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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어느 인생 - 모파상 (백선희 옮김, 새움) <여자의 일생>

by handaikhan 2023. 2. 5.

모파상 - 어느 인생 (초라한 진실) (백선희 옮김, 세움 세계문학)

『Une vie』가 우리나라에 처음 출간된 판본은 김기진 번역의 『녀자의 한평생』이다. 일본어판 『女の一生』을 중역한 것으로 추정되고, 영문학을 공부한 히로쓰 가즈오는 당시의 영어 번역본 제목인 ‘A woman’s life’를 중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어느 인생’은 불어에 서툴렀던 한 번역가가 당시, 일본어판을 중역해 잘못 붙여졌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셈이다

 

모파상 - 여자의 일생 (1883년)

 

잔느는 짐을 다 꾸리고 창가로 다가가 보았으나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밤새 폭우가 유리창과 지붕을 두드렸다. 물은 잔뜩 머금고 낮게 내려앉은 하늘은 구멍이라도 난 듯 땅 위로 물을 게워 내고 흙을 설탕처럼 녹여 걸쭉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열기를 가득 품은 돌풍이 불고 있었다. 불어난 시냇물의 요란한 소리가 인적 없는 거리를 채웠고, 스펀지처럼 습기를 빨아들인 집집마다 지하실부터 다락까지 온 벽이 땀을 흘렸다.

어제 수녀원에서 나와 마침내 영영 자유로워져 오랜전부터 꿈꿔 온 인생의 온갖 행복을 거머쥘 준비가 된 잔느는 날이 개지 않으면 아버지가 떠나기를 망설일까 걱정되어 아침부터 벌써 백 번쯤 지평선을 살폈다. (p.15)

 

<비교>

여자의 일생 - 모파상 (김규희 옮김, 글누림)

잔은 짐을 다 꾸리자 창가로 가서 바깥을 내다봤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지난밤 폭우가 밤새도록 유리창과 지붕을 뒤흔들면서 줄기차게 쏟아졌었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 낮게 내려앉은 하늘ㄹ은 뻥 구멍이라도 뚫린 듯 사정없이 물을 지상으로 흘려보내 지면을 질퍽질퍽한 흙탕으로 만들어 놓았다. 땅은 마치 녹아버린 설탕처럼 변했다. 돌풍이 때때로 후텁지근한 열기를 뿜고 휙휙 지나갔다. 넘쳐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한적한 길거리까지 들려왔고, 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은 집 안으로 스며든 습기를 마치 해면처럼 빨아들여서 지하실 광으로부터 다락방에 이르기까지의 벽은 축축하게 땀이 배어 있었다. (p.9.10)

 

모파상 - 여자의 일생 (이동렬 옮김, 민음사)

잔느는 짐을 다 꾸리고 나서 창가로 다가가 보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폭우가 밤새도록 창유리의 지붕을 세차게 두드렸다. 물을 잔뜩 머금은 채 낮게 드리운 하늘이 터지면서 땅 위로 물을 쏟아 내며, 땅을 곤죽으로 이기고 설탕처럼 녹이는 듯 보였다. 무거운 열기를 가득 담은 돌풍이 훑고 지나갔다. 넘쳐흐르는 개울물의 콸콸거리는 소리가 인적 없는 거리를 채웠고, 거리의 집들은 스펀지처럼 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습기는 집안으로 스며들어 지하실부터 다락방까지 벽을 따라 땀처럼 흘러 나오고 있었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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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은 깐깐하긴 해도 선량한 옛날 신사였다. 장 자크 루소의 열렬한 신봉자인 그는 자연과 들판, 숲과 짐승에 대한 연인 같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태생이 귀족인 그는 본능적으로 숫자 93을 증오했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이 철학자인 데다 교육으로 자유주의지가 된 터라 악의 없이 과장된 증오심을 드러내며 전제주의를 혐오했다.

그의 가장 큰 강점이자 큰 약점은 선량함이었는데, 보듬고, 베풀고, 포옹하기 위해서라면 팔이 모자랄 정도의 선량함이요, 의지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저항할 줄 모르는 창조주의 어수선한 선량함이요, 기력 결핍처럼 거의 악덕 같은 선량함이었다.

이론가인 그는 딸을 행복하고, 착하고, 바르고 다정한 여자로 만들고 싶어 교육 계획을 고심해서 세웠다.

딸은 열두 살까지 집에서 지내다가 어머니가 울며 반대했자만 사크레쾨르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딸이 그곳에 엄격히 유폐되어 인간사를 모른 채 세상과 담을 샇고 지내게 했다. 딸이 열일곱 살이 되어 순결한 상태로 돌아오면 자신이 직접 합리적인 시로 흠뻑 적시듯 감싸주고 싶었다. 비옥한 대지 한가운데 들판을 거닐며 딸의 영혼이 열리고 동물들의 순박한 애정, 천진한 사랑, 삶의 평화로운 법칙을 보며 딸이 무지에서 서서히 깨어나기를 바랐다.

