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집착의 광기는 사랑이 아니다. 오로지 악일 뿐이다!
<에밀리 브론테 - 폭풍의 언덕 (1847년)>
1801년, 집주인을 만나보고 돌아왔다. 나를 귀찮게 할 외톨이 이웃.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다. 온 나라를 통틀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이처럼 완벽하게 벗어난 장소에 자리를 잡은 것이 정말이지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세상을 싫어하는 이에겐 완벽한 장소였다. 히스클리프 씨와 나는 서로 그 적막감을 나누기에 딱 알맞은 한 짝이다. 그러니 내겐 중요한 이웃이었다! 내가 말을 타고 다가가자 그의 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주춤하고, 또 내 소개를 하자 조끼 주머니 속 그의 손가락이 경계하듯 움츠러들었다. 그는 내 따뜻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p.7)
<워더링 하이츠>는 히스클리프 씨의 집 이름이다. '워더링'은 흔하게 쓰이는 이 지역 사투리인데 집의 위치로 보아 폭풍이 휘몰아치는 날씨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어수선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그곳에는 상쾌한 바람이 언제나 불어댔다. 그 능선 너머 불어오는 북풍의 힘은, 집 끝 쪽으로 한참이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전나무 몇 그루와, 마치 태양의 자비를 구하는 것처럼 한쪽으로 가지를 모두 뻗고 있는 앙상한 가시나무로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건축가는 앞을 내다보고 집을 튼튼하게 지었다. 좁은 창문은 벽 깊숙이 박혀 있고, 집 모퉁이는 툭 튀어나온 돌이 보호해 주고 있었다.
문턱을 넘어가기 전에 나는 잠깐 멈추어서 집 앞, 특히 현관에 기이하게 조각된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 위쪽, 그리핀과 아직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부서진 조각 그림 사이에서, 나는 '1500'이라는 연도와 '헤어튼 언쇼'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몇 마디 나누면서 그 쌀쌀맞은 주인에게 그 집의 내력을 잠깐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간에서의 그의 태도는 얼른 들어오든지 아니면 아예 가버리라는 눈치였다. 나는 집 안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그의 인내심을 괴롭힐 욕심은 없었다. (p.9-11)
<참고>
그리핀(griffin, griffon, gryphon, γρυψ)
사자의 몸통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와 앞발을 가진 전설의 동물이다. 그리폰, 그리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핀은 라틴어 이름으로는 그리피오스(Gryphios)라고 불리며 그 유래는 구부러진 부리라는 뜻의 말 Gryps에서 왔다. 모습은 일반적으로 매의 머리와 날개를 가지며 몸통은 사자인데 앞발은 매의 것이다. 또한 그 외에도 꼬리가 뱀과 같거나 매가 아닌 독수리의 머리라고 하는 설, 또는 사자의 몸통이 아니라 소라는 설도 있고 표범과 같은 반점이 있다고도 일컬어진다. 아시아에 전해지는 그리핀은 머리에 볏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에서는 그것이 갈기이고 말의 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핀의 몸 색깔은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목의 털은 푸른색이고 눈은 붉은색이라고 하며, 아일라누스에 따르면 가슴이 붉은색이고 털은 하얗다고 한다.
그리핀은 사막이나 산간 동굴에 살며 금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금광이 있는 장소에 자주 나타난다. 또한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쿠스)가 기르고 있던 생물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에, 술을 지키는 괴물이며 양조장 등의 파수꾼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핀의 기원은 인도이며, 그 모습은 기원전 17∼18세기 무렵의 직조물에서 발견된다. 인도를 거쳐서 소아시아로 전해진 것이 기원전 15∼16세기로, 그 무렵의 유물 속에 있는 인장에서 모습을 찾을 수가 있다. 기원전 14세기에는 그리스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리핀을 처음 글로 나타낸 사람은 그리스의 시인 아리스테아스였으며 그는 자신의 시에서 그리핀과 싸운 아리마스포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리스인들은 그리핀을 아폴론의 성스러운 동물로 여겼는데 바빌로니아의 창세기에는 티아마트의 열한 마리의 환상 속 동물로 알려졌고, 이집트에서는 스핑크스의 한 종류인 히에라코스핑크스라는, 매의 머리와 사자의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가 존재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을 지키는 존재로 지혜의 천사 케루빔(케룹)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케루빔은 몸의 반이 사자가 아니라 소의 모습이었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상의 낙원에서 본 신비한 행렬의 선두 마차를 끄는 생물이 네 마리의 그리핀이었다고 씌어져 있다. 이는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를 상징하는 생물로 해석되었는데, 나중에는 그리핀을 사탄이 만든 괴물이라 하여 사탄의 부하로 여기기도 했다.
신곡 - 단테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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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나 가구는, 무플 아래까지 내려오는 반바지를 입고 각반을 찬, 고집 센 얼굴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소박한 북부지역의 농부의 것으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둥근 탁자를 앞에 두고, 탁자 위에 거품이 이는 잔을 올려놓은 채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그런 모양의 농부들은 저녁 식수 후에 시간을 맞추어 찾아가 보면, 근처 언덕에 걸쳐 어디서라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 씨는 집과 생활방식에 있어 보기 드물게 대조를 이루었다. 외모는 거뭇한 피부에 방랑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입은 옷과 몸가짐은 신사였다. 그러니까, 시골의 유지 같은 신사 말이다. 조금 단정치 못하긴 한데, 그래도 등이 곧고 잘 생긴 외모이기에 그의 단정치 못함이 바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다소 성미가 까다로워 보였다. 천한 것에 대한 자존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나는 그의 쌀쌀맞음이 감정을 요란하게 드러내 보이며 서로간의 친절을 과시하는 것을 싫어해서 생긴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사랑도 증오도 모두 똑같이 숨겨두고,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도 일종의 무례함으로 생각할 사람이었다. 아니, 나는 속단하고 있다. 내 성격이 그러니 남도 그런 줄 알고 있다. 히스클리프 씨가 앞으로 서로 알고 지내게 될 사람을 만났을 때, 그렇게 뒤로 물러서는 데는 무너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성미가 별나다고 생각하자. 내 어머니는 내가 편안한 가정을 결코 꾸릴 수 없으리라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리고 지난 여름, 내 스스로 정말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바닷가의 화창한 맑은 날씨 속에서 한 달을 보내면서 나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여인이 여신과 같았다. 그녀가 내 마음속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까지는 말이다. 나는 입 밖으로 내 사랑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표정도 말을 할 줄 안다면, 아무리 미천한 바보라도 내 마음과 귀가 멎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내 마음을 알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했던가?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내 자신, 달팽이처럼 싸늘하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시선을 느낄 때마다 나는 점점 차가워지고 멀어졌다. 마침내 그 불쌍한 여인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고, 자신이 잘못 알았다는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자신의 어머니를 설득해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런 괴팍한 이상한 성격 때문에 나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평판인지 그건 나만이 안다. (p.12-13)
"차 끓이는 거야?"
낡아빠진 코트를 입은 젊은이가 포악한 시선을 내게서 거둬들이고 젊은 여인을 향해 물었다.
"저 사람도 차 마셔요?"
그녀가 히스클리프 씨에게 물었다.
"차나 끓여, 알겠어?"
이게 대답이었다. 하도 사납게 내뱉어서 나는 흠칫 놀랐다. 그 말투에는 고약한 성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히스클리프 씨를 중요한 이웃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차가 준비되자 그가 내게 권했다.
"자, 의자를 앞으로 당기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상스러운 젊은이까지 포함해서,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내내 이상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내가 만약 이 먹구름을 일으켰다면, 그것을 거두는 것도 내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그렇게 입을 꽉 다물고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어쨌거나, 사람들의 성미가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이렇게 매일같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상하죠?"
차를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을 받는 틈에 내가 말을 꺼냈다.
"습관이 우리의 기호나 취향을 만들어 가는 게 말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고립된 곳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히스클리프 씨, 감히 말씀드리는데 가족에 둘러싸여, 그리고 가정과 마음을 보살피는 사랑스러운 당신의 여인과..."
"내 사랑스런 여인?"
그가 얼굴 가득 악마 같은 조소를 머금고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 여자 어디 있소? 내 사랑스런 여인?"
"히스클리프 부인, 당신 아내 말입니다."
"아, 그렇군, 그래. 아내의 몸은 갔어도, 그녀의 영혼이 구원의 천사 자리를 차지하고 워더링 하이츠의 복을 빌어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군. 맞소?"
그제서야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했다. 남편과 아내가 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한 사람은 사십 대였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은 어린 여자들과의 결혼이라는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 꿈은 노후의 위안으로 남겨둔다. 다른 쪽은 열일곱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내 옆의 시골뜨기, 그러니까 물그릇으로 차를 마시고, 손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이가 여자의 남편이였군. 물론 히스클리프 씨의 아들이고 말이야. 계속해서 생매장당하는 꼴이군. 더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저런 촌뜨기한테 시집을 간 거야! 불쌍하기도 하지. 나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마지막 생각에 자만심에 빠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내 옆에 앉은 젊은이는 내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생각에, 경험상 나는 꽤 매력이 있었다.
"이 여자는 내 며느리요."
히스클리프 씨가 내 짐작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영혼을 표현하는 언어는 증오였다.
