고골'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 전에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직접 작품을 건네받아 읽었던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밤 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데뷔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이어서 발표한 《백야》와 《분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 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페트라솁스키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년 4월 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온 이 경험으로 인하여 몇몇 사람은 공포와 충격으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도《백치》 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묘사하는 등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감옥 수형과 출소 후에 수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까지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 성서 이외에는 일절 출판물이 허용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성서에 대한 깊은 독서와 감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혔던 죄수와 민중들의 생생한 삶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의 사상적 변화를 겪게끔 하였다. 이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일 《죽음의 집의 기록》을 펴냈다. 출소 후 세미팔라틴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하며 당시 남편이 있었던 여성 마리야 이사예바를 만난다. 마리야의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당시 29세였던 그녀와 결혼한다. 그는 가까스로 1859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메꾸고자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1861년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듬해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1864년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 하였으나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1867년부터 외국, 특히 드레스덴에 거주하면서 《백치》, 《악령》 등을 쓰고 귀국하였다. 1874년 《미성년》을 발표하여 큰 돈을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베리아 유배 시절에 악화된 지병인 간질[1]과 취미로 즐기던 도박 등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작품 속에 중요한 요소들로 간질과 도박 등이 자주 등장한다. 도박은 그의 인생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 《도박꾼》 등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구술 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속기사였던 안나 스니트키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작가의 일기》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잡지 《시민》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담당했던 문예란에 게재했던 것으로, 문예 지평[3], 정치·사회평론, 에세이, 단편 소설, 강연 원고[4], 종교론[5] 등을 포함하고 있어 훗날 도스토옙스키 연구에 귀중한 문헌 자료가 되었다.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 즈음에는 이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 하여 작품을 완성했다.[6]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 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 아내에게 시베리아 형무소에 있었던 시절 지니고 있었던 성경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날 밤 11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죽었다.[7] 유해는 같은 달 3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며 20세기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은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는 《죄와 벌》(1866년), 《카라마조프의 형제》(1879년 ~ 80년) 등이 있다.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다가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의 소설은 흔히 이질적, 극단적 심리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때로 그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하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실의 수기》를 "실존주의를 위한 최고의 서곡"이라 묘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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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백야 - 도스토옙스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백야 - 도스토옙스키 (채수동 옮김, 동서월드북)

도스토옙스키 전집 (열린책들 25권 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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