이제 딸은 무료한 낮에, 긴긴 밤에, 희망을 품어 보는 고독한 순간에 이미 상상해 본 온갖 기쁨과 매혹적인 우연을 한껏 누릴 태세로, 행복에 대한 갈망과 생기를 한껏 머금은 눈부신 모습으로 수녀원을 나온 길이었다. (p.16-1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인간 불평등 기원론 - 루소 (김충현 옮김, 펭귄클래식)

에밀 - 루소 (정병희 옮김, 동서월드북)

93년 - 빅토르 위고 (이형식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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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마차는 초원을 가로질렀다. 이따금 비에 젖은 버드나무가 시체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채 물안개 너머로 근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말편자는 첨벙거렸고, 마차의 네 바퀴는 진흙을 사방으로 튀겼다.

모두 말이 없었다. 땅처럼 마음도 젖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몸을 젖혀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남작은 침울한 눈길로 비에 젖은 단조로운 들판을 응시했다. 로잘리는 무릎에 짐을 얹은 채 평민 특유의 동물적 몽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푸근한 빗줄기 아래 잔느는 실내에 갇혀 있던 식물을 밖에 내놓은 것처럼 다시 생생해지는 느낌이었다. 농도 짙은 기쁨이 무성한 나뭇잎처럼 그녀의 마음에 슬픔이 깃들지 못하게 막아 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노래 부르고 싶었고, 손을 밖으로 뻗어 물을 받아 마시고 싶었으며, 말의 질주에 몸을 맡기고 황량한 풍경을 보며 그 홍수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느낌을 즐겼다. (p.21-22)

 

그들은 검소하게 생활했기에 그 정도 수입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집안에 항상 뚫려 있는 밑 빠진 독인 선량함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 선량함은 태양이 늪의 물을 말리듯이 그들 수중의 돈을 말렸다. 돈은 흐르고, 새고, 사라졌다. 어떻게?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매번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오늘 크게 산 것도 없는데 100프랑이나 썼어."

이렇게 쉽게 베푸는 건 그들 삶에서 가장 큰 행복 가운데 하나였따. 이 점에 관해서는 감동적일 만큼 당당하게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p.23)

 

거센 폭우가 차츰 잦아들더니 아주 고운 먼지처럼 가는 안개비가 흩날렸다. 구름 천장이 걷히고 환해지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한 줄기 긴 햇살이 비스듬히 초원을 내리비쳤다.

구름이 갈라지더니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찢긴 틈새가 이내 장막이 찢기듯 벌어졌고, 선명하고 깊은 쪽빛의 순수하고 화창한 하늘이 세상 위로 펼쳐졌다.

대지가 내쉬는 행복한 한숨 같은, 신선하고 감미로운 바람이 지나갔다. 마차가 공원이나 숲을 따라갈 때는 깃털을 말리고 있는 새의 활기찬 노랫소리가 들렸다.

저녁이 내렸다. 이제 마차 안 모두가 잠들었다. 잔느만 에외였다. 그들은 두 차레 주막에 들러 말을 쉬게 하고 물과 귀리도 먹였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을에는 등불이 켜졌다. 하늘에도 총총한 별들이 빛났다. 불 밝힌 집들이 드문드문 한 점 불처럼 어둠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갑자기, 언덕 너머, 전나무 가지 사이로, 커다랗고 붉은 달이 졸음에 겨운 듯 솟아 올랐다.

날씨가 아주 포근해 창문은 내린 채 두었다. 꿈꾸느라 지치고, 행복한 환상에 배불리 취한 잔느도 이젠 쉬고 있었다. (p.24-2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메밀꽃 필 무렵 - 이효석 (글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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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하게 짠 융단의 무늬는 라퐁텐의 <우화>를 그린 것이었다. (p.2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라퐁텐 우화집 - 라 퐁텐 (신은영 옮김, 미래사)

여우 이야기 - 피엘 드 생끄르 (민희식 옮김, 문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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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지막 장식 융단은 비극을 묘사하고 있었다. 여전히 풀을 뜯고 있는 토끼 옆에 누운 청년은 죽은 것처럼 보였다. 젊은 귀부인이 그 청년을 보고 칼로 자기 가슴을 찔렀고, 나무의 열매들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잔느가 이해하길 포기하려던 참에 한쪽 구석에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었는데, 토끼가 살아 있었다면 풀인 줄 알고 먹어 버렸을 만큼 작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자였다.

그제야 그녀는 그것이 피라모스와 티베스의 불행을 그린 그림임을 알아보았다. 그림이 단순해서 절로 웃음이 났지만, 그 사랑 이야기에 둘러싸여 지낼 일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 그림은 그녀의 상념에 소중한 희망을 불러일으킬 테고, 매일 밤 그녀의 꿈길에 이 전설적인 고대의 사랑을 드리울 것이다. (p.28-2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변신 이야기 - 오비디우스 (이종인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그리스,로마 신화 - 토마스 불핀치 (최혁순 옮김, 범우사)

피라모스와 티스베

세미라미스 여왕이 통치하는 바빌로니아 안에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청년은 피라모스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처녀는 티스베였다. 두 사람의 양친은 이웃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젊은이는 자주 내왕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친구관계는 마침내 연애로 발전하였다. 두 남녀는 서로 결혼하고 싶어했으나 부모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부모들도 금할 수 없었던 것이 두 남녀의 가슴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었다.

