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한국문학 413 (96권)
목차
김영하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
박성원
댈러웨이의 창
하늘의 무게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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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 하루
여자가 간선 도로를 빠져나온 시간은 오후 3시 19분이었다. 1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지나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 여자의 차량이 진입로로 들어섰지만 정체는 여전했다. 연말을 앞두고 있었고, 눈까지 내렸다. 차창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만큼 차량들은 더디게 움직였다. 여자는 히터를 조금 줄였다. 한 시간 이상 차 안에 갇혀 있던 여자의 입은 사막이라도 된 것처럼 건조했다. 여자는 침을 모으려 했지만 납땜이라도 된 것처럼 입술이 무거웠다. 대시보드를 열고 물을 찾았지만 대시보드 안에는 면장갑 한 짝과 늘어난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일회용 카메라만 보일뿐이었다. 여자는 대시보드를 닫고 대신 운전석에 있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작은 눈송이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여자의 어깨에 닿았다. 여자는 기어를 중립에 놓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겼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을 빼자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역 버스가 여자의 차량 옆에 있었고, 버스에는 어느 외국 소설가의 책 광고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주름이 곱게 진 서양 작가의 사진 위에는 커다란 명조체로 광고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화제의 신간이라고 했고, 책이 출판된 그 나라에선 백만 부 이상이 팔린 책이라고 되어 있었다. 작가의 이름을 보자 여자는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송이들이 외국 작가의 얼굴 위로 달라붙었다가 금세 녹았다. (p.117-118)
여자는 공연 직전의 어둠이 좋았다. 여자가 연극에 뛰어든 것도 모두 공연 직전의 어둠 때문이었다. 관객들의 희미한 살빛이 드물게 보이는 관객석, 단출한 소품들이 숨죽이고 있는 무대. 무대 뒤편에서 그런 어둠을 응시할 때마다 여자는 어둠이 주는 빈 공간 때문에 숨이 막혔다,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 어둠 속 무대 위로 나가야만 해.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여자는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힐수록, 무거운 바위에 깔린 듯한 기분이 들수록 여자는 약간의 빈혈과어지럼증을 느꼈다. 손과 발이 저릿해지면서 머릿속에 있는 산소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ㄱ넛 같았다. 그러면 여자는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고, 여자는 그런 얕은 현기증에 몸을 맡기는 것이 좋았다.
연극을 그만둔 이후로 여자는 그런 어둠을 찾을 수 없었다. 가끔 공연을 보러 갔지만 관객석에서 바라보는 어둠은 관객들이 내는 작은 소음들 때문에 이내 일그러졌다.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지루함이었다. 조금의 어둠도 견디지 못하는 관객들은 어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견디지 못하는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예전에 내가 느꼈던 그런 어둠이 아냐. 공연장을 찾을 때마다 여자는 생각했다.
어둠 속으로 곧 올라간다는 기대감이 여자에겐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여자는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곤 했다. 무대를 떠난 여자에게 남은 건 무대의 어둠이 아니라, 밝고 밝은 거리뿐이었다. 여자에겐 자신만의 어두운 공간이 필요했고 자동차 안을 불 꺼진 무대처럼 꾸미고자 했다. 바깥이 차단된 차 안은 무대처럼 어두웠다. 그제야 여자는 예전에 느꼈던 어둠을 자동차 안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그런 계절이야. 그것 알아?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깊은 우물 안으로 떨어지고 있는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걸.
여자는 중얼거렸다. 여자가 중얼거린 대사는 여자가 가장 좋아하던 대사였다. 여자가 그 대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 역할을 맡은 공연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이란.
여자는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맡은 일에 충실했을 뿐이오. 우유 배달부는 우유를 열심히 배달할 것이며, 목회자는 열심히 기도할 것이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열심히 일을 할 것이며, 선생은 열심히 가르칠 것이며, 경찰은 범죄자를 잡을 것이며, 그럴 때 엉터리는 바로잡힐 것이며, 우리들의 하루는 오늘도 온전할 것이오.
