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집
<노천명 - 사슴 (1938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작품해설 - 이인복 (숙명여대교수)>
노천명은 <결손의식>의 두 가지 존재양ㅅ힉, <고독>과 <향수>를 문학정신(시세계)의 양대 지주로 하여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그 두 개의 <결손의식>이 가장 성공적으로 배합된 작품이 바로 <사슴>이다.
이 시는 한 마리 사슴을 스케치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 시는 사슴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가지 잇아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지체가 어떻게 생겼든 관여하지 않는 의식 위주의 선언이 도사리고 있다. 아울러, 두상의 외형적 동작을 묘사함으로써 지성적 사유의 우위성을 들고 나온 그는, 다시 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자신의 과거, 자신의 정신적 고향을 찾으려 함으로써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연에서 시인은 사슴에게 거는 일방적인 대화를 통하여 사슴이 누구인가를 밝힌다. 이 대화는 앞서 말한 바 자기존재의 탐구 -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ㅎ여식을 취한다. 노천명이 사슴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사슴에 동일화시킨다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노천명이 그 많은 동물 가운데 사슴을 자기동일화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유는 모가지가 길다는 것과 점잖다는 것과 관이 향기롭다는 세 가지였다. 그리고 그 길다, 점잖다, 향기롭다는 세 가지 형용사로부터 자기존재의 고독을 풀이한다. 먼저 모가지가 길다는 사실부터 주의해보자. 목이 길다는 육체적 조건이 슬프다는 정감적 결과를 가지고 와야 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다고 말한다. 이 과감한 단언에 빨려듦으로써 우리는 이미 노천명의 논리에 압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 전개되는 점잖다는 속성과 말없다는 속성이 슬픈 짐승, 곧 노천면의 특성이라고 강조할 때 우리는 아무런 이의도 내세울 수가 없게 된다. 목을 길게 늘이고 항상 슬픈 마음 때누에 말도 없ㅂ이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는 시인은 이제 자신의 정신적 고고성을 관이 향기롭다는 공감각적 수법으로 나타낸다.
두 번째 연에서 노천명은 사회현실의 탐구, 즉 왜 사느냐? 내지는 어떻게 살겠느냐? 라는 인생관을 밝히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노천명은 인생관에 대한 해답으로 들여다본다, 생각한다, 바라본다는 세 개의 동사를 마련하고 있다. 우선, 목을 길게 늘이고 다시 한 번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그가 행하는 첫번째 동작이다.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습, 그것도 그림자의 형태를 바라봄으로써 자애적 정체성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잊혀졌던 전설,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밖에는 없는 법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천명의 문학정신은 흔히 불만이란 형식으로 표현되는 결손의식이었다. 그리고 이 결손의식은 고독과 향수라는 두 개의 정서적 양식으로 노천명 시작품의 형성인자를 이루어왔다고 하겠다. (p.143-148)
<노천명 - 자화상 (1938년)>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러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고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처럼 꺾이는 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노천명 - 포구의 밤 (1938년)>
마술사 같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무거운 걸음새로 기어드니
찌푸린 하늘엔 별조차 안 보이고
바닷가 헤매는 물새의 울음소리
엄마 찾는 듯......내 애를 끓네
한가람 청풍, 물 위를 스치고 가니
기슭에 나룻배엔 등불만 조을고
사공의 노랫가락 마디마디 구슬퍼
호수같이 고요하던 마음바다에 잔물살 이니
한때의 옛 곡조 다시 떠도네
이 바다 물결에 내 노래 띄워 -
그 물결 닿는 곳마다 펼쳐나보리
바위에 부딪치는 구원의 물소리
내 그윽한 느낌에 눈감고 듣노니
마산포의 밤은 말없이 깊어만 가는데....
<노천명 - 동경 (1938년)>
내마음은 늘 타고 있소
무엇을 향해선가 -
아득한 곳에 손을 휘저어 보오
발과 손이 매여 있음도 잊고
나는 숨가삐 허덕여보오
일찍이 그는 피리를 불었소
피리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나는 몰라
예서 난다지....제서 난다지.....
어디엔지 내가 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몰라
허나 아득한 저곳에
무엇이 있는 것만 같애
내 마음은 그칠 줄 모르고 타고 또 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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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盧天命, 1911년 9월 1일 ~ 1957년 6월 16일)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 작가,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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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노래 - 노천명 (더스토리)
사슴의 노래 - 노천명 (스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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