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세계문학 85
목차
아베 일족
무희
기러기
다카세부네
해설 | 모리 오가이와 근대적 자아
모리 오가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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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 무희 (1890년)
석탄은 이미 선적이 끝났다. 이등선실의 테이블 주위는 너무 조용해서 화려해 보이는 백열전등의 빛도 부질없이 밝게 느껴진다. 밤마다 이곳으로 모여들곤 하던 트럼프꾼들도 오늘 저녁은 호텔에 머물러 있어서 배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5년 전 일이다. 평소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져 독일 유학의 관명을 받고 여기 사이공 항구에 왔을 당시에는 눈으로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어서, 붓 가는 대로 쓴 기행문에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것들을 쏟아냈던가! 신문에도 실려서 세간의 사랑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유치한 사상, 분수도 모르고 내뱉은 말들, 그저 평범한 동식물이나 금석, 게다가 풍속 따위마저 진기한 듯이 적었던 것을 지각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번에 길을 나섰을 때 일기를 쓰려고 산 노트도 아직 백지로 남아 있는 것은,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일종의 '닐 아드미라리'한 기상을 체득 한 탓일까? 아니다. 여기에는 따로 까닭이 있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서구 유럽으로 배를 타고 건너갔던 이전의 내가 아니다. 학문이야 여전히 흡족하지 못한 점이 많으나 덧없는 세상의 괴로움도 알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이, 나와 내 마음조차 변하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의 옳음이 오늘의 그름이 되는, 순간순간 변하는 나의 감각을 글로 써서 누구에게 보인단 말인가! 이것이 일기를 쓸 수 없는 이유일까? 아니다. 여기에는 따로 ㄲ닭이 있다.
아아! 이탈리아 브린디시 항구를 출발하여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보통이라면 처음 보는 승객들과도 교분을 맺어 여정의 무료함을 서로 달래는 것이 항해 여행의 관습일 텐데, 사소한 병을 핑계 삼아 선실 안에만 틀어박혀 동행한 사람들과도 말을 섞는 일이 적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슴에 맺힌 한이 있어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은 처음에는 한 조각 구름처럼 내 마음을 스쳐,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탈리아의 유적에도 마음이 머무르지 못하더니, 나중에는 세상이 싫어지고 스스로를 비관하게 만들어, 날마다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어지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했다. 지금은 마음 깊은 곳에 응어리져 한 점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지만, 글을 읽을 때에도 무언가를 볼 때에도,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나 목소리에 응답하는 울림처럼 한없는 회고의 정을 불러 일으켜 수없이 내 마음을 괴롭힌다. 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만약 다른 한이었더라면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 기분이 상쾌해질 수도 있으련만,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깊게 내 마음속에 새겨져 어쩔 수 없다. 오늘 저녁은 주위에 사람도 없고, 선실 웨이터가 와서 전등 스위치를 비틀어 끌 때까지 아직 시간도 있으므로 이제 그 대강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겠다. (p.63-65)
이렇게 3년 정도는 꿈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감추려 해도 감추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취향이다. 나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남들이 신동이라고 칭찬하는 기쁨에 게으름을 피우는 일 없이 공부할 때부터, 관장이 좋은 일꾼을 얻었다고 격려해주는 즐거움에 해이해지는 일 없이 일하던 그때까지, 자신이 단지 수동적, 기계적인 인물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 25세, 이미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자유로운 대학 분위기에 젖어서일까? 나는 마음이 왠지 평온하지 않고,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진정한 내가 점점 표면에 나타나 내가 아닌 어제까지의 나를 나무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오늘날 세상에서 활약하는 정치가가 되기에도 어울리지 않고, 또한 법전을 잘 암기해서 재판의 판결을 내리는 법률가가 되기에도 어울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만히 생각하지, 어머니는 나를 살아 있는 사전으로 만들려고 했고, 관장은 나를 살아 있는 법률로 만들려 했다. 사전이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법률이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전에는 사소한 문제에도 매우 정중하게 일본의 관청에 답신을 하던 나였지만, 그 무렵부터는 관장에게 보내는 서면에 자주 법률의 세세한 조목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논하면서, 일단 법의 정신만 살리면 사소한 문제는 대나무를 쪼개듯 명료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을 했다. 또 대학에서는 법과 강의를 뒤로 미루고 역사나 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점점 그 재미를 알게 되었다.