"아, 이제 분명히 알겠습니다. 당신이 인정 많은 천사의 남편이시군요."
나는 옆쪽의 남자를 둘러보며 말했다.
상황이 전보다 더 나빠졌다. 젊은이는 점점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나를 한 대 올려붙일 것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더니 곧 나를 향해 숨 막힐 것 같은 욕을 퍼부어댔다. 어쨌거나 나는 모른 체했다.
"추측이 영 엉망이군, 록우드 씨!"
히스클리프 씨가 말했다.
"우리들 중 아무도 당신이 말하는 선한 천사가 될 권리는 없고. 이 여자의 남편은 죽었소. 내 며느리라는 말은 했던가? 그러니까 내 아들과 결혼했던 건 틀림없지."
"그럼 이 젊은이는?"
"분명, 내 아들은 아니오."
저 거친 젊은이의 아버지로 자신을 지목한 것이 지나친 농담이라도 되는 듯 히스클리프 씨가 다시 웃었다.
"내 이름은 헤어튼 언쇼요. 제대로 대접하는 게 좋을 거요."
젊은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자신을 밝히는 꼴에 속으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기거나, 아니면 내 속내가 터져 나올까 두려웠다. 이 웃기는 가족이라는 틀 속에 내가 실수로 잘못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음침한 분위기가 점점 불편해져 나를 둘러싸고 있는 육체적 안락함마저 점점 시들어졌다. 이 집에 세 번째 오려면 신중하고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24-27)
나는 모자도 잃어버린 채 분노에 온몸을 떨면서, 일 분만 나를 더 이렇게 두었다가는 가만있지 않겠다며, 악당들에게 가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거기에 말도 되지 않는 복수에 대한 협박으로 리어왕의 뺨을 칠만큼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p.3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리어왕 - 셰익스피어 (권오숙 옮김, 서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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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보이지 않는 페이지를 보다가 그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내 눈동자는 펜으로 쓴 글씨와 활자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러다가 붉은색으로 장식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일흔 번씩 일곱 번, 그리고 일흔한 번째의 첫 번째(마태복음 18장), 기머든 슬러 교회의 제이브스 브랜드럼 목사 설교.'
비몽사몽간에 나는 머릿속으로 제이브스 브랜드럼 목사가 그 제목으로 어떤 설교를 했을까 생각하다가, 그만 침대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p.4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명화로 보는 신약 성경 이야기 - 헨드릭 빌렘 반 룬 (원재훈 옮김, 그린월드)
마태복음 제 18 장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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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변덕스러운 인간인가?
모든 사교적인 접촉을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했던 나는 마침내 교제를 할 수 없는 곳을 찾아낸 행운에 감사했었다. 그러나 몹시도 나약한 나는 저녁 무렵까지 우울과 고독에 싸우다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하여 집안에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척하고, 딘 부인이 저녁을 가지고 왔을 때 식사를 하는 동안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녀는 지독한 수다쟁이라서 내가 기운을 차리든, 아니면 그녀의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든 하기 전까진 수다를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p.58)
"뻐꾸기 같은 인생(남의 둥지에 들어와서 살다가 주인이 된 새의 이야기를 빗대는 말)이죠." (p.62)
"자, 딘 부인. 내 이웃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면 정말 고맙겠군요.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 여기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얘기나 들려주겠소?" (p.62)
<참고>
<폭풍의 언덕>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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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인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캐서린 아가씨 머리 너머, 누더기를 걸친 검은 머리칼의 더러운 아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말도 하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자란 아이였지요. 사실, 얼굴은 캐서린 아가씨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일으켜 세워놓으니,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겁이 났습니다. 주인마님도 문 밖으로 아이를 던져버릴 기세였습니다. 주인마님은 펄펄 뛰었어요. 어떻게 집시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먹여 살려야 할 새끼들이 있는 이때에 말이지요. 이러는 걸 보니 정신에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고도 했습니다.
주인님은 애써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피곤해 죽을 지경이어서 주인마님의 핀잔을 들으며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 아이가 리버풀 거리에서 말도 안 하고 집도 없이 배를 곯고 있는 것을 보고, 부모를 찾아주려고 했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누구 아이인지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지요. 게다가 돈도, 시간도 없었기에 그곳에서 괜히 헛수고하느니 즉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답니다. 그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고 오실 생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주인마님도 불평을 그쳤다는 것입니다. 주인님이 제게 그 아이를 씻겨서 아이들과 함께 잠을 재우라고 했습니다.
힌들리 도련님과 캐서린 아가씨는 잠잠해질 때까지 잠자코 구경만 하다가 마침내 둘 모두 아버지가 약속했던 선물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힌들리 도련님은 열네 살이었는데도 두터운 외투 안에서 산산조각 난 바이올린을 찾아내어 집어 들고는 큰 소리로 엉엉 울었습니다. 캐서린 아가씨는 주인님께서 아이를 챙기느라 채찍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는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 아이에게 침을 뺕었습니다. 덕분에 그 고약한 버릇을 고치려는 아버지한테 매를 벌었지요.
아이들은 한결같이 그 아이와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에서 자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저도 마찬가지로 별로 내키지 않았기에 아이를 층계참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이가 가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우연인지, 아니면 주인님의 목소리에 끌렸는지 아이는 주인님의 방문으로 기어갔습니다. 주인님께서 방을 나오다가 그 아이를 보았죠. 아이가 왜 거기 있냐고 묻기에 저는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일로 소심하고 몰인정하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이렇게 해서 히스클리프 씨가 처음 그 집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랍니다. 며칠 후에 돌와와 보니, 제가 아주 쫓겨난 건 아니었거든요. 사람들이 그 애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아이였을 때 죽은 아들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이후 죽, 이름 겸 성이 되었지요. 캐서린 아가씨와 히스클리프는 이제 꽤 친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힌들리 도련님은 히스클리프를 미워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히스클리프를 괴롭히고 계속 고약하게 굴었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느낄 만큼 아직 철이 안 들었고, 또 주인마님도 우리가 잘못한 것을 보고도 그 애를 위해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으니까요.
히스클리프는 말이 없고 참을성이 강한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학대에 익숙했기 때문이겠지요. 히스클리프는 힌들리 도련님이 때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꼬집어도 히스클리프는 마치 저 혼자 우연히 다친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만 커다랗게 떴을 뿐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참을성이 주인님을 화나게 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애비없는 불쌍한 아이를 못살게 군 것을 알았을 때 말입니다. 주인님은 그 아이를 그렇게 부르곤 했죠. 히스클리파는 말 수가 적고, 대체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이 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인님은 이상하리만큼 히스클리프의 말을 무조건 다 믿었습니다. 그리고 캐서린 아가씨보다도 더 귀여워했습니다. 아가씨는 귀염을 받기에는 지나치게 말썽을 부리고 고집이 세었지요.
그렇게 처음부터 히스클리프는 집안에 불화를 가져왔습니다. 주인마님이 돌아가시자, 히스클리프가 들어온 지 채 2년도 못 되어 돌아가셨지요. 힌들리 도련님은 아버지를 친근하게 여기지 않고 어렵고 두려운 존재로 느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아버지의 애정과 자신의 특권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죠. 도련님은 이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점점 고약해져 갔습니다. (p.65-68)
마님도 새 식구 중에 캐서린 아가씨가 있어서 참 좋아했습니다. 참새들처럼 캐서린 아가씨와 수다를 떨며 서로 부둥켜안고 이리저리 같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선물도 엄청나게 사다 주었지요. 처음에는 말이지요. 쉬 뜨거운 방이 쉬 식더군요. 부운이 투정을 부리면 힌들리 주인님은 폭군이 되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싫다는 마님의 몇 마디가 힌들리 주인님의 어린 시절 히스클리프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죠. 주인님은 히스클리프를 식구에서 하인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공부도 가르치지 않고 농장의 일꾼들처럼 밖에 나가 일을 하라며 힘들게 일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히스클리프가 잘 참아냈습니다. 캐서린 아가씨가 자신이 배운 것을 히스클리프에게 가르쳐주고 밖에서 함께 일도 해주고 놀아주었으니까요. 두 사람 다 야만인처럼 거칠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했죠. 젊은 주인님은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지내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죠. 힌들리 주인님은 일요일에 두 사람이 교회에 가는 것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제프와 목사님이 두 사람이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나무랄 때면, 히스클리프를 채찍으로 때리고 캐서린 아가씨에게는 한 끼 식사를 굶기곤 했습니다. (p.83)
캐서린 아가씨는 드러쉬크로스 그레인지에서 크리스마스까지 5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때까지 발목은 다 나았고, 몸가짐도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 사이 새 마님은 자주 아가씨를 찾아가서 사탕발림으로 아가씨의 자존심을 살리려는 계획에 착수했답니다. 아가씨도 기꺼이 따랐지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천방지축 집 안으로 들어와 숨도 쉬지 못하게 저희한테 달려들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고 비버모피 모자 아래 갈색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우아한 아가씨가 아주 잘생긴 검정말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얌전하게 걸으려 양손으로 긴 옷자락을 들어 올리면서요.
힌들리 주인님이 반갑게 웃으며 아가씨를 말에서 내려주었습니다.