두 사람은 몸짓이나 눈짓으로 서로 속삭였고, 남몰래 속삭이는 사랑인만큼 그 불꽃은 더 강렬하게 타올랐다. 두 집 사이의 벽에는 틈이 나 있었다. 벽을 만들 때 실수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 연인들은 그 틈을 발견했다. 사랑이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겠는가! 이 틈이 두 사람의 말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 이 틈을 서로 오갔다. 피라모스는 벽 이쪽에, 그리고 티스베가 벽 저쪽에 섰을 때, 두 사람의 입김은 뒤섞였다. 그들은 말했다.

"무정한 벽이여, 왜 그대는 우리 두 사람을 떼어놓는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으리. .우리가 이렇게 사랑의 속삭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도 다 그대의 덕이니까."

이와 같은 말을 그들은 벽 양쪽에서 속삭였다. 그리고 밤이 되어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으므로, 남자는 남자 쪽 벽에다, 여자는 여자 쪽 벽에다 대고 입맞춤을 했다.

다음날 아침, 새벽의 여신 에오스(아우로라)가 밤하늘의 별을 추방하고 태양이 풀 위에 내린 이슬을 녹일 때,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무정한 운명을 한탄하던 끝에 마침내 한 계책을 꾸몄다. 다음날 밤 모든 가족들이 잠들었을 때 감시의 눈을 피해 집을 나와서 들판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을의 경계선 너머에 있는 니노스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영묘가 있는 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간 사람이 나중오는 사람을 나무 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 나무는 흰 뽕나무였고 시원한 샘 곁에 있었다. 모든 것을 합의한 후, 그들은 태양이 물 밑으로 내려가고 밤이 그 위에서 떠오르기를 고대하였다. 마침내 티스베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가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와 약속한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저녁의 어둠 속에 외로이 앉아 있으려니까 한 마리의 사자가 나타났다. 사자는 방금 무엇을 잡아먹었는지 입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물을 마시려고 샘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을 보자 티스베는 달아나 바위 틈에 몸을 숨겼다. 사자는 샘에서 물을 마신 후 다시 숲 속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키다 땅 위에 떨어져 있는 베일을 보자, 피묻은 입으로 그것을 휘둘러 찢어 버렸다.

피라모스는 늦게서야 약속한 장소로 다가갔다. 그리고 모래 땅에서 사자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시 후 그는 갈기 갈기 찢어진 피투성이 베일을 발견하였다. 그는 부르짖었다.

"오, 가엾은 티스베여. 그대가 죽은 것은 다 나 때문이다! 나보다도 더 살 가치가 있는 그대가 먼저 가다니, 나도 그대의 뒤를 따르겠다. 그대를 이런 무서운 장소에 오도록 해놓고 홀로 버려 둔 내가 잘못이다. 오라, 사자들아! 바위 속에서 기어 나오거라. 그리고 이 죄 많은 놈을 너희들의 이빨로 물어 뜯어라."

피라모스는 베일을 손에 들고 약속한 장소로 가서 무수한 입맞춤과 눈물로써 나무를 적셨다.

"나의 피로 너의 몸을 물들이리라."

그는 칼을 빼어 자기의 가슴을 찔렀다. 상처로부터 피가 샘솟듯 흘러내려 뽕나무의 하얀 열매를 붉게 물들였다. 피는 땅 위에 흘러 뿌리에 미치고 그 붉은 빛깔은 줄기를 타고 열매에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그때까지 티스베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연인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조심조심 걸어나왔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젊은이를 찾았다. 위험에서 벗어난 무서운 얘기를 빨리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장소로 왔을 때, 뽕나무의 열매 색깔이 빨갛게 변한 것을 보고는 그곳이 약속한 장소일까 하고 의심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빈사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티스베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 전율이 그녀의 몸을 스쳤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수면 위에 한바탕 바람이 지나갈 때 일어나는 물결과 흡사했다. 마침내 그 사람이 자기 연인이미을 알자, 티스베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자기 가슴을 마구 쳤다. 그리고 숨이 거의 넘어간 그를 얼싸안고 상처에 눈물을 쏟으며 싸늘한 입술에 수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오, 피라모스!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가, 말 좀 하세요. 피라모스,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은 당신의 티스베예요. 오, 제발 그 늘어진 머리를 들어 줘요!"

피라모스는 티스베라는 말을 듣고 눈을 떴으나, 이내 감아버렸다. 티스베는 피에 묻은 자기 베일과 칼이 없는 칼집을 발견했다.

"자결하셨군요. 모든 것이 제 탓이에요. 이번만은 나도 용기가 있어요. 그리고 나의 사랑도 당신의 사랑 못지 않습니다. 나도 당신의 뒤를 따르렵니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니까요. 죽음이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놓았으나, 그 죽음도 결코 내가 당신 곁으로 가는 것을 막지는 못할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한 우리들의 부모님이시여, 우리 두 사람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소서. 사랑과 죽음이 저희들을 결합시켰으니, 한 무덤에 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뽕나무야, 너는 우리들의 죽음을 기념해다오. 너의 열매로 우리들의 피를 기념해다오."