관장은 처음부터 나늘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기게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독자적인 사상을 지니고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한 나 같은 사람을 어찌 달갑게 여기겠는가!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은 지금 생각하면 위태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내 지위를 뒤엎을 수는 없었다. 평소 나는 베를린 유학생들 중에 세력 있는 어느 한 무리와 좋지 않은 관계였는데, 그들은 나를 시기하더니 마침내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거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함께 맥주도 마시지 않고 당구대도 잡지 않는 것을 융통성 없는 마음과 강한 자제력으로 돌려, 한편으로는 비웃고 또 한편으로는 질투했다. 그렇지만 그건 나라는 인간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나 나라는 인간을 나 자신조차 몰랐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은 자귀나무 잎과 비슷해서 뭔가 닿으면 움츠러지고 피하려고 한다. 내 마음은 겁 많은 처녀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가르침을 지키고 학문의 길로 들어섰던 것도, 관리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도 모두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참고 견디고 공부한 덕으로 보이지만 그게 아니다. 모두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조차 속이면서, 남이 시키는 대로 단지 한길로 걸어온 것뿐이다. 다른 곳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건 그런 곳에 마음을 두지 않을 굥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다른 길이 두려워서 스스로 손발을 묶어놓았을 뿐이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나는 재능 있는 인물임을 의심치 않았고 또 내 마음이 잘 견뎌내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아아, 그것도 잠시뿐. 배가 요코하마 항구를 떠날 때까지 매우 장하고 훌륭한 호걸이라고 생각했던 자신, 일단 항구를 벗어나자 눈물을 참지 못해 손수건을 적시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야말로 내 본성이었다. 그런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어머니 손에 키워지면서 더 커졌을 것이다.
그들이 비웃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시기하는 건 어리석지 않은가? 이 약하고 가련한 마음을! (p.67-69)
식탁에서 그는 많이 묻고 나는 많이 대답했다. 그의 인생행로는 대체로 평탄했는데, 내 처지는 기구했다.
내가 마음을 터놓고 지금가지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이야기하자, 그는 여러 번 놀랐지만 좀처럼 나를 책망하려 들지는 않고 도리어 용렬한 유학생 선배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정색을 하고 충고했다. 이러한 일은 원래 천성이 약해서 생긴 것이니 새삼스레 말해야 소용없다. 학식이 있고 재능을 갖춘 사람이 언제까지 한 소녀의 정에 얽매여 목적 없는 생활을 할 것인가? 지금은 아마카타 백작도 독일어 실력을 이용하려는 마음뿐이다. 백작이 당시의 면직 이유를 알고 있는 터에 자신도 구태여 그 선입견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 백작이 마음속으로 옳지 않은 일을 감싼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친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자신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추천할 때는 우선 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다. 능력을 보이고 신용을 얻는 거이다. 또 그 소녀와의 관계는 설령 그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관계가 깊어졌더라도 상대의 인물이나 재능을 알고 하는 사랑이 아니다. 유학 생활에서 오는 일종의 타성적인 교제다. 그러니 결심하고 교제를 끊어라. 이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바다에서 키를 잃은 뱃사공이 아득히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이 말이 아이자와가 나에게 제시한 앞날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산은 너무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잇어 언제 다다를지도, 아니 과연 다다른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만족을 줄지 어떨지도 분명하지 않다. 가난 속에서도 즐거운 것이 지금의 생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엘리스의 사랑, 내 약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릴 방법이 없었지만, 소중히 지켜야 할 관계를 잃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당분간은 아이자와의 충고에 따라 엘리스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했다. 나에게 적으로 간주되는 자였다면 저항했겠지만, 친구에게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헤어지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중 유리창을 꼭 닫고 난로에 불을 지피던 호텔 식당을 나선 탓인지, 얇은 오버코트를 통해 스며드는 오후 네시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 피부에 소름이 돋으면서 동시에 나는 마음속에 일종의 한기를 느꼈다. (p.80-82)
한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백작이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내일 러시아로 출발하네. 수행원으로 따라가지 않겠나?" 공무로 바쁜 아이자와를 며칠 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백작의 이 물음은 갑작스러웠고 놀라웠다. "어찌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내 부끄러운 점을 밝힐 수밖에 없다. 이 대답은 재빨리 결단을 내려 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무언가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 대답의 범위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바로 승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승낙한 이후에 어려움을 깨달아도, 억지로 승낙했을 때의 사려 깊지 못함을 숨기고, 참고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p.82)
아나, 나는 이 편지를 보고 비로소 내 처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부끄러운 것은 둔한 나의 마음이었다. 나는 내 한 몸의 처신에 대해서도, 또 나 자신과 관계없는 타인의 일에 대해서도 결단력이 있다고 긍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결단력은 순조로운 경우에만 통하고 역경일 경우에는 통하지 않았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비추려고 할 때는 믿어왔던 마음속 거울은 흐려지고 만다. (p.85)
아아,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나의 본성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며 다시는 기계적인 인물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다리는 여전히 묶인 채 잠시 날개를 퍼덕이며 자유를 얻었다고 뽐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리의 실은 그렇게 간단히 풀 수 없다. 예전에 이 실을 조종한 건 모 부처의 관장이었지만, 불쌍하게도 지금은 다시 아마카타 백작의 수중에 있다. (p.85-86)
이삼일 동안은 대신도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하리라는 생각에 찾아가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무렵 사람이 와서 백작이 나를 부른다는 말을 전했다. 가보니 대접이 각별히 융숭했다. 대신은 러시아 여행에서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나와 같이 일본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는가? 자네 학식에 관해서는 내가 짐작할 수 없지만, 어휘력만으로도 세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이곳에서의 체류가 너무 길어져 여러 가지 복잡한 인간관계도 있을 것 같아 아이자와에게 물어보니 그런 일은 없다고 해서 안심했네"라고 말씀하셨다. 그 모습에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말하려고 생각했지만 굳이 아이자와의 말을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고,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고국도 잃고 명예를 다시 회복할 수도 없이 광활한 유럽 대도시의 인파 속에 내 몸이 파묻히고 말리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아아! 이 무슨 지조 없는 마음이란 말인가!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해버렸으니.