"아니, 캐서린, 아주 예쁘구나! 못 알아보겠어. 이젠 귀부인이 되었구나. 이사벨라 린튼과는 비교도 안 되겠어. 안 그렇소, 프란시스?"
새 마님이 대답했다.
"이사벨라는 원래 예쁜 얼굴은 아니죠. 그래도 아가씨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엘렌, 캐서린 아가씨 옷 벗는 걸 좀 도와드리렴. 가만, 아가씨, 머리가 엉망이 되잖아요. 내가 모자를 풀어줄게요."
저는 아가씨 옷을 벗겨주었습니다. 커다란 격자무늬 치마 아래 하얀 속바지와 번쩍번쩍 빛나는 구두가 보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개들이 아가씨를 보고 반가워 달려왔습니다. 아가씨도 즐거워 눈동자에서 빛이 났습니다. 하지만 멋진 옷을 망칠까 봐 개들을 거의 만지지는 않았습니다.
캐서린 아가씨는 제게 기품 있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드느라 온몸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껴안지는 못했지요. 그러고 나서 아가씨는 주위를 둘러보며 히스클리프를 찾았습니다. 힌들리 주인님 내외분은 두 사람의 만남을 걱정스레 지켜보았지요. 두 사람 사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을까 하면서요.
처음에 히스클리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히스클리프는 남을 신경 쓰지 않고, 남들도 히스클리프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캐서린 아가씨가 안 계실 때는 훨씬 더 심했답니다.
아무도, 아니, 오직 저만 히스클리프를 지저분한 아이라고 다정하게 나무라며 일주일에 한 번은 씻으라고 타일렀지요. 그 또래의 아이들이란 좀체 비누와 물이랑 친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옷은 말할 것도 없고, 히스클리프는 먼지 구덩이에 석 달은 빠져있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덥수룩한 머리는 빗지도 않았고, 얼굴과 손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나 우아하고 고귀한 아가씨가 집으로 들어오니 히스클리프가 의자 뒤로 숨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 자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머리가 엉망진창인 놀이 친구는 온데간데 없었으니까요.
"히스클리프 없어?"
장갑을 벗어, 집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새하얘진 손가락을 멋지게 드러내며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히스클리프, 앞으로 나와도 좋다."
힌들리 주인님이 히스클리프가 쩔쩔매는 것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천한 몸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히스클리프를 보며 고소해했습니다.
"나와서 캐서린 아가씨에게 인사해도 좋다. 다른 하인들처럼."
캐서린 아가씨는 자기 친구가 숨어있는 것을 보더니 달려가 안았습니다. 캐서린 아가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예닐곱 번 정도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뒤로 물러나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골이 나고 시무룩한 거야! 무시무시하니까 우습잖아. 내가 에드가하고 이사벨라한테 익숙해져서 그런가. 자, 히스클리프, 나 잊어버렸어?"
캐서린 아가씨가 그렇게 물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악수해라, 히스클리프."
힌들리 주인님이 생색을 내듯 말했습니다.
"가끔은 악수해도 된다."
"안 할 거야."
히스클리프가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히스클리프가 입을 열었습니다.
"웃음거리가 되는 건 참을 수 없어. 참을 수 없다구!"
히스클리프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캐서린 아가씨가 히스클리프를 잡았습니다.
"널 비웃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히스클리프, 그래도 악수는 하자! 왜 그렇게 뾰로퉁한 거니? 좀 이상해 보여.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면 괜찮을 거야. 어쨌든 좀 더럽다."
캐서린 아가씨는 쥐고 있던 히스클리프의 거무칙칙한 손을 바라보더니 자기 옷을 바라보았습니다. 히스클리프 옷 때문에 자기 옷이 더러워졌나 은근히 걱정이 된 것이었습니다.
"내 몸에 손댈 필요 없어."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아가씨의 시선을 느끼고 손을 빼내면서 말했습니다.
"난 내 맘대로 지저분하게 있을 거야. 난 더러운 게 좋아. 난 원래 더러운 놈이니까."
힌들리 주인님 내외가 웃어대자, 히스클리프는 방을 뛰쳐나갔습니다. 캐서린 아가씨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기에 히스클리프가 그렇게 성질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p.94-98)
"그래 밥도 먹지 않고 오기를 부리며 잠자리에 간 이유가 있었겠지. 자만심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 슬픔을 만든다니까. 네가 성질을 부린 게 창피하면, 아가씨가 돌아오면 먼저 잘못했다고 해. 나가서 아가씨한테 입을 맞추고, 말하라고, 진심으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p.101)
"그치만, 엘렌, 내가 에드가를 스무 번 넘어뜨린다 해도 에드가 보다 내가 더 멋져지지는 않을걸. 나도 에드가처럼 머리카락이 밝고 피부가 깨끗하면 좋겠어. 옷도 잘 입고, 얌전하고, 그리고 에드가처럼 부자가 될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매번 엄마나 찾으면서 울어대고, 시골 촌놈이 주먹을 들기만 해도 벌벌 떨고, 소나기가 온다고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제가 덧붙였지요.
"히스클리프, 너 정말 못났구나! 거울 좀 보자. 내가 네 꿈을 보여줄게. 눈 사이에 있는 선 두 개 보이지? 짙은 눈썹. 둥글게 올라가지 않고 가운데가 가라앉았잖아. 그리고 그 시커먼 악마 같은 한쌍의 눈동자. 깊숙이 파묻고 자신 있게 눈떠본 적도 없잖니. 악마의 첩자처럼 눈꺼풀 아래에 숨어 있어. 보기 싫은 주름 활짝 펴고, 눈은 똑바로 뜨고, 그 악마 같은 눈동자는 자신 있게, 해맑은 천사처럼 해봐. 의심하는 눈초리는 버리고, 그리고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면, 사람들은 늘 친구로 바라보도록 해. 발길에 차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발길질한 사람뿐 아니라 세상까지 미워하는 못 돼먹은 망나니 같은 표정은 집어치우고, "
"그러니까 에드가 린튼 같은 커다랗고 파란 눈에 번듯한 이마를 바라야 한다는 거지. 나도 그래.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어?"
"얘야, 마음을 착하게 먹으면 얼굴도 고와질 거야."
제가 계속 말해주었습니다.
"생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속이 시커먼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나쁜 마음은 가장 아름다운 것도 아주 추하게 만들어버리지. 자, 이제 얼굴도 말끔히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그리고 투덜거리는 것까지 다 했으니, 말해봐라. 네가 꽤 잘생긴 것 같지 않니? 내가 보기엔 아주 멋진데. 변장한 왕자 같아. 누가 알겠니? 네 아버지가 중국 황제이고 네 어머니가 인도 여왕인지 말야. 그래서 두 분 다 너랑 워더링 하이츠, 드러쉬크로스 그레인지를 일주일치 수입으로 살 수 있을걸. 넌 못된 뱃사람한테 유괴되어 잉글랜드로 온 거야. 내가 너라면, 내 출생에 대해 그렇게 고귀한 생각을 품을 거야. 내가 과연 누구인지 생각하면 하찮은 농부취급을 당해도 용기와 품위가 생길 거야!" (p.102-10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세드릭 이야기 -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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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무료하신가 보군요."
"그 반대요. 지겨울 정도로 정신이 분명해. 지금 기분이 그래요. 그러니까 계속 자세히 얘기를 해 봐요. 오두막에 살고 있는 거미보다 감옥에 살고 있는 개미가 그 집주인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러나 그 깊은 관심이 전적으로 바라보는 입장 때문만은 아니겠지.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살고 있어. 겉으로 보이는 변화, 하찮은 것들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여기에서는 어쩌면 평생의 사랑이 가능할 것도 같아. 나는 어떤 사랑도 일 년간 이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거든. 만약 배고픈 사람들을 모아두고 한쪽은 딱 한 가지 음식만 주고, 다른 쪽은 프랑스 요리로 차려진 식사를 내민다면, 전자는 온 식욕을 집중시켜 제대로 먹겠지만, 후자는 아마도 전체에서 맛있는 것을 골라낼 거야. 각자 단순히 지극히 작은 것만 관심을 갖고 기억하지."
"아, 우리들도 다른 곳 사람들과 같습니다. 언젠가 알게 되실 거예요."
딘 부인이 내 말을 약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딘 부인, 당신이 바로 내가 말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요. 몇 가지 사소한 이 지역 특징을 빼고 나면, 당신에게는 특별히 당신의 신분적 특성이라 여겼던 것이 전혀 없어요. 당신은 보통 하인들보다 생각을 훨씬 많이 하는 것 같소. 사소한 것들에 삶을 낭비하며 살 기회가 없어서 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 생긴 모양이지."
딘 부인이 웃었다.