이렇게 말하면서 티스베는 칼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티스베의 양친도 딸의 소원을 받아들였고, 신들도 또한 그것을 옳다고 여겼다. 두 사람의 유해는 한 무덤에 묻혔다. 그 이후로 뽕나무는 오늘날까지 새빨간 열매를 맺게 되었다. (p.47-49)

<비교>

로미오와 줄리엣 - 셰익스피어 (도혜자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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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푀플 나무 때문에 성에도 같은 이름이 붙었다. 영지 너머엔 경작되지 않은 드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가시양골담초가 자라는 그곳엔 바람이 밤낮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었다. 얼마 더 가면 언덕은 급격히 꺽여, 백 미터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새하얀 절벽이 파도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p.31)

 

잔느는 저 멀리 물결 일렁이는 긴 해수면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별빛 아래 잠든 것처럼 보였다.

태양없는 정적 속에 대지의 온갖 향기가 널리 퍼졌다. 아래층 창문 주위로 기어오른 재스민이 연신 발산하는 짙은 숨결이 막 돋아나는 나뭇잎의 좀더 가벼운 향내와 뒤섞였다. 느린 돌풍이 지나면서 해조류의 끈끈한 땀내와 짠내가 물씬 풍기는 대기를 실어 왔다.

잔느는 숨 쉬는 행복에 빠져들었다. 전원에서 맛보는 휴식은 시원한 목욕처럼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저녁이 되면 깨어나 밤의 고요 속에 비밀스러운 존재를 감추는 온갖 짐승들이 조용한 소란으로 어슴푸레한 어둠을 채우고 있었다. 큰 새들이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얼룩처럼, 그림자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곤충들의 붕붕거림이 귓전을 스쳤다. 소리 없는 뜀박질이 인적 없는 길의 이슬 맺힌 혹은 모래 덮인 풀숲을 가로질렀다.

두꺼비 몇 마리만이 달을 향해 짧고 단조로운 울음을 구슬프게 내뺕었다.

잔느는 이 달 밝은 밤처럼 자신의 마음이 속삭임으로 가득 채워져 넓어지는 것 같았고, 밤짐승들의 떨림이 그녀를 애워쌌듯이 떠도는 온갖 욕망이 별안간 마음에 우글거리는 듯했다.

어떤 친화감이 그녀를 이 살아 있는 시(詩)와 이어주고 있었다. 밤의 말랑한 흰 빛 가운데 초인적인 전율이 질주하고, 붙들 수 없는 희망이, 행복의 숨결 같은 무엇이 펄떡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는 사랑을 꿈궜다.

 (p.32-33)

 

그녀는 그렇게 꿈을 꾸며 오래, 오래 머물렀고, 그러는 사이 달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마치고 바닷속으로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p.35)

 

잔느는 문득 주변이 환해진 걸 느꼈다.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머리를 들자 밝아 오는 새벽빛에 눈이 부셔 이내 눈을 감았다.

포플러나무 가로수길 뒤로 반쯤 가려진 채 붉게 물든 구름산이 잠에서 깨어난 대지 위로 핏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새빨간 구름을 가르고 불타는 듯한 거대한 태양이 나무며 벌판, 대양과 수평선에 불구멍을 숭숭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잔느는 행복에 겨워 미칠 것만 같았다. 만물의 광휘 앞에서 광적인 기쁨과 무한한 감동이 마음을 적셔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태양이었고, 그녀의 여명이었다. 그녀 삶의 시작이었다! 그녀 희망의 돋움이었다! 그녀는 태양을 끌어안고 싶어 눈부신 천공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이 빛의 발현처럼 신성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무력한 열광에 휩싸여 마비된 채 그대로 머물렀다. 그 순간, 그녀는 두 손을 이마로 가져가다가 자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달콤하게 울었다. (p.35-36)

 

곧 이포르 마을이 나타났다. 문간에 앉아 헌 옷을 깁고 있던 여자들이 지나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경사진 길 한가운데로 시냇물이 흘렀고, 집집마다 문 앞에 샇아 둔 쓰레기 더미에서는 강한 짠내가 풍겼다. 작은 은화처럼 반짝이는 비늘이 드문드문 붙어 있는 거무스름한 그물이 문간마다 걸쳐져 마르고 있었고, 오두막에서는 단칸방에서 우글거리는 대가족의 냄새가 났다. (p.38)

 

두 사람은 해변을 마주하고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새 날개처럼 하얀 돛단배 몇 척이 먼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왼쪽처럼 오른쪽에도 거대한 절벽이 서 있었다. 한쪽은 곶처럼 보이는 것이 눈길을 가로막았고, 다른 쪽은 해안선이 눈엥 보이지 않을때까지 무한히 길게 이어졌다.