철면피 같은 뻔뻔한 얼굴을 하고 돌아가 엘리스에게 뭐라고 말해야할지! 호텔을 나왔을 때의 미칠 것 같은 내 마음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었다. 나는 동쪽 서쪽도 구별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정신없이 걷다가 몇 번이나 지나가는 마차에 방해가 되어 마부에게 욕을 먹고 놀라서 비켜섰다. 얼마 동안 그렇게 걷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티어가르텐 삼림공원 옆이었다. 쓰러지듯 길가의 벤치에 걸터앉아 타는 듯이 뜨겁고 망치에라도 얻어맞은 듯 울리는 머리를 벤치에 기대고는 죽은 사람처럼 몇 시간을 보냈을까! 극심한 한기가 뼈에 사무쳐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벌써 밤이었다. 눈은 끊임없이 내려 모자의 챙과 외투 어깨에 한 치가량이나 쌓여 있었다.
이미 열한시가 넘었을 것이다. 모아비트 카를 거리를 오가는, 철도 마차가 달리는 철로도 눈에 파묻혀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의 가스등만이 쓸쓸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발이 얼어 양손으로 문지른 후에야 겨우 걸을 수 잇을 정도가 되었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클로스터가에 도착했을 때는 열두 시를 지난 시각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1월 초순의 밤인지라 운터 덴 린덴의 술집과 찻집은 여전히 사람의 출입이 잦아서 북적거렸을 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그저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만 가득차 있었다. (p.87-88)
내 병은 완전히 나았다. 산송장 같은 엘리스를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 몇 번이었던가! 대신을 따라 귀국길에 올랐을 때 나는 아이자와와 의논해서 엘리스의 어머니에게 겨우 생계를 유지할 만한 돈을 건네면서, 가련한 광녀의 뱃속 아기가 태어날 때의 일까지도 부탁해두었다.
아아, 아이자와 겐키치 같은 좋은 친구는 세상에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 한 점, 그를 원망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p.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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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줄거리 - 이정희 (위덕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무희(舞姫)』의 줄거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희(舞姫)』는 집안이 좋고 장래가 촉망되는 독일 유학생 오타 토요타로와 가난한 춤추는 소녀 엘리스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오타 토요타로는 도쿄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의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다. 장래의 출세가 보장된 오타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근대화 산업화된 유럽의 발달된 모습을 보고 놀라고, 더욱이 자아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자기의 의지와 생각이 없었던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느날 오타는 산책을 하다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울고 있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다가가 그녀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된다.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타 토요타로는 차고 있던 시계를 주면서는 전당포에 맡기면 돈을 줄거니까 그 돈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한다. 엘리는 워낙 사정이 안 좋아서 염치를 무릅쓰고 토요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후로 토요타로는 엘리스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동거에 들어갔다.
당시 국비유학생으로 외국에 나간 젊은이들은 외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무조건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외국생활에 있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게 된다.
오타 토요타로는 엘리스와 사랑에 빠져 학업을 등한시 한다는 소문이 퍼져, 본국인 일본으로부터의 장학금이 끊어지게 되었다. 토요타로는 일본신문에는 독일의 일본 유학생이 쓴 독일문화 소개를, 독일신문에는 어느 일본인이 본 일본문화 소개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엘리스와의 사랑에 행복해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유럽 산업시찰로 온 대신을 수행해온 친구로부터 일본을 위해 일 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 토요타로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다. 토요타로는 엘리스와의 사랑과 출세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엘리스 곁을 떠나고 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리스가 미쳐버리고 마는 데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작가 모리 오가이는 자신의 유학 시절의 경험을 『무희(舞姫)』 속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의 경험을 그린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사랑이냐 출세냐 하는 기로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아마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인 것 같다.