"저도 확실히 제 자신이 무던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시골에 살면서 일 년 내내 매일 똑같은 얼굴, 똑같은 행동을 보아왔기 때문은 아니랍니다. 모진 경험을 통해 배운 지혜지요. 그리고 보기보다 책을 꽤 읽었습니다. 이 서재에 제가 읽지 않은 책은 없습니다. 책에서도 뭔가 얻었지요. 희랍어, 라틴어, 프랑스어만 빼고요. 그래도 구별은 할 줄 압니다. 가난한 집 딸한테 기대할 수 있는 것 정도겠지요. 그렇지만 진짜 이야기꾼처럼 들려 드리려면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겠네요. 삼 년을 건너뛰는 대신, 이듬해 여름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1778년 여름. 그러니까 거의 23년 전이군요." (p.111-113)
"아무것도 아니야. 천국은 내가 살고 싶은 곳이 아니란 걸 얘기하려고 하는 거니까. 난 이승으로 돌아가려고 가슴이 터지도록 울었어. 그러니까 천사들이 마구 화를 내며 나를 워더링 하이츠 위쪽, 황무지 한가운데로 내던져 버리는 거야. 그곳에서 좋아서 울다가 잠에서 깼지. 그게 내 비밀을 설명해 주는 거야. 나한테 천국이 필요 없는 것처럼 난 에드가와 결혼하면 안 돼. 저 방에 있는 저 못된 사람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비천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난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신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게 돼. 내가 얼마나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지 히스클리프는 모를 거야. 히스클리프가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엘렌, 히스클리프는 나 자신보다 더 나와 같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이든 우리 두 사람의 영혼은 같아. 에드가의 영혼은, 달빛이랑 번개가 서로 다르고 서리와 불이 서로 다르듯, 그렇게 우리와는 달라." (p.146-147)
"문에서는 내 말 들을 수 없을걸. 저녁 식사 준비하는 동안 헤어튼은 내가 볼게. 식사 준비되면 불러. 같이 먹게. 수다나 떨면서 기분을 풀고 싶거든. 히스클리프는 눈치채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어. 모르겠지? 그럴 거야. 사랑이 뭔지 히스클리프는 모를 거야."
"아가씨도 아는데 히스클리프가 왜 모르겠어요? 만약 에드가 도련님이 아가씨를 선택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 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가씨가 에드가 도련님의 신부가 되는 순간 히스클리프는 우정과 사랑, 자신의 전부를 잃게 될 테니까요. 아가씨는 히스클리프와 헤어지는 것을 어떻게 견딜 것인지, 도 히스클리프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어떻게 견딜 것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아가씨, 왜냐하면..."
"히스클리프가 버림받는다고? 우리가 헤어진다고?"
아가씨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아니, 누가 우리를 갈라놓겠다는 거야? 그러다가는 밀로처럼 되고 말걸! 내가 살아있는 한, 엘렌, 누구를 위해서라도 난 그렇게 하지 않겠어. 린튼 집안사람들이 모두 사라진다 하더라도 히스클리프를 잃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게 하려는 게 아니었어. 그런 뜻이 아니었다구.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난 린튼 마님이 되지 않을 거야. 히스클리프는 예전하고 똑같이 앞으로도 평생 동안 내게 중요해. 에드가도 히스클리프를 싫어하면 안 돼. 히스클리프를 받아들여야 한다구.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진심을 알면 에드가도 받아들일 거야. 이제 알겠어? 엘렌은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지? 하지만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거지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하지만 내가 에드가와 결혼하면 히스클리프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남편의 돈으로 말이지요, 아가씨? 에드가 도련님이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게다가 지금까지 얘기하신 에드가 도련님과 결혼하는 이유 중 그것이 가장 나쁜 것 같네요."
"그렇지 않아. 이게 제일 좋은 이유야. 다른 이유는 내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어. 또 에드가를 위한 것이기도 했어. 에드가가 원하니까. 하지만 이것은 에드가에 대한 내 감정과 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야. 표현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엘렌이나 누구에게나 자기를 넘어선 자기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라는 존재가 여기, 여기에만 속해있다면 태어난 것이 무슨 보람이 있겠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괴로움들은 히스클리프의 괴로움이기도 했어. 처음부터 난 지켜보면서 느꼈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히스클리프 때문이야. 모든 것이 사라지고, 히스클리프만 남아 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히스클리프가 없다면 이 세상은 개게 낯설기만 할 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겠지. 에드가에 대한 내 사랑은 숲 속의 나뭇잎들과 같아. 겨울이 나무를 변화시키듯, 시간이 에드가에 대한 사랑도 변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저 깊은 곳, 영원히 변치 않는 바위를 닮았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거야. 에렌, 내가 곧 히스클리프라구. 히스클리프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즐거움으로써가 아니야. 내 자신이 언제나 내게 즐거움만 주는 건 아니잖아. 히스클리픈 내 자신인 거야. 그러니까 히스클리프와 헤어진다는 말은 다시 하지 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그리고..."
아가씨는 말을 멈추고 제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지만 저는 얼른 옷을 잡아챘습니다. 아가씨의 어리석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아가씨의 철없는 얘기를 듣고 제가 이해한 것이 있다면, 아가씨는 결혼의 의무를 모른다는 거예요. 아니면 마음이 비뚤어지고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이든가. 더 이상 비밀을 털어놓아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런 비밀은 지키기가 어려우니까요."
"엘렌, 내 비밀을 지켜줘."
아가씨는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난 약속하지 않겠어요."
저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p.148-150)
<참고>
밀로(Milo)
나무를 돌로 쪼개려다 나무 사이에서 손을 빼내지 못해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는 밀로의 운명을 말한다.
에드가 도련님은,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후 에드가 도련님은 기머튼 교회에서 캐서린 아가씨를 신부로 맞는 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고 믿었습니다. (p.162)
인간이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입니다. 온순하고 너그러운 사람도 독불장군 같은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관심사가 상대방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면 상황은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p.167)
두 사람은 서로 어찌나 좋아하는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인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괴로움으로 표정이 점점 창백해져 갔습니다. 게다가 마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가 히스클리프의 손을 다시 붙잡고 미친 듯이 웃을 때는 주인님의 괴로움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내일이면 오늘 일이 꿈만 같겠지. 당신과 이렇게 다시 만나 손잡고 얘기하는 것이 꼭 꿈만 같아. 그동안 정말 너무했어! 사실, 이렇게 환영받을 자격도 없다구. 3년 동안이나 아무런 소식도 없다니,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
마님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캐서린이 날 생각한 것보다 난 더 많이 생각했소. 결혼소식도 최근에 알았어. 그래서 아래 뜰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지. 캐서린의 얼굴만 잠깐 보고, 물론 깜짝 놀란 얼굴이거나 기쁜 체하는 얼굴이리라 생각했지. 하여튼 그리고 나서 힌들리에게 빚을 갚고 그다음엔 감옥신세를 지지 않도록 자살을 하려고 했지. 하지만 캐서린의 환영을 받으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소. 다음에 만날 때도 지금 같은 태도가 변하지 않길 바라겠소. 두 번 다시 날 쫓아내지 않겠지! 정말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팠었나? 그랬었겠지. 난 캐서린이 3년 전에 한 마지막 말을 들은 이후 비참한 생활과 싸워왔어. 캐서린은 날 용서해야 해. 난 단지 캐서린을 위해 그 고통을 이겨냈으니까!" (p.175-17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위대한 개츠비 - 피츠제럴드 (김보영 옮김,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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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 중에 캐서린 마님이 제 방으로 달려와 머리맡에 앉아 제 머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막 잠이 들려던 저는 잠이 확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이 안 와, 엘렌."
마님이 미안한 듯 말했습니다.
"누가 같이 내 기쁨을 나누어 주면 좋겠어. 에드가는 자기는 하나도 좋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니까 뚱하고 있어. 아무 말도 안 해. 걸핏하면 화만 내면서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 거야. 피곤하고 졸린 사람한테 말을 시킨다면서 나더러 이기적이고 잔인하다는 거야. 조금만 화가 나면 몸이 아프대. 내가 히스클리프 칭찬을 몇 마디 했더니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 건지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건지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나와 버렸어."
"무엇 때문에 주인님께 히스클리프 칭찬을 했어요? 어렸을 적에도 서로 싫어했잖아요. 히스클리프도 주인님을 칭찬하는 걸 들으면 똑같이 화를 낼 거예요. 그게 인지상정이라구요. 싸움을 걸고 싶지 않으면 주인님께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그건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거 아니야?"
마님이 고집을 부렸습니다.
"난 질투심은 없어. 이사벨라의 화사한 금발과 하얀 피부, 고상한 우아함, 식구들 모두 이사벨라에게 쏟아붓는 애정 같은 것에 마음 상한 적은 없었어. 심지어 엘렌도 우리가 가끔 말다툼을 하면 꼭 이사벨라 편을 들었잖아. 그래도 난 멍청한 엄마처럼 양보하잖아. 이사벨라한테 애교를 떨며 구슬러 주지. 우리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에드가도 좋아하고 그러면 나도 좋으니까. 두 남매는 서로 비슷해. 응석받이라니까. 이 세상이 자기네들 편하라고 만들어진 줄 알아. 물론 나도 두 사람한테 맞추고 있지만 역시 따끔하게 혼내는 게 두 사람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마님. 그분들이 마님한테 맞추고 있는거라구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요. 그분들이 마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니까 마님도 두 분의 사소한 변덕을 받아 줄 여유가 생기는 거라구요. 하지만 양쪽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결국엔 싸움이 날지도 몰라요. 그러면 마님이 나약하다고 얘기하는 그 두 분도 마님 못지않게 고집을 부릴 수가 있다구요."
"그때는 죽어라 싸워야지, 안 그래, 엘렌?"