여자가 외우고 있는 대사는 술에 취해, 젊은 새 여자 친구 앞에서 무게를 잡으며 내뱉던 대사였다. 남자 역할을 맡았던 여자는 모자를 눌러썼고, 수염을 붙였고, 펑퍼짐한 바지를 입었다. 희곡도 연출도 배우들도, 하다못해 조명조차도 형편없었지만 남자 역할을 맡았으므로 여자는 그 연극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형편없었고, 평에 한 번도 오르내린 적도 없는 연극이었지만 여자는 그 역할과 대사를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그런 계절이야. 그것 알아?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깊은 우물 안으로 떨어지고 있는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걸.
여자는 굵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시게를 보았다. 10여 분만 있으면 은행 영업시간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차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p.120-122)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는 언제나 잘 다려진 와이셔츠 같았다. 여자의 아버지는 남편에 비하면 늘 헐렁했다. 누군가가 생각해서 챙겨 주더라도 헐렁한 옷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리는 그런 헐렁한 사람. 여자의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6개월 이상 하지 않았다.
"살림만 하는 당신은 몰라. 일을 한다는 건 알고 보면 죄다 도둑질이라네."
일을 그만둘 때마다 아버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굴ㄹ은 멍쩡한데 사람이 왜 그럴까. 여자의 어머니는 늘 투덜거렸다. 바늘과 실을 붙여 둬야 할 거나. 여자의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고, 여자는 그런 푸념을 듣고 자랐다. 어머니의 푸념이 쌓일수록 빚도 따라 쌓여 갔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아버지의 일자리가 겨우 잡혀도 아버지는 반년만 일했다.
"반년ㄱ간 도둑질을 했으면 반년은 쉬어야지. 몽땅 빼먹을 수는 없잖은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는 아버지가 던져 준 헐렁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피라도 모조리 빼서 다른 누군가의 피로 바꾸고 싶었다. 여자가 연기에 빠진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 무렵부터 여자는 어떤 끈이든 단단하게 조이는 버릇이 생겼다. 풀려 있거나 느슨해진 끈만 보면 ?꽉 조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신발 끈을 너무 죄어 학창 시절 여자의 발등은 늘 부어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꽉 묶는다고 해서 여자의 마음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헐렁하기만 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자가 결혼하고 남편의 넥타이를 조여 주거나 구두끈을 묶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처음으로 헐렁한 삶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은 아기가 태어난 뒤였다. 여자에게 출산의 고통을 처음으로 잊게 해 준 것은 젖을 물리는 것도 아니었고, 아기의 자그마한 손가락을 마냥 보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를 짓누르고 있었던 헐렁한 삶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은 바로 속싸개로 아기를 친친 동여매었을 때였다. 배냇저고리를 곡 조여 주고 속싸개로 단단하게 아기를 감쌌을 때 여자는 그제야 온전한 자기 소유를 느꼈고, 그 소유를 통해 헐렁한 삶이 사라지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7-128)
여자는 알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인형이 그 뒤로 어디로 사라졌는지. 사라진 인형의 행방만큼이나 더 알 수 없는 것은 시간이었다. 일식처럼, 여자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나머지 시간들은 가려졌거나 잡아먹혀 있었다. 달에 먹혀 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분명 많이 있을 텐데도 어째서 일식처럼 기억등리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지 49일이 지난 날, 여자는 제사 음식을 만들다가 문득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음식을 만들어 주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옷이 헐렁하다고 말하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계란을 풀다가 그제야 여자는 연극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고, 엎드려 흐느꼈다. (p.131)
매년, 몇십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일식처럼, 하루하루는 잊혀 갔다. (p.150)
<작품 이해>
<하루>는 일상의 연속성이 우연처럼 부서져 절망과 불안에 싸인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의 잔상을 보여 준다. 주인공의 하루는 의도하지 않은 일들로 점철된다. 그녀는 열병을 앓는 아이 때문에 병원에 다녀오다 교통 체증을 겪는다. 은행 마감이 되어서야 도착하였고, 주차장이 만차여서 골목에 주차를 하였으며, 아이를 차 안에 두고 내렸는데, 견인 차량 고지서가 없어진다. 이 모든 일이 뜻하지 않게 연속해서 일어났다. 이처럼 그녀의 자동차가 견인되었듯 그녀의 하루가 견인된 듯 사라진다.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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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1969- )
대한민국 소설가.
박성원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94년 문학과 사회에 단편 "유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영남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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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박성원 (문학과지성사)
나를 훔쳐라 - 박성원 (문학과지성사)
얼룩 - 박성원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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