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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새로 들어온 야학생 - 송영 (삼성출판사)

by handaikhan 2023. 5. 23.

문학의 탐정 한국문학 19

 

목차


이원수 

눈뜨는 시절
바닷가의 소년들
달나라 급행


송영 

쫓겨 가신 선생님
새로 들어온 야학생
옷자락은 깃발같이


최청곡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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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 새로 들어온 야학생

 

아버지는 환갑까지 지내신 노인이십니다. 머리는 허옇게 세시었으나, 아직까지 허리도 구부러지지도 않으시고, 게다가 다리와 팔은 젊은 아저씨보담 못지않게 굵은 힘줄이 서시었습니다.

그도 그러실 것이빈다. 아주 까마아득한 젊은 시절부터 삼십 년 동안이나 공장의 배달부 노릇을 하시느라고 줄창 수레만 끄시고 다니셨으니까요.

집안 식구로는 아버지보담도 훨씬 나이를 덜 잡수시었지만, 늙기는 몇 곱 더 늙어 보이시는 어머님 한 분과 또 올해에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되는 만득이와 모두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쉰이 넘어서야 겨우 낳으신 아들이기 때문에 이름을 만득이라고 지었습니다.

비록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들 부모들은 만득이만은 남의 열 아들 부럽지 않게 금지옥엽같이 귀여워하고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잘 키워서 공부도 많이 시키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그들 부모들의 바람이요, 기쁨이었습니다. (p.106-107)

 

<작품 이해>

1. 만득이 아버지는 환갑이 넘은 노인이십니다. 아버지는 한 공장에서 아주 오랫동안 배달부 일을 하셨지요. 일반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일을 한 사람이 공장의 감독직을 맡았기 때문에, 아버지나 다른 일꾼들은 당연히 아버지가 공장의 감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사장은 아버지를 공장에서 그만두게 했습니다. 회사의 법이 바뀌어서 예순 살이 넘은 사람은 회사에서 내보내기로 했다는 것이 이유였지요. 아버지는 당연히 감독이 될 줄 알고 신이 나서 출근했던 만큼 실망도 무척 크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장 어떻게 살아갈지, 또 만득이를 중학교에 어떻게 보낼지 걱정했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다음 날부터 보통 때와 같이 출근을 하셨습니다. 한 달 넘게 감독 옷차림을 하시고서 출퇴근을 하셨지요. 아버지가 이처럼 가족을 속이고 출퇴근하신 것은 가족에게 부끄러워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자신이나 집안 살림 걱정을 할 것 같아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아버지는 특히 만득이가 중학교에 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것처럼 행동하신 것입니다.

 

2. 만득이는 한강 철교 근처에서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동안 자신과 어머니를 속이고 공사장으로 출퇴근하셨다는 것을 알았지요. 만득이는 너무 놀라고 슬펐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저녁도 먹지 않고 누워 있었지요.

아버지가 공장의 감독 행세를 하시며 돌아오셨을 때, 만득이는 자신이 본 것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만득이도 울고, 늙으신 부모님도 우셨지요. 만득이는 중학교에 가지 않을 테니, 아버지도 힘든 일을 그만두시라고 했습니다.

결국 만득이는 중학교 가는 걸 포기하고 야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회사에서 쫓겨나시면서 어렵던 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중학교에 입학할 돈이 없어 그렇게 된 것이지요. 

만득이는 비록 가난해서 중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야학생이 된 것입니다. 낮에는 회사에서 심부름을 해 주고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태고, 밤에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는 것이지요. (p.1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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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宋影 1903년 5월 24일 ~ 1977년 1월 3일)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소설가이며 극장가.

본명은 송무현(宋武鉉)이지만 송영(宋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명으로 송동량(宋東兩), 은구산(殷龜山), 수양산인(首陽山人), 관악산인(冠岳山人), 앵봉산인(鶯峯山人)을 썼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산천실(山川實)이다.
1903년 5월 24일 서울 서대문 오궁골에서 태어났다.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1919년 중퇴하였다. 희곡, 소설, 아동문학, 수필, 비평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는데 문학 활동하게 된 것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동경)에서 유리공장 노동자로 6개월 정도 일하면서 재일조선노총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한 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의 구성원으로서 극단 ‘염군’을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기관지 『염군』에 소설 「남남대전」과 희곡 「백양화」를 발표하였다. 1925년 7월 『개벽』 현상공모에 소설 「늘어가는 무리」로 공식 등단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맹원으로 가담하여 이후 카프의 대표적인 극작가·소설가로 활동하면서 평양고무직공 파업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7년 카프 조직개편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카프 위원이 된 후 직속극단에서 대본을 집필하면서 1929년 『조선문예』의 인쇄를 책임졌다. 1934년 7월 전주사건(신건설사)으로 검거되어 수감생활을 하였다.
1935년 12월 17일 출소한 후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1937년 극장에서 대본을 집필하는 극작가로 활동하였다. 동양극장에 수십 편의 멜로드라마, 사극의 대본을 제공하였다. 같은 해 박영호 등과 함께 극단 중앙무대를 결성하여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기영의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각색해서 공연하려다가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상연이 취소되었다.
송영의 초기 소설과 희곡은 식민지 생산직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용광로」(1926)·「석공조합대표」(1927), 희곡 「정의와 칸바스」(1929)·「호신술」(1932)이 있다.
1942년 2월 미국과 서양 기독교를 규탄하는 「삼대」를 상연하는 데 힘을 더했다. 1942년 7월 일제의 관변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5년 1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으로 「신사임당」과 「달밤에 걷던 산길」을 출품하였다.

해방 후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해방 후 첫 작품은 봉건 사회에 기초한 친일파의 몰락을 풍자한 희곡 「황혼」이었다. 1946년 조선문학동맹 결성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상무위원,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희곡 「자매」, 「나란히 선 두 집」과 봉건 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풍자극 「금산군수」를 썼다. 한국전쟁 때는 작가로 참전하여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 역사극 「강화도」 등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내각 문화성 부상,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가극대본 「밀림아 이야기하라」, 희곡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밀림아 이야기하라」는 1970년대 이후 집체작으로 재편되어 북한은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 올려졌다. 송영은 월북 이후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9년에 북한에서 문인 최초로 ‘인민상’을 받았고, 1977년 1월 3일 사망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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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용궁 - 송영 (우리교육)

송영 소설전집 (현대문학)

석공조합대표 - 송영 (창비)

송영 단편집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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