마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냐! 난 에드가의 사랑을 믿어. 내가 그 사람을 죽인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복수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사랑해주니 더욱더 주인님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저는 충고해 주었습니다.
"물론이야. 하지만 사소한 일에 징징댈 필요는 없잖아. 유치하잖아. 히스클리프가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신사고, 또 이 고장에서 제일가는 신사도 히스클리프와 사귀는 것을 명예롭게 여길 거라고 내가 말했다고 눈을 흘기는 게 어딨어? 대신, 자기가 날 위해 그렇게 말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걸 보고 자기도 기뻐해야지. 에드가는 히스클리프와 친해져야 된다구. 히스클리프를 좋아하는 게 낫지. 히스클리프도 에드가를 싫어할 이유야 있지만 히스클리프는 정말 훌륭하게 행동했어!"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 간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겉으로 보기엔 모든 면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주 훌륭해요. 모든 원수들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다니요."
제가 물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다 설명해 주었어. 나도 엘렌만큼이나 놀랐어. 엘렌한테 내 소식을 물으려고 워더링 하이츠에 들렀다고 했어. 엘렌이 아직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야. 조제프가 오빠에게 히스클리프가 왔다고 하니까, 오빠가 나와서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저것 묻더니 마침내 들어오라고 하더래. 마침 노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히스클리프도 함께 어울렸다고 하더군. 오빠가 히스클리프에게 돈을 좀 잃었대. 히스클리프가 돈이 많은 걸 보고 오빠가 저녁에 다시 오라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는 거야. 오빠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너무 무모해서 친구를 신중하게 고르지 못하잖아. 자기가 그렇게 상처를 준 사람을 의심할 이유 같은 건 신경 쓸 생각도 하지 않지. 하지만 히스클리프가 자기를 학대하던 사람과 다시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건 우리 집까지 걸어올 수 있는 거리에 머무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어. 또 우리가 살던 집에 대한 애착, 또 기머튼에 있는 것보다 내가 자기를 만날 기회가 더 만을 것이라는 바람 때문이야.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게 해주면 후하게 사례할 작정이라니까 오빠의 욕심이 분명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오빠는 욕심쟁이니까. 오른손으로 잡은 것을 왼손으로 내버리지만 말이야."
"젊은 사람이 살기에 퍽 좋은 집이기도 하네요! 마님은 그러다가 어찌 될지 걱정도 안 돼요?"
"히스클리프라면 조금도 걱정 안 해. 히스클리프는 위험에 빠지지 않게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잖아. 오빠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더 하겠어? 적어도 내가 오빠한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막고 서 있잖아. 오늘 저녁 일로 나는 하느님과, 사람들과 화해했어. 지금까지 난 하느님한테 화가 나 있었거든. 정말로 엘렌, 난 엄청난 고통을 참아왔어.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 사람도 안다면 괜히 토라져서 내 기쁨을 흐리게 한 것을 창피하게 생각할 거야. 그 괴로움을 나 혼자 참는 것도 남편에 대한 배려라고. 내가 느낀 괴로움을 자주 드러냈다면 남편도 나처럼 그 괴로움을 덜어주고 싶었을 거야. 그러나 이젠 지난 일이야. 그러니 남편이 어리석게 군다고 원한을 갖지는 않겠어. 난 이제 무슨 일이든 참을 수 있어! 아무리 하찮은 사람한테 한쪽 뺨을 맞더라도 다른 쪽 뺨을 내밀 수 있다구. 아니, 화를 내게 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겠어. 좋아, 증거를 보여주지. 지금 당장 남편한테 가서 화해를 하겠어. 잘 자. 난 천사야."
마님은 이렇게 자만하며 방을 나가더군요. 다음날 그 결심이 성공적이었음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에드가 주인님이 화를 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날 오후 마님이 이사벨라 아가씨를 데리고 워더링 하이츠에 가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내의 지나친 활기에 아직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지만요. 그 보답으로 마님은 여름날 따뜻한 애정을 쏟아부어 며칠간 집안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주인님도 하인들도 그 무수한 햇빛의 혜택을 받았지요. (p.179-183)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성격은 그대로였고, 또 바뀔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p.184)
히스클리프 씨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품위 있게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점잖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환경이 두 사람의 위치를 꽤나 많이 바꾸어 놓아서 모르는 사람이라면 히스클리프 씨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신사로, 이사벨라 아가씨를 천한 여인네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p.267)
마님은 몸을 뒤로 빼며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히스클리프의 시선에 답했습니다. 변덕이 죽 끓듯 했지요.
"히스클리프, 그리고 에드가는 내 가슴을 찢어놓았어요. 히스클리프! 그리고는 둘 모두 나를 찾아와 자기들이 동정받을 사람인 듯 울며 슬퍼하다니! 난 절대로 당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어요. 난 실어. 당신은 이미 나를 죽였어. 그러고도 아마 잘 살았겠지. 히스클리프는 참 건강하기도 하네요!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얼마나 더 오래 살 작정이지?"
히스클리프 씨는 마님을 껴안으려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픈 씨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습니다. 그러자 마님이 그의 머리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님이 계속 비통한 듯 말을 이었습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함께 죽을 때까지 말이야. 당신이 괴로워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당신은 왜 괴로우면 안 되지? 난 괴롭단 말이야. 날 잊을 거야? 내가 땅속에 묻히면 행복해질 것 같아? 20년쯤 지나면, 이렇게 말하겠지. '저건 캐서린 언쇼의 무덤이야. 오래전에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녀를 잃었을 땐 몹시 슬펐지. 하지만 모두 지난 일이야. 그 후로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어. 캐서린보다는 내 자식들이 더 소중해. 죽어서 캐서린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아. 내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다니 퍽 가슴이 아프군.' 이렇게 말하겠지, 그렇죠 , 히스클리프?"
"나까지 당신처럼 미치게 할 텐가?"
히스클리프 씨는 머리를 빼내며 이를 앙다물고 소리쳤습니다.
두 사람은 냉정한 구경꾼을 기이하고도 섬뜩하게 했습니다. 마님은 죽어서도 타고난 성격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하늘도 귀양 온 곳이라 여길 사람이지요. 그때 마님의 창백한 뺨과 핏기 없는 입술, 그리고 번쩍이는 눈동자에는 복수심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깍지 낀 손가락에는 히스클리프 씨의 머리칼 한 줌이 남아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씨는 몸을 일으키려다 한 손으로 마님의 팔을 잡았는데 환자를 주의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팔을 떼자마자 마님의 창백한 팔뚝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남겼습니다.
히스클리프 씨가 소리쳤습니다.
"악마에게 사로잡혔군. 죽어가면서도 내게 그렇게 말하다니. 캐서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당신이 죽고 난 뒤라도 계속해서 깊이 파고들 거라 생각하고 있나? 내가 당신을 죽였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는 걸 캐서린도 알고 있을 거야. 또 내가 나의 존재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캐서린을 잊을 수 없다는 걸 잘 알 거야. 네가 땅속에 고이 잠든 사이에도 난 지옥 같은 고통에 몸부림칠 텐데 당신 이기심은 그래도 만족을 못 하는 건가?"
"난 고이 잠들지 않아!"
지나친 흥분으로 마님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더니 마치 발작을 일으킬 듯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진정될 때까지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마침내 부드럽게 망를 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 당신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다만 언제까지나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내 말이 나중에라도 히스클리프를 괴롭히거든 땅속에서 나도 히스클리프와 똑같이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며 날 용서해 줘요. 제발, 여기 내 앞에 다시 앉아 줘. 지금껏 한 번도 나한테 못되게 군 적 없잖아요. 아냐, 히스클리프가 노여움을 품고 있으면, 나중에 나한테 들은 심한 말보다 더 아프게 기억될 거야. 다시 이리 와줘, 제발!"
히스클리프 씨는 마님의 의자 뒤로 가 허리를 굽혔지만, 마님에게는 흥분에 휩싸여 잿빛으로 변해버린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님이 히스클리프 씨의 얼굴을 보려고 몸을 구부려 돌리자 히스클리프 씨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돌아서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 등을 돌린 채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마님은 이상한 듯 히스클리프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든 움직임이 마님의 가슴속에 새로운 감정을 일깨웠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실망과 분노가 담긴 어투로 제게 말했습니다.
"그래, 봤지, 엘렌! 내 목숨이 달려 있어도 잠깐이라도 마음을 풀지 못해! 내가 받는 사랑이 저런 거야. 하지만 괜찮아. 저 모습이 나의 히스클리프는 아니니까. 난 그래도 나의 히스클리프를 사랑할 게야. 저 세상 가도 데리고 갈 거야. 히스클리프는 내 영혼 안에 있으니까."
그러더니 더욱 깊은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여기 산신이 부서진 감옥이야. 여기 갇혀 있는 거 이젠 지치고 지쳤어. 저 영광스런 세상으로 도망쳐 그곳에 영원히 있게 되기를 가다리는 것도 지쳤어. 눈물이 앞을 가려 세상이 보이지 않은 채, 아픈 마음의 벽을 통해 그리워해도 여전히 그 안에 그대로 있어. 엘린은 나보다 낫다고, 운이 좋다고 생각하겠지? 건강하고 기운이 넘치니까 내가 불쌍해 보일 거야. 하지만 곧 상황이 바뀔걸. 내가 엘렌을 불쌍하게 여기게 될 거야. 난 더없이 멀고 높은 곳에 가 있을 거야. 히스클리ㅍ는 내 곁에 오려고도 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해."