가까이 시야가 트인 곳에는 항구와 집들이 보였다. 바다에 거품 머리를 얹은 작은 파도가 자갈밭을 구르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동글동글한 자갈 비탈 위로 올라온 마을의 작은 배들이 모로 누워 타르 바른 볼록한 뺨을 햇볕에 내민 채 쉬고 있었다. 어부 몇 사람이 저녁 조수에 맞춰 배를 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p.39)

 

큰 생선을 들고 가는 것이 힘ㅁ에 부쳐 잔느는 아버지의 지팡이를 생선 아가미에 꿰었고, 둘이서 지팡이 양쪽 끝을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얼굴 가득 바람을 맞으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며 흥겁게 언덕을 다시 올랐다. 그러는 동안 점점 팔에 힘이 빠져 넙치의 기름진 꼬리가 풀밭에 끌렸다. (p.40)

 

잔느에겐 매혹적이고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책을 읽고, 몽상에 잠기고, 혼자 주변을 떠돌아다녔다. 몽상에 정신이 판 채 느린 걸음으로 길을 따라 배회했다. 혹은 꼬불꼬불 한 작은 골짜기를 깡충깡충 뛰어 내려갔다. 양쪽 산등성이엔 가시양골담초 꽃이 수북이 피어 금빛 제의처럼 뒤덮고 있었다. 열기에 달뜬 달콤하고 짙은 꽃향기가 향기로운 와인처럼 그녀를 취기에 빠뜨렸다. 멀리 해변에서 들려오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그녀의 마음도 물결처럼 출렁였다.

간혹 나른해지면 그녀는 언덕의 무성한 풀밭에 누웠다. 때로는 골짜기를 돌아서다가 갑자기 만난 움푹 팬 깔때기 모양의 틈새로 수평선에 돛단배 한 척 떠 있는 햇빛 찬란한 푸른 바다가 보였고, 그녀는 행복이 머리 위로 신비스럽게 다가오는 양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사로 잡혔다.

이 싱그러운 고장의 감미로움 속에, 완만한 지평선의 고요 속에 잠겨 있으면 고독에 대한 사랑이 엄습해 왔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언덕 꼭대기에 오래도록 앉아 머물렀는데, 어린 야생 토끼들이 그녀 발밑을 깡충깡충 지나다녔다.

그녀는 자주 절벽으로 달려가 경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면 물 속 고기처럼 혹은 하늘을 나는 제비처럼 지칠 줄 모르고 쏘다녔고, 그윽한 쾌락에 전율했다.

그녀는 땅에 씨앗을 심듯이 가는 곳마다 추억을, 죽어도 뿌리만은 버티는 추억을 뿌리고 다녔다. 그렇게 골짜기 굽이마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수욕에 열중했다. 위험을 의식하지 않고 힘차고 대담하게 까마득히 멀리까지 헤엄쳤다. 그녀는 차갑고 투명하고 푸른 물속에서 물결에 흔들리며 실려 가는 것이 기분 좋았다. 해변에서 멀어지면 누워서 가슴 위로 팔짱을 기고, 제비나 물새 같은 희 형체가 빠르게 지나가는 하늘의 깊은 쪽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자갈에 부딪치는 파도의 아련한 속삭임과 물결에 휩쓸리는 흙이 내는, 거의 알아채기 힘든, 흐릿하고 어렴풋한 웅성거림뿐이었다. 얼마 후 잔느는 다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물살을 가르며 날카로운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이따금, 그녀가 너무 멀리까지 나아가면 배 한 척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

그녀는 허기져서 얼굴은 창백했지만 가볍고 날렵한 모습으로, 두 눈 가득 행복을,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성으로 돌아왔다. (p.41-43)

 

남작 부인은 젊은 시절에 아주 예뻤고 갈대보다 가녀렸다. 제정시대의 수많은 장교들의 품에 안겨 왈츠를 추고 나서 그녀는 <코린>을 읽고 울었다. 그 후로 이 소설은 그녀에게 각인되어 남았다. (p.4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코린나 - 이탈리야 이야기 - 마담 드 스탈 (권유현 옮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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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이 불어날수록 그녀의 영혼은 한층 더 시적인 격정으로 날아왈랐다. 비만이 그녀를 의자에 못 박자 그녀의 상념은 자신이 여주인공이라고 믿는 달콤한 모험 속을 유랑했다. 그녀에겐 특히좋아하는 모험들이 있어 늘 자기 꿈속으로 불러들였는데, 마치 태엽을 감으면 끝없이 같은 곡조를 반복하는 뮤직 박스 같았다. 포로가 된 여주인공이나 제비가 등장하는 슬픈 로맨스는 어김없이 그녀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녀는 베랑제의 일부 외설적인 노래까지 좋아했는데, 그것이 그리움을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종종 그녀는 몽상에 잠겨 몇 시간씩 꼼짝 않고 머물렀다. 푀플 성에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성이 그녀 영혼의 소설들에 배경을 제공하고, 주변의 숲과 황량한 광야가, 그리고 바다가 가깝다는 점이 그녀가 몇 달 전부터 읽고 있는 월터 스콧의 책들을 떠올리기 때문이었다. (p.46-4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웨이벌리 - 월터 스콧 (윤후남 옮김, 현대지성사)

아이반호 - 월터 스콧 (서미석 옮김, 현대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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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잔느가 로잘리를 대신해 어머니를 산책시켰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잔느는 그 오래전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유사함에 놀라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먼저 전율했다고 상상하는데, 사실 똑같은 감동이 이미 최초의 피조물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으며, 최후의 남녀들의 심장을 뛰게 할 것이다. (p.47-48)

 

