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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4. 수필

우리 곁의 한시 - 기태완 (다른)

by handaikhan 2023. 2. 7.

 

기태완 - 우리 곁의 한시

 

그늘 속에서 그림자를 쉬게 하는 곳 - 전라남도 담양군 식영정

                         <담양 식영정 일원 (潭陽 息影亭 一圓)>

 

담양 식영정은 아주 작은 정자입니다. 앞면은 기둥이 세 개인 두 칸이고, 측면도 두 칸인 팔작지붕의 조촐한 건물인데 온돌방 하나와 마루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조그만 정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평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은 켤코 건물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당시 학문과 시문으로 유명했던 인사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교유했습니다.

<장자>에 실린 <어부>에 공자에게 은자인 어부가 충고하기를, "그늘 속에 들어가서 그림자를 쉬게한다 (息影처음식영)"라고 했습니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서 가져온 것입니다. 세속 생활을 그만두고 물러나 한가롭게 지낸다는 뜻이지요.

식영정 주인은 석천 임억령입니다. 일찍 벼슬에 나가 승정원 승지와 동복현감을 지냈는데 을사사화 때 동생 임백령이 소윤 윤원형과 같은 편이 되어 인종의 외척인 대윤의 인사들을 쫓아내자 형제의 인연을 끊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나중에 다시 관직에 보귀해 동부승지와 강원도관찰사, 담양부사 등을 지냈지요.

식영정은 석천의 사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성산 언덕에 세운 정자입니다. 송강 정철과 제봉 고경명이 가까이에 살면서 식영정에서 함께 시문을 지으며 어울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석천과 서하당과 송강과 제봉을 네 명의 신선이라 하여 '식영정 사선'으로 불렀습니다.

 

뭉게뭉게 오르는 고개 위 구름

나오자마자 다시 거두어지네

아무 일 없으니 누가 구름과 같은가

서로 보면서 둘 다 싫증내지 않네

(임억령-석천시집)

 

그늘이 있어 모두 쉴 만하니

어느 땅이건 오이 심기에 마땅하지 않겠는가

보슬비 속에 호미 들고 서니

소소히 푸른 도롱이를 적시네

(임억령-석천시집)

 

비가 씻은 바위는 먼지 없고

서리가 침범한 소나무엔 비늘이 있네

이 늙이는 오직 알맞음만 취하니

주나라를 낚는 사람은 아니네

(임억령-석천시집)

 

밝은 달 푸른 솔 아래

외로운 배 낚시터에 매 놓았네

모래밭 앞의 백로 한 쌍

다투어 술자리를 스치며 날아가네

(임억령-석천시집)

 

임억령의 <식영정>은 모두 14수인데 그중의 일부입니다. 식영정 주변의 여러 경치를 읊었습니다. 그 옛날 식영정에서 보였던 뛰어난 경치인 승경들이 지금은 광주호의 댐 속으로 잠기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이 시를 통해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경명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큰아들 고종후와 둘째 아들 고인후를 데리고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요. 고경명과 고인후는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고,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습니다. 이들 삼부자는 나중에 나라의 정려를 받고 표충사에 모셔졌습니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려고

아침 내내 돌 여울을 굽어보았네

내 한가함을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데

오히려 물고기의 한가함에 미치지 못하네

(정철-송강집)

 

안개 낀 풀밭에서 소에게 꼴 먹이고

석양에 피리를 부네

시골 가락이 곡조를 이루지 못하지만

맑읁 음률이 절로 손가락을 놀림에 응하네

(정철-송강집)

 

송강 정철이 식영정의 경치가 뛰어난 열 곳을 읊은 시 중에 일부입니다. 정철은 식영정에서 우리말 가사문학인 <성산별곡>을 짓기도 했습니다.

정철은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종의 후궁이 된 큰 누이 덕분에 궁궐 출입을 하며 지냈지요. 그러나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담양 창평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영정 앞 환벽당 주인 김윤제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힘썼지요. 김윤제는 을사사화 때 나주목사를 그만두고 낙향해 은거한 인사였습니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송강 정철 시선 - 정철 (허경진 옮김, 평민사)

조선 전기 사대부 가사 (문학동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보리)

송강 가사 - 정철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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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석천 노인을 찾아가 뵙고

소나무 아래 정자에서 배회했었네

인간 세상에 여전히 신을 벗어 놓았는데

천상에서 스스로 별을 탔으리라

석양에 구름이 산굴에서 나오고

가을바람에 낙엽이 마당에 가득하네

그대 만나 승경을 말하니

나도 그윽한 문을 두드리고 싶네

나의 벗 김강숙이

소나무 사이에 초가 정자를 지었네

마을 이름은 지금 석리라고 부르고

산 아래 예부터 성산이라 들었네

수레 매어 승경을 찾으려 생각하고

마음을 열고 오래 마당을 거닐리라

봄바람 불면 서로 약속할 수 있으니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숲속 문을 비추리라

(기대승-고봉집)

 

고봉 기대승이 식영정 시에 차운한 5수 가은데 하나 입니다. 김강숙은 김성원입니다. 자는 강숙이고 호는 서하당입니다. 임진왜란 때 동복현감으로서 각지의 의병과 힘을 합쳐 현민들을 보호했습니다. 석천의 사위로 장인을 위해 식영정을 세웠고, 그 자신도 식영정 바로 아래에 서하당을 지어서 경영했습니다.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13년 동안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 받았던 학자입니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 전개한 사단과 칠정에 관한 사찰논변은 조선 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 김영두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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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지방은 승경지가 많아서

가는 곳마다 숲속 정자가 있네

내가 누운 마을은 기촌인데

그대가 사는 산은 성산이네

친소가 세상의 분수와 같고

오고감이 일가의 마당 같네

필마로 항상 이를 것이니

소나무 문을 부디 잠그지 마오

식영정과 환벽당은

지금 노나라 위나라 정자 같네

시내와 산은 비단처럼 밝고

집들은 별처럼 늘어섰네

스스로 풍월을 함께할 수 있으니

원래 집과 마당이 다르지 않네

다만 가련한 소쇄원의 노인은

시든 풀 속에 구름 속 집이 매몰되었네

(송순-면앙집)

 

면앙정 송순은 <면앙정가>로 유명한데 담양에 그의 면앙정이 있습니다. 일찍이 홍문관 직제학, 사간원 대사간, 전주부윤, 나주목사 등을 지냈고, 1569년 77세에 한성부윤, 의정부 우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물러났습니다. 50여 년의 관직생활에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그의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이황은 그를 평해 "하늘이 낸 완벽한 사람"이라 했고, 성수침은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따."라고 했습니다.

식영정은 소쇄원과 환벽당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형제 나라로 불렸던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자라고 한 것입니다.

 

                        <담양 소쇄원 (潭陽 瀟灑園)>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건립한 정원입니다. 소쇄라는 말은 만사에 거리낌 없이 구속당하지 않고 세속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석양에 소쇄원을 찾아갔다가

식영정으로 와서 올랐네

산 안색은 여전히 어두운 색인데

하늘 끝에는 이미 밝은 별이 떴네

대나무 그림자는 외로운 평상에 침범하고

소나무 그늘은 한 마당에 가득하네

푸른 술 단지 놓고 오늘밤 이야기하니

몸이 신선 집에 온 듯하네

(임훈-갈천집)

 

임훈은 광주목사를 지냈습니다. 목사 시절에 소쇄원과 식영정을 방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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