마님은 계속 혼잣말을 이었습니다.
"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히스클리프! 이제 우울해하는 건 그만둬요. 이쪽으로 와요. 히스클리프."
간절한 마음으로 마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그런 간절한 호소에 히스클리프 씨는 마님을 돌아보았지만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습니다. 눈물이 흥건한 눈은 마님을 향해 열정적으로 빛나고, 가슴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습니다. 한순간 두 사람은 떨어져 서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서로 부둥켜안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님이 뛰어가자 히스클리프 씨가 마님을 안았는데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마님의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 제 눈에는 마님이 곧장 의식을 잃은 듯했습니다. 히스클리프 씨는 마님을 품에 안은 채 가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마님이 혹시 기절했나 보려고 제가 급히 달려가자 히스클리프 씨가 마친 개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행여 마님을 뺏길까 욕심스럽게 마님을 끌어당기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인간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말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입을 다물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었습니다.
마님이 몸을 조금 움직이기에 저는 졸였던 마음을 겨우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마님이 히스클리프 씨의 품에 안긴 채 손을 들어 히스클리프 씨의 목덜미를 끌어안더니 뺨을 비벼댔습니다. 히스클리프 씨도 마님을 보듬으며 아무렇게나 떠들었습니다.
"캐서린이 날 이렇게 잔인하게 만들었어. 왜 날 무시했지? 왜 내 마음을 저버린 거지, 캐서린? 난 캐서린을 위로해 줄 수가 없어. 캐서린 당신은 그럴 만하니까. 캐서린이 스스로를 죽인 거야. 그래, 내게 입을 맞추며 울어 봐. 그리고 내게서도 입맞춤과 눈물을 가져가 봐. 내 입맞춤과 눈물이 캐서린을 야위게 할 거야. 캐서린을 저주할 거야. 캐서린은 날 사랑했어. 그런데 왜 날 버린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대답해 봐. 에드가를 향한 그 하찮은 마음 때문에? 가난도, 신분의 전락도, 죽음도, 신이나 악마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는데, 캐서린 자신은 그걸 해냈어. 내가 캐서린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게 아니라 당신이 아프게 한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내 마음도 아프게 했어. 난 강하기 때문에 더욱더 힘들어. 내가 살고 싶을 거 같은가? 이게 도대체 어떤 삶이겠어? 캐서린 같으면 영혼을 무덤에 묻어 두고 살고 싶을 것 같나? 오, 하느님!"
"날 가만 내버려 둬. 제발."
마님이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나는 그 잘못 때문에 죽을 거야. 그거면 됐어. 히스클리프도 날 버렸잖아? 그렇지만 히스클리프를 욕하진 않겠어. 난 히스클리프를 용서해요. 그러니 히스클리프도 날 용서해 줘요."
"용서하기도, 그 두 눈을 바라보기도, 그 야윈 손을 만지기도 어렵군. 다시 한번 내게 키스해 줘. 내게 그 눈동자를 보이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내게 한 일은 모두 용서하지.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니까. 하지만 당신을 죽인 놈은 용서 못해.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움이 서로에게 복받쳤습니다. 참다못해 두 사람 모두 통곡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히스클리프 씨도 이런 때에는 눈물을 흐릴 줄 아는 모양입니다. (p.288-294)
그날 밤 자정 무렵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선생님께서 워더링 하이츠에서 보셨던 그 캐시 아가씨인데, 가냘픈 칠삭둥이였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그 아이 엄마는 히스클리프 씨를 찾지도,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잃은 주인님의 슬픔을 자세히 들려드리기에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 이후 주인님의 삶으로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볼 때 더 큰 슬픔은 주인님의 상속자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허약한 아기를 바라보며 저는 그것이 몹시 서글펐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저는 에드가 주인님의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손녀 쪽이 아닌 이사벨라 아가씨에게 재산을 물려주게 해놓은 것을 속으로 한탄했습니다.
그 불쌍한 아이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태어나 몇 시간을 울어도 조금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보상을 해 주듯 사랑해 주었지요. 그 아이의 마지막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태어나면서부터 외로운 운명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맑고 상쾌한 날이었습니다. 부드러운 햇살이 조용한 방으로 살며시 들어와 침대,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었지요.
주인님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주인님의 젊고 고운 얼굴은 곁에 있는 마님의 얼굴만큼이나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주인님은 고뇌로 지쳐 고요한 모습이었지만 마님은 영원한 평화를 찾은 고요한 모습이었습니다. 마님의 부드러운 이마, 꼭 감은 눈과 입은 미소를 띠고 있섰습니다. 하늘나라 천사도 마님보다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마님이 누리는 그 무한한 고요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편안한 모습을 바라보는 그 순간 저는 거룩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불현듯 몇 시간 전에 마님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아주 멀고도 높은 곳에 가 있겠지. 여전히 이 세상에 있든 이미 천국에 있든, 마님의 영혼이 신과 함께 하기를.'
제가 유별난 건지는 몰라도 저는 함께 있는 조문객이 미친 듯이, 혹은 절망감에 빠져 울어대지만 않는다면 시체가 있는 방을 지키는 것도 즐겁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지하세계도 깨뜨릴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수가 있거든요. 죽은 자가 들어간 영원하며 그림자가 없는 그곳, 불멸의 세계에서의 생명은 사랑의 공감과 기쁨의 충만함에도 세상의 영원한 확실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즈음 저는 에드가 주인님과 같은 분의 사랑에도 참 많은 이기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님의 축복받은 영혼의 해방에 어쩌면 그렇게도 슬퍼하는지!
확실히, 제멋대로인데다가 참을성도 없는 마님이 과연 평화의 안식에 들었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마님의 주검 앞에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주검의 평온함이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평온하게 보였으니까요.
"록우드 씨, 그런 사람들이 저승에 가서도 행복하리라 생각하시나요? 전 그게 아주 궁금하답니다."
나는 왠지 이단적인 듯해 딘 부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딘 부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캐서린 마님의 생을 돌이켜 보면, 저승에서 행복하리라 확신할 수가 없네요. 어쨌거나 그건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요. (p.300-303)
마님뿐만이 아니라 히스클리프 씨도 불쌍했습니다. 인간은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요. (p.305)
"쳇, 캐서린은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하는군! 지금 캐서린이 어디 있지? 천국은 아니야. 사라지지도 않았어. 그럼 어디에 있는 거야? 아! 캐서린. 내 고통은 알바 아니라고 했지. 난 딱 한 가지만 기도하겠어. 내 혀가 뻣뻣하게 굳어벌 때까지 기도하지. 캐서린 언쇼,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편히 쉬지 못할 거야. 내가 캐서린 널 죽였다고 했지? 그렇다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날 찾아와! 살해당한 자는 혼령이 되어 그 살인자를 찾아온다고 하더군. 혼령이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귀신이라도 좋아. 그러나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있어. 차라리 날 미치게 해 줘! 제발 널 찾을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날 버려두지 마! 아, 하느님. 난 참을 수가 없어. 나의 생명인 너 없이는 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너 없인 살 수 없다구."
히스클리프 씨는 옹이 투성이의 나뭇가지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마치 창과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야수처럼 눈을 부릅뜬 채 울부짖었습니다. 여기저기 나무껍질로 튄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히스클리프 씨의 손과 이마에는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동정심은 거의 일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씨는 제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자 저보고 어서 꺼져버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 수 없이 저는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위로할 수도 달랠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요! (p.307)
아내를 잃은 슬픔과 함께 주인님은 아주 완벽한 은둔자가 되어 버렸답니다. 치안판사의 일도 그만두고,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행사가 있어도 마을에 가는 걸 피하고 본인 소유의 저택공원과 대지 안에서만 완전히 파묻혀 지냈지요. 달라진 것이라고는 혼자서 가끔씩 황무지를 산책하거나 캐서린 마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일뿐이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저녁나절 아니면 사람들이 다니기 전인 이른 아침뿐이었답니다.
그러나 워낙 성격이 인지한 분인지라 그리 오랫동안 불행에 빠져있지는 않았지요. 주인님은 마님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기를 빌지도 않았습니다. 세월이 체념과 일상적인 즐거움보다 더 달콤한 우수를 가져다주었답니다. 주인님은 열렬하면서도 부드러운 애정을 마음에 간직한 채 캐서린 마님을 기억했으며 마님이 틀림없이 천국으로 갔다고 믿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품었답니다.