두 사람은 성의 하얀 정면을 따라 느리게 걸어갔다가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한쪽은 깡마르고, 다른 한쪽은 퉁퉁하며, 버섯을 머리에 얹은 듯한 그림자 둘이, 달을 향해 걷는지 혹은 달을 등지고 걷는지에 따라 그들을 앞서거나 뒤따랐다. (p.51)

 

자작은 고개 숙여 인사하며 두 분을 오래전부터 뵙고 싶었다고 말하더니 경험 많은 신사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여자들이 꿈구고 모든 남자들이 불쾌해할 그런 행복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p.52)

 

남작 부인은 기억력을 총동원해 족보의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고 여러 가문의 선조와 후손의 관계를 복원해 냈다. (p.54)

 

연세 많은 친척들의 대화에서 어린 시절부터 듣고 기억하게 된 이름들이 등장했다. 이 대등한 가문끼리의 결혼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대단히 공적인 사건들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마치 잘 아는 사람들인 것처럼 얘기했다. 다른 고장에 사는 그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얘기할 터였다. 그렇게 그들은 단지 같은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 동등한 혈통이라는 사실만으로 멀리서 서로를 친근하게, 거의 친구처럼, 거의 우군처럼 느꼈다. (p.55)

 

배는해안에서 떨어졌다. 수평선 쪽은 하늘이 내려앉아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육지 쪽은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제발밑에 큰 그림을 드리웠고, 비탈진 풀밭이 햇살을 가득 받으며 절벽 간간이 박혀 있었다. 그 아래 뒤쪽에서 거무스레한 돛단배 몇 척이 페캉의 하얀 방파제를 빠져나오고 있었고, 얖쪽에는 동글동글하고 구멍 둟린 기묘한 형태의 바위가 긴 코를 물속에 집어넣은 거대한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에트르타의 작은 문이었따. (p.58)

 

앞쪽에 앉은 남작은 선원을 대신해 돛을 지켜보았다. 잔느와 자작은 나란히 앉았는데, 두 사람 모두 살짝 들떠 있었다. 마치 친화력이 그들에게 귀뜸이라도 하는 듯,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그들에게 동시에 눈을 들어 올리게 해 눈길이 마주치곤 했다. 남자가 추하지 않고 여자가 예쁠 때 청춘들 사이에 금세 생겨나는 미묘하고 모호한 애정이 두 사람 사이에 이미 감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곁에서 행복했다. 아마 그들이 서로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p.59)

 

태양은 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를 더 위쪽에서 응시하려는 듯 높이 떠올랐다. 그러나 바다는 교태라도 부리듯 가벼운 안개로 몸을 감싸 태양빛에 장막을 쳤다. 아주 낮게 드리운 투명한 황금빛 안개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으면서 먼 경치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태양이 불길을 내리쏟아 그 반짝이는 안개구름을 녹였다. 태양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자 안개가 걷히며 사라졌다. 그러자 얼음처럼 매끈한 바다가 빛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했다. (p.59-60)

 

해변 근처에 자리한 작은 주막에서 먹는 점심식사는 유코했다. 대양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생각을 마비시켜 묵묵하게 만들었는데, 식탁은 그들을 방학 맞은 초등학생들처럼 수다스럽게 만들었다.

아주 단순한 것들도 그들에게 한없는 유쾌함을 안겼다. (p.60-61)

 

타는 듯한 햇살이 그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길 양편으로 익은 곡식이 더위에 늘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풀잎만큼 많은 메뚜기떼가 밀밭과 호밀밭, 바다 골풀 사이에서 가녀리지만 시끄러운 울음을 울어 댔다.

찌는 듯 무더운 하늘 아래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눈부시게 푸른 하늘은 노란 빛이 감돌면서 숯불에 너무 가까이 댄 금속처럼 순식간에 붉게 변할 것 같았다.

조금 더 멀리 오른편에 작은 숲이 보이자 두 사람은 그리로 향했다.

두 비탈 사이에 낀 좁은 오솔길 하나가 햇빛도 뚫고 들어오지 못할 만큼 울창하게 자란 큰 나무들 아래로 뻗어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자 곰팡내 나는 서늘한 습기가 덮쳐 왔다. 살갗에 소름을 돋게 하고 폐부까지 파고드는 습기였다. 빛도 들지 않고 통풍이 되지 않아 풀은 없었다. 이끼가 땅을 뒤덮고 있었다. (p.62)

 

더 낮아진 태양은 마치 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넓은 띠처럼 펼쳐진 빛의 꼬리가, 눈부신 길이 대양 끝에서 배의 항적까지 물 위를 달리고 있었다.

바람의 마지막 숨결도 잦아들었다. 물결의 모든 주름이 매끈히 펴졌다. 미동조차 없는 돛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한한 고요가 공간을 마비시켜 그 원소들의 만남 주위로 정적을 낳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는 동안 괴기스러운 약혼녀 같은 바다는 하늘 밑에서 반짝이는 제 배를 동그랗게 내맨 채 자기를 향해 내려오는 불의 연인을 기다렸다. 태우려는 욕망 때문인지 붉게 물든 태양이 추락을 서둘렀다. 그가 그녀와 한 몸이 되었다. 그러더니 점차 그녀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러자 수평선에서 서늘한 기운이 달려왔다. 마치 집어삼켜진 태양이 세상을 향해 안도의 탄식이라도 내뱉은 것처럼 전율이 물의 가슴을 흔들어 주름지게 했다.