작품해설 - 권태민 (한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1890년 1월에 발표된 <무히>는 <우타카타노기>, <후미즈카이>와 함께 오가이의 '독일 삼부작'으로 꼽힌다. 유학 당시의 베를린을 무대로 한 이 작품에는 주인공 오타 도요타로가 자아에 눈끄는 과정과 좌절이 그려져 있고, 그것은 오가이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타가 홀어머니 손에 길러졌다는 구성도 오가이가 소년 시절 주로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점과 유사하다. 입신출세를 지향하는 메이지 시대의 관료소서 독일에 유학해 독일 여성과 연애를 하는 장면에서는 작가 오가이의 분신으로까지 느껴진다.
가문을 위해, 입신출세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오타의 내면은 '개인을 위한 자아'라기보다 '가문과 공명심을 위한 자아'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가문을 위해, 어머니 혹은 친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문을 배우고 국가의 관료가 되었던 것이다. 오타는 서구의 자유를 접하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은 관장의 기계적인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생의 욕구가 된다. 오가이 역시 어머니의 지지하에 가문과 이름을 빛내기 위해 학문을 했다. 그러던 중 독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접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기존의 가치관, 즉 어린 시절부터 배양되었던 '출세 지향적인 자아', '기존의 자아'에서 벗어나 서구의 '근대적 자아'에 대한 자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오가이가 독일 유학을 통해 얻은 것은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이었다. 청년 오가이에게 도시코와의 결혼은 사랑이 없는 문벌과의 결혼이며, 엘리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는 1891년 4월 <위생료병지>에 게재한 <대학의 자유를 논함>에서 독일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학문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오타가 경험한 학문, 사상, 예술, 그리고 대학의 자유는 작가 오가이의 체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오가이는 전공인 의학뿐만 아니라 문학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일본 최초의 문예평론 잡지인 <시가라 미조시>를 창간하면서 전투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날카로운 평론을 펼쳤다. 그는 작품을 직접적으로 비평하기보다는 비평을 위한 비평을 함으로써 문예이론의 계몽에 노력하고,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의 무의식 철학을 기반으로, 예술에서의 미의식을 강조하고자 했다. 쓰보우치 쇼요와 벌인 몰이상 논쟁은 쇼요의 실증적인 문학론에 대해 그의 이러한 미적 이념을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가이는 이후 청일전쟁 종군, 규슈 고쿠라로 전근, 전처 도시코의 죽음, 아라키 히로오미의 장녀 시게와 재혼, 다시 러일전쟁 종군 등 다양한 체험을 했다. 그리고 1906년 러일전쟁의 종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와 다음해 11월 45세의 나이로 육균 군의관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군의총감에 취임한다. (p.21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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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森 鷗外, 1862년 2월 17일 ~ 1922년 7월 9일)
일본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소설가·번역가·극작가다.
본명은 모리 린타로(森林太?)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기 지식인이자 근대 문학의 선각자다. 오가이(鷗外)는 도쿄대학(東京大學) 의학부 출신의 군의관으로 독일 유학(1884∼1888)을 가서 위생학 연구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을 두루 섭렵했다. 1894년 가을, 1개월간 군의관으로 조선 부산에 체재하면서 남긴 일기 등도 있다. 동서양에 걸친 넓은 시야의 소유자로서, 동서양의 학문과 문학 일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 삼아 일본 근대 문학 초창기에 평론과 번역으로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소설가·시인·학자로서도 여러 업적을 남겨 근대 문학 성숙기의 일본 문단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 쌍벽을 이루는 작가다.
오가이의 대표작은 일본 근대 최초의 번역 시집 『그림자(於母影, 오모카게)』(1889)와 서양 문학 번역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1892), 입센의 『노라(인형의 집)』(1913), 괴테의 『파우스트』(1913)가 있고, 단편 소설 「무희(舞?)」(1890), 「망상(妄想)」(1911), 장편 『청년』(1910), 『기러기(雁)』(1911), 역사 소설 「아베 일족(阿部一族)」(1913), 「산쇼 대부(山椒大夫)」(1915) 「다카세부네(高?舟)」(1916), 역사 인물 전기 『시부에 추사이(?江抽?)』(1916), 그리고 『시로 쓴 일기(うた日記)』(1905)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오가이는 ‘서양에서 돌아온 보수주의자’답게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비슷한 소위 ‘화혼양재(和魂洋才)’로서 동서양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복안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바람직한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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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문예세계문학)
아베일족 - 모리 오가이 (노재명 옮김, 북스토리)
청년 - 모리 오가이 (김용기 옮김, 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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