그러면서 주인님은 지상에서도 위안과 사랑을 얻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세상을 떠난 자의 핏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냉정함은 4월의 눈처럼 녹아버리고 그 작은 것이 더듬더듬 말을 하며 아장아장 걷기도 전에 그 아이가 주인님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그 아이에게 캐서린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지만 언제나 줄여서 불렀답니다. 돌아가신 마님을 캐시라고 줄ㅇ려 부른 적은 없었는데, 아마도 히스클리프 씨가 그렇게 부르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아이는 항상 캐시로 불렸답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엄마와 구별이 되면서 연관이 지어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아이에 대한 애착은 자기 자식이라기보다는 죽은 아내의 핏줄에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에드가 주인님과 힌들리 주인님을 비교하면서 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면서 그렇게도 행동은 정반대인지 궁금해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했답니다. 둘 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했고 아이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지요. 그런데도, 좋든 나쁘든 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겉으로는 힌들리 주인님이 더 의지가 강한 듯했지만 결국 더 열등하고 약한 인간이었지요. 배가 암초에 부딪히자 선장은 자기 할 일을 내팽개치고, 또 선원들도 배를 구하려고 하지 않고 혼란만 일으켜 불쌍한 배는 결국 희망을 잃고 말았던 거지요. 반대로 에드가 주인님은 충실한 영혼의 고결한 용기를 보여주었지요. 에드가 주인님은 하느님을 믿었으며 하느님도 에드가 주인님을 위로해 주었던 거지요. 한 사람은 희망을 가졌지만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버렸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겠지요. (p.333-334)
"내 아들은 장차 드러스퀴로스 그레인지의 주인이 될 테니까 내가 그 집을 상속받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는 죽지 않을 거야. 또 이애는 내 자식이잖아. 내 자식이 그 집 재산을 차지하는 걸 기쁘게 보고 싶어. 내 아들이 그 집 아이들을 고용하고 그 애들이 내 돈을 받으며 자기 아버지 땅에서 일하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이런 강아지 새끼를 참고 봐주는 이유라고, 이 녀석도 맘에 안 들지만 옛날 기억을 되살리는 건 정말 싫거든. 그 생각 하나로 꾹 참고 있는거라구. 나랑 같이 있으면 저 녀석은 안전해. 당신 주인이 자기 자식을 보살피는 것만큼 나도 내 자식한테 잘해 ㅐ줄 수 있어. 위층에 저 녀석의 방을 멋지게 꾸며 놓았어. 저 녀석이 배우고 싶은 걸 가르쳐 줄 가정교사가 3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오도록 계약도 했어. 헤어튼에게도 저 녀석 말을 무조건 들으라고 일러놓았지.. 사실 난 저 녀석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남자가 되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어. 그런데 애쓴 보람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 심히 유감스럽군.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는 행운이 있다면 그것은 남부럽지 않은 자식을 얻는 것이었는데 저렇게 허여멀건 얼굴에 찡찡 눈물만 짜는 녀석이라니 정말 실망이군!" (p.375-376)
"내 의도는 아주 분명하지. 내 진심을 말해주지. 두 사촌끼리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 좋겠단 말이야. 나로서는 그 집 주인님께 관용을 베푸는 거라구. 그 사람의 어린 딸은 받을 유산도 없잖아. 내 바람에 협조하기만 하면 린튼과 함께 즉시 공동 상속인이 되잖아.:
"만약 린튼이 죽으면요? 사실 린튼이 오래 살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가 상속을 받게 되는 거라구요."
"아니, 그렇게는 안 될 거야. 그렇게 넘어가도록 유언장에 적혀 있지 않거든. 그 재산은 나한테 오기로 되어 있지. 그러나 괜한 논쟁에 빠지기 싫고 또 둘이 합치기를 바라는 마음에 두 사람을 결혼시킬 작정이야.: (p.387)
"난 저 녀석이 맘에 들어.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나디까. 원래 저렇게 바보로 태어났다면 지금의 반만큼도 재미있지 않았을 걸. 헤어튼은 바보가 아니야. 나도 겪어봐서 저 녀석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어. 이를테면 저 녀석이 지금 뭐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난 아주 정확히 알아. 하지만 그건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의 시작일 뿐이야. 녀석은 무지의 구렁텅이 속에서 절대 헤어나지 못할걸. 난 저 녀석을, 녀석의 비열한 아버지가 날 괴롭혔던 것보다도 더 심하게 괴롭혀 천하게 만들었지. 이 세사아에 짐승 말고 모든 것은 다 비열하고 나약한 것이라며 경멸하게 만들었어. 힌들리가 자기 아들 녀석을 보면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지? 내가 내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차이는 있겠지. 한쪽은 황금 덩어리인데도 길에 까는 돌멩이로 쓰이고, 또 한 놈은 양철조작을 은으로 쓰려고 닦고 있는 꼴이지. 내 자식은 써먹을 데라곤 조금도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써먹어야겠지. 힌들리 아들은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어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어. 제일 신나는 게 뭔 줄 아나? 녀석이 날 아주 좋아한다는 거야! 그 점에 있어서는 내가 힌들리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엘렌도 인정할 거야. 저 세상에 가 있는 그 악당이 자기 자식한테 해를 끼쳤다고 무덤에서 일어나 나한테 욕을 해도 난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을 거라구. 헤어튼이 나서서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기 친구를 어떻게 그렇게 욕을 할 수 있느냐고 대신 싸워 줄 테니까 말이야." (p.394-395)
"아빠 병이 더 심해질 것 같아. 아빠도, 유모도 없이 나 혼자 남게 되면 난 어떡하지? 엘렌, 난 언젠가 유모가 한 말이 잊히질 않아. 너무나 생생해.. 아빠와 유모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이 얼마나 쓸쓸할까?"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세상에 먼저 왔다고 먼저 가는 건 아녜요. 혹시 알아요? 아가씨가 먼저 죽게 될지? 나쁜 일을 미리 생각하는 건 좋은 게 아녜요. 우리 중 누가 저 세상으로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렇게 생각하자구요. 주인님은 아직 젊고, 저는 튼튼하고 아직 마흔 다섯 살도 안 됐잖아요. 우리 어머니는 여든 살 까지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도 정정하셨대요. 주인님이 예순까지만 사신다 해도 아가씨가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이 남아 있는 거라구요. 이십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을 가지고 미리 슬퍼하는 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p.413-414)
헤어튼은 자신이 몰래 책을 모아 둔 사실을 사촌이 끄집어내자 얼굴을 붉히더니 더듬더듬 그게 아니라고 화를 내며 중얼거렸다.
"헤어튼 씨도 지식을 넓히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헤어튼을 도와주려 말했다.
"부인의 교양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부인처럼 교양을 갖추고 싶은 모양입니다. 몇 년만 있으면 훌륭한 교양인이 될 것 같은데요."
캐시가 대답했다.
"그 사이 나는 멍청이가 되길 바라겠죠. 그래요. 저 사람이 혼자 더듬더듬 글자를 읽으려 앴는 걸 봤어요. 아주 형편없더군요. 어제처럼 그 체베 체이스 가사 좀 한번 더 읽어봐요. 정말 재미있던데요. 난 다 들었어요. 어려운 단어가 나오니까 사전을 뒤적이며 찾다가 결국 욕을 하는 거 있죠. 거기 나와 있는 설명도 못 읽으니까."
헤어튼은 자신의 무식함이 조롱당하자 몹시도 모욕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봐도 좀 심한 것 같았다. 헤어튼이 처음 글을 배우려고 노력했을 때의 딘 부인 이야기가 생각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부인, 누구나 시작은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땐 누구나 다 넘어지고 비틀거리게 마련이죠. 그럴 때 선생님이 도와주지는 않고 비웃기만 하면 계속 비틀거리고 넘어지기만 할 겁니다."
"아니요. 헤어튼이 공부하는 걸 못하게 하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내 책을 가로채면 안 되잖아요. 지독한 엉터리 발음으로 전부 우스꽝스럽게 들리더군요. 산문이든 시든, 그 책들 모두 내게는 여러 가지 추억이 담긴 소중한 것들이에요. 그래서 저 사람의 입으로 더럽고 천박해지는 게 싫어요. 하필 내가 제일 좋아하고 아끼는 것만 골라갔더군요. 꼭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헤어튼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가슴만 들썩거렸다. 수치스럽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감정을 참아내기가 무척 어려운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도와줄 심산으로 문쪽으로 걸어가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헤어튼도 나처럼 일어나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손에 대여섯 권이 책이 들려있었다. 그것을 캐시의 무릎에 내던지며 외쳤다.
"가져 가! 이런 책 얘기는 두 번 다시 듣기 싫어. 읽기도 싫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캐시가 대답했다.
"이젠 나도 필요 없어. 이걸 보면 당신이 생각날 테니 나도 이젠 싫어."
캐시는 책 한 권을 펼쳐들고 마치 책을 처름 읽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책 한 대목을 읽다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더니 책을 내던졌다.
"좀 더 들어볼래요?"
캐시는 계속 약을 올릴 셈으로 아까와 똑같이 옛 민요의 구절을 더듬더듬 읊기 시작했다.
헤어튼의 자존심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캐시의 건방진 입놀림을 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 자그마한 여자가 거칠긴 해도 예민한 사촌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고, 헤어튼에게는 그렇게 복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헤어튼은 잠시 후 책을 주워 모아 불에 집어 던졌다. 화풀이로 하는 짓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얼굴에 잘 드러나 있었다. 책이 타들어가는 내내 책에서 이미 얻었던 즐거움, 기대했던 기쁨들을 곰곰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또 그가 남모래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캐시가 자신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그는 하루하루의 노동과 짐승같은 거친 동물적 욕망에 만족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캐시가 비웃는 것이 부끄러웠고, 또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이 그에게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정받기는 커녕 정반대의 결과와 비웃음만 가져왔으니!