석양은 짧았다. 별이 총총한 밤이 펼쳐졌다. (p.66)

 

그는 평소와 달라 보였다. 치장 때문에 잘 알던 얼굴이 갑자기 낯설어 보이는 것이었다. (p.69)

 

신부가 뿌리고 있는 성수 몇 방울이 두 사람의 손가락에 튀었다.

끝났다. 여자들이 다시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은 꼭 피난길 같았다. 성가대 아이의 손에 들린 십자가는 위엄을 잃었다. 십자가는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리며, 때론 넘어져 코라도 깰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앞으로 기울어진 채 황급히 달아났다. 기도를 끝낸 신부도 뒤에서 바쁘게 내달렸다. 성가대원들과 관악기 연주자는 서둘러 옷을 벗으려고 골목으로 벌써 사라지고 없었고, 뱃사람들도 무리 지어 걸음을 재촉했다. 똑같은 생각이 음식 냄새처럼 머릿속을 채워 사람들의 걸음을 재촉했고, 입에 침이 고이게 햇으며, 뱃속 깊이까지 내려가 창자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게 했다.

푀플에서는 맛난 점심식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p.73-74)

 

"무엇 하나도 너한테 얘기하지 않고는 결정하고 싶지 않았어. 네 엄마와 나는 이 결혼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네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네가 그 사람보다 훨씬 부자지만 인생의 행복이 걸린 일에 돈을 생각해선 안 되지. 그 사람에겐 부모가 없어.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우리 가문에 아들 하나가 들어오는 셈이 되겠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우리 딸인 네가 다른 낯선 사람들의 집으로 가는 게 될 테고. 그 청년이 우리는 마음에 든다. 네 마음에도 드니?"

"저도 좋아요, 아빠." (p.76-77)

 

작은 체구에 거의 말이 없는 그녀는 언제나 남의 눈길을 피해서 식사 시간에만 나타났다가 곧장 방으로 다시 올라가 내내 틀어박혀 지냈다.

리종 이모는 선한 인상이지만 마흔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늙어 보였으며, 눈이 순하고 슬퍼 보였다. 그녀는 집안에서 어떤 일로도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조차 예쁘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아서 그녀를 안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구석에 조용히 얌전하게 머물렀다. 그 후로도 그녀는 늘 희생하며 살았다. 처녀가 되었어도 아무도 그녀에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그림자나 친숙한 사물처럼, 우리가 매일 보는데 익숙해져서 신경 쓰지 않는, 살아 있는 기구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언니도 친정에서 들인 습관 때문에 그녀를 없는 존재처럼,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처럼 여겼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친근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지만, 그 태도엔 멸시 어린 선의가 감춰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즈였지만, 그녀 스스로도 상큼하고 젊은 그 이름을 거북해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결혼하지 않는 걸 보고서, 아마 앞으로도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서 리즈라는 이름을 친근하게 리종으로 바꿔 불렀다. 잔느가 태어난 뒤로 그녀는 '리종 이모'가 되었다. 언니와 형부에게조차 지독히 수줍음을 타는, 말쑥하지만 하찮은 친척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무심한 애정, 무의식적인 연민, 혹은 천성적인 호의에서 비롯한 모호한 애정이었다. (p.79-80)

 

그녀는 자리를 조금도 차지하지 않았다. 가족에게조차, 마치 탐험되지 않은 땅처럼, 낯선 사람으로 남는 그런 존재였고, 그녀가 죽는다 해도 집안에 구멍이나 빈자리가 생기지 않을 그런 존재, 삶 속에도, 습관 속에도, 곁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 속에도 들어갈 줄 모르는 그런 존재 중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리종 이모"라고 말해도 이 두 마디 말은 누구의 마음에도 아무 애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커피포트나 설탕 그릇"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언제나 말없이 종종걸음으로 걸었고,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으며, 무엇에 부딪치지도 않았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속성을 사물들에게까지 전파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손은 마치 솜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큼 만지는 것을 가볍고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것이다.

리종 이모는 7월 중순쯤에 조카의 결혼에 대한 생각으로 한껏 들떠서 도착했다. 선물을 잔뜩 가져왔지만, 그녀가 가져온 선물은 거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가 온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p.81-82)

 

그달 말의 어느 저녁, 무더운 하루가 지나고 달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흔들어 감동시키고 들뜨게 해서 영혼의 은밀한 시적 정취를 한껏 일깨울 것 같은, 그런 밝고 포근한 밤이었다. (p.82)

 

결혼식을 앞둔 두 주 동안 잔느는 달콤한 감정에 지치기라도 한 듯 차분하고 조용하게 지냈다.