"그래, 당신 같은 짐승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뿐이야." (p.541-543)
아가시는 자기 책에 손을 대면 영감의 책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헤어튼 곁을 지나가며 미소를 짓고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위층으로 올라갔지요. 아마도 아가씨가 맨 처음 린튼을 찾아 이 집에 온 이후로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은 아주 빠르게 두터워졌지요. 가끔 토라지기도 했지만요. 헤어튼이 아가씨의 바람대로 금세 교양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아가씨가 성인군자도, 또 참을성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두 사람의 마음은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었지요. 한 사람은 존경받는 것을, 한 사람은 존경하는 것을 원했지요. 결국 두 사람은 목표에 도달했답니다. (p.566)
이런 가벼운 말다툼을 끝내고 두 사람은 다시 친하게 지내며 선생과 학생노릇을 하느라 아주 분주하게 지냈습니다. 저도 일이 끝나면 두 사람과 함께 앉아 있곤 했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답니다. 말씀 드렸지만 두 사람은 제게 어느 정도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답니다. 저는 오랫동안 아가씨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이제는 헤어튼도 아주 자랑스럽답니다. 헤어튼은 솔직하고 다정한 마음씨와 본래의 명석함으로, 무지와 타락의 구름을 재빠르게 벗어 버렸답니다. 또 아가씨의 진심 어린 칭찬도 도련님에겐 채찍이 되었지요. 마음이 밝아지니 얼굴도 밝아지고, 고상한 기품까지 생기게 되었지요. 언젠가 제가 바위산에 올라간 아가씨를 찾으러 갔다가 워더링 하이츠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이와 지금의 도련님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제가 흐뭇해하는 사이 두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히스클리프 씨가 돌아왔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저희 모두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깜짝 놀랐지요. 우리가 전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기 전부터 그는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합니다. 너무나 기분 좋고 아름다운 장면이었지요. 그런 두 사람한테 고함을 지른다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울 정도였으니까요. 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에 두 사람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빛나고 있었지요.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헤어튼은 스물세 살, 아가씨는 열여덟 살이 었지만 둘 모두 어른처럼 듬직해 보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히스클리프 씨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아마도 록우드 씨는 두 사람의 눈이 무척 닮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셨겟지요? 그렇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는 캐서린 언쇼를 닮았답니다. 지금의 캐시 아가씨는 그다지 어머니를 닮지는 않았습니다. 비슷한 데가 있다면 넓은 이마와 오똑한 콧날뿐이지요. 때문에 어쨌거나 좀 거만하게 보였습니다. 오히려 헤어튼이 돌아가신 마님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답니다. 언제 보아도 아주 신기할 정도였지요. 특히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놀랄 정도였답니다.
세상을 떠난 마님을 닮은 헤어튼의 모습 때문인지 히스클리프 씨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흥분해 난롯가로 걸어가 젊은이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흥분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그 흥분감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겠지요.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으니까요.
히스클리프 씨는 헤어튼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책장을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돌려주고는 아가씨에게 나가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러자 헤어튼도 곧 따라나갔습니다. 저도 따라나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하더군요.
"비참한 결말이군. 그렇지 않나?"
히스클리프 씨는 방금 본 그 장면을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를 쓰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니, 두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있는데, 또 준비도 다 마치고 이제 맘대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막상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난 나의 옛 원수들을 무너뜨리지 못했어. 지금이야말로 원수들의 자식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할 수도 있었어.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었느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때리기는커녕 손을 드는 것도 귀찮아. 지금까지 고통을 참고 노력한 결과에 자비심을 베푸는 꼴이라니! 그게 다가 아니야. 보수에 대한 괘감도 없어. 복수하는 것도 귀찮아졌어.
엘렌, 내가 달라지고 있어. 벌써 그런 변화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생활에 아무런 흥미가 없어. 먹고 자는 것조차 잊어버린다네. 지금 방을 나간 저 두 사람밖에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그 모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캐시 애기는 하지 않겟네.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다만 내 눈 앞에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캐시는 날 아주 미치게 할 뿐이야. 헤어튼은 좀 다르다네. 엘렌은 내가 미쳐간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더니 애써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내가 만약 헤어튼과 관계된 것들, 그리고 지난날의 수많은 생각들을 다 떠벌려도 엘렌은 내 이야기를 어디 가서 옮기진 앟겠지. 내 마음을 외톨이마냥 오랫동안 처박아 두었었는데 이젠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졌다네.
방금 전까지 헤어튼은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어. 헤어튼에 대한 내 감정은 너무나 복잡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
무엇보다 저 녀석은 가슴이 철렁할 만큼 캐서린을 닮았어. 그게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라 생각하겟지만 실은 가장 미약한 점이지.. 캐서린과 연관되지 않는 게 뭐가 있겠나? 바닥만 내려봐도 여기 깔려있는 돌멩이마다 캐서린의 모습이 떠오른다네. 흘러가는 구름, 나무 한 그루, 밤마다 들이쉬는 숨결, 빛을 받는 모든 물건마다 온통 캐서린의 얼굴이 들어있어.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도, 심지어는 내 자신의 모습에도 말이지. 캐서린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튀어나와 나를 놀려단다네. 도처에 캐서린이 있어. 내가 캐서린을 잃었던 그 지겨운 기억들이 모인 전시장 같다네.
헤어튼의 모습은 내 영원한 사랑, 내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 내 비참했던 시절, 내 자존심, 내 행복, 내 고뇌의 허상을 보여준다네. 그런 생각을 엘렌한테 얘기하는 건 다 마친 짓이야. 늘 혼자 있는게 싫으면서도 헤어튼과 함께 있으면 왜 내 고통이 더 깊어만 지는지 설명이 될까. 녀석이 자기 사촌과 어울리든 신경 쓰지 않게 된것도 그때문일 거야. 난 더 이상 저 애들한테 신경쓸 수가 없어."
"그런데 변화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히스클리프 씨?"
저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놀라 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울하게 생각에 잠기든가, 이상한 공상을 즐기긴 햇지만,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았지요. 생명에 위험이 있어 보일 정도로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구요. 잃어버린 우상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었지만 그 외 다른 것은 저처럼 지극히 정상적이었답니다.
히스클리프 씨가 말했습니다.
'변화가 생길 때까지는 나도 모르지. 지금은 다만 왠지 모르게 변화가 올 것이라는 기분만 드는군."
"어디 아 건 아니죠, 그렇죠?"
"아니, 엘렌. 괜찮아."
"그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죠?"
"죽음이 두렵냐고? 천만에.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불길한 느낌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없다네. 왜 두려워야 하나? 몸도 이렇게 튼튼하지, 절제 있는 생활에 게다가 위험한 일도 하고 있지 않으니 아주 오래오래 살아야 할 걸세. 하지만 이렇게는 못 살겠네. 숨을 쉬어야지. 이렇게 심장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네. 아주 강한 용수철을 뒤로 밀쳐둔 것 같아. 생각나지 않으면,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억지로 해야 하지. 내겐 오직 단 하나의 바람만 있다네. 내 온몸이 그것만을 이루길 바라고 있어. 오랫동안 바랐기에 분명 이루어지리라 믿네. 그 바람이 내 삶을 전부 삼켜 버렸거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내 마음을 털어놓아도 고통이 덜하지 않는군. 그래도 설명할 수 없는 내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겠지. 제기랄! 정말 오랜 싸움이었어. 이제는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네."
히스클리프 시는 끔찍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방안을 서성였습니다. 때문에 조제프가 말했던 것처럼 히스클리프 씨의 양심이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p.575-581)
푸근한 하늘 아래, 나는 비석 주위를 서성이며 히스와 초롱꽃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나방을 지켜보기도 하고, 풀을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이렇게 고요한 대지에 누운 이들이 평화로이 잠들지 못하리라고 어떻게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p.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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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제인 브론테 (Emily Jane Brontë, 1818년 7월 30일 ~ 1848년 12월 19일)
영국의 소설가.
1818년 영국 요크셔주 손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회 사제였고, 어머니는 에밀리가 세 살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밀리는 언니 샬럿 브론테, 동생 앤 브론테와 함께 황야의 사제관에서 성장하며 습작을 시작했다. 훗날 《폭풍의 언덕》 ‘1850년판 편집자 서문’에서 언니인 샬럿이 밝힌 것처럼 황야의 메마르고 고립된 풍광은 에밀리가 《폭풍의 언덕》의 괴이하고 독창적인 인물을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세 자매는 1846년 각자의 필명으로 공동 시집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출간했고, 1847년에는 샬럿이 《제인 에어》를, 에밀리가 《폭풍의 언덕》을, 앤이 《애그니스 그레이》를 차례로 출간했다. 출간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둔 《제인 에어》와 달리 《폭풍의 언덕》은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비판받았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 서머싯 몸, 버지니아 울프 등의 극찬을 받으며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현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적인 명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첫 소설을 출간하고 불과 1년 후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진 에밀리는 1848년 요크셔주 하워스에서 서른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고, 《폭풍의 언덕》은 그가 남긴 유일한 소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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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참조>사투리 번역
워더링 하이츠 - 에밀리 브론테 (유명숙 옮김, 을유 세계문학)
(박순녀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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