결정적인 날 오전에도 그녀는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다. 마치 살과 피와 뼈가 살갗 아래에서 녹아 버리기라도 한 듯 온 몸이 텅 빈 듯한 느낌만 들었다. 그리고 물건을 만질 때 자신의 손가락이 심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성가대 합창 때에야 비로소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결혼이라니! 이렇게 그녀는 결혼한 것이다! 새벽부터 연이어 벌ㅇ러진 일과 움직임과 사건이 그녀에게는 꿈처럼, 진짜 꿈처럼 여겨졌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있잖은가. 몸짓조차 새로운 의미를 띠고, 시간마저 평소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순간 말이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고, 무엇보다 놀란 상태였다. 전날만 해도 그녀 삶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삶에 대해 품어 온 변함없는 희망이 훨씬 가까워져서 거의 손에 닿을 듯했을 뿐이다. 어제는 처녀로 잠들었는데, 이제 부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꿈꿔 온 온갖 기쁨과 행복을 품은 미래를 가리고 있는 것 같던 울타리를 넘어선 것이다. 그녀 앞에 문 하나가 열린 것 같았다. 이제 기대하던 세계 속으로 들어서려는 참이었다. (p.86-87)

 

그가 잔느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고, 두 사람은 몸을 돌리다가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는데,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질 정도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파고들 듯 날카롭게 집요한 눈길 속에 두 영혼은 하나가 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에서, 눈길 너머에서, 헤아릴 길 없는  미지의 존재 속에서 서로를 찾았고, 말없이 집요한 물음 속에서 서로를 탐색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그들이 함께 시작한 삶은 어떠할까? 결혼이라는, 파기할 수 없는 이 긴 대면에서 서로에게 어떤 기쁨, 어떤 행복, 혹은 어떤 환멸을 마련해 두고 있을까? 두 사람 모두 지금껏 서로를 보지 못한 것만 같았다. (p.90)

 

"빌어먹을! 좋군요. 꼭 가마체의 혼례 같잖아요." (p.9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돈키호테 - 세르반테스 (안영옥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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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나서자마자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마른 바람이 그들을 맞았다. 어느새 가을 냄새가 묻어나는 차가운 여름 바람이었다. (p.93)

 

"얘야, 네 엄마가 해야 할 어려운 역할을 내가 해야겠구나. 네 엄마가 거부하니 내가 대신하는 수밖에 없어. 네가 살아가는 일을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특히 딸애들에게는 조심스럽게 감추는 비밀들이 있단다. 딸애들은 우리가 딸의 행복을 책임질 남자의 품에 안겨 줄 때까지 정신이 순수하게, 한 점 오점이 없도록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인생의 감미로운 비밀에 씌워진 베일을 걷는 건 그 남자의 몫이란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어떤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다면 꿈 뒤에 감춰진, 조금은 난폭한 현실 앞에서 종종 반항하곤 한단다. 영혼에 상처 입고, 몸까지 상처 입고서 법이,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이 절대적 권리로 허용하는 일을 남편에게 거부하곤 하지. 더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거라. 너는 온전히 네 남편의 소유라는 점 말이다."

그녀가 정확히 무얼 알았을까? 무얼 짐작했을까? 어떤 예감처럼 우울감이 고통스럽게 압박해 와 그녀는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p.9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말괄량이 길들이기 - 셰익스피어 (김재남 옮김, 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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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리는 손을 허둥대며 리본도 머리핀도 찾지 못하는 걸 보니 여주인보다 더 마음이 뒤숭숭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잔느에게 하녀의 눈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다른 땅으로 떠나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 속 모든 것이 전복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문득 남편이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석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발밑에 팬 구멍 속에 떨어지듯 결혼 속으로 이렇게 빨리 떨어졌을까? (p.96)

 

그는 호텔 지배인과 보이, 마차꾼, 장사꾼 들과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러다 억설로 값을 좀 깍고 나면 흡족해서 두 손을 비비며 잔느에게 말하곤 했다. "난 속는 거라면 질색이거든."

그녀는 계산서를 가져오는 것만 봐도 남편이 품목마다 따질 걸 지레 확신했기에 그 훙정이 창피해서 불안에 떨었고, 충분하지 않은 팁을 손에 쥐고서 남편을 쳐다보는 하인들의 경멸 어린 눈길 아래 머리카락까지 새빨개지는 느낌이었다. (p.110)

 

그녀는 남편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앞에서 온몸과 마음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눈을 내리깐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욕망이 지슴 같고 상스럽고 추잡하게 여겨져 마지못해, 혐오감에 사로잡히고 모욕감을 느끼며 따랐다.

그녀의 성적 감각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는데, 남편은 이제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열정을 나누는 것처럼 취급했다.

호텔 보이가 오자 쥘리앵은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청했다. 눈까지 털이 북슬북슬한 코르시카 토박이인 그 남자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저녁에 방을 준비해 두겠다고 말했다.

쥘리앵이 참지 못하고 설명했다. "아니, 당장 준비하게. 우리는 여행으로 피곤해서 쉬고 싶단 말이네."

그러자 보이의 수염 속에 미소가 플며시 피어올랐고, 잔느는 달아나고만 싶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이 다시 내려왔을 때 그녀는 사람들이 등 뒤에서 웃고 수군댈 것만 같아서 마주치는 사람들 앞을 차마 지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예민한 부끄러움과 본능적인 섬세함을 알지 못하는 쥘리앵을 마음속으로 원망했다. 그녀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장막이, 장애물이 느껴졋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이 결코 영혼까지, 생각의 깊이까지는 다가서지 못하리라는 걸, 때때로 포용을 해도 하나가 되지는 못하리라는 걸, 각자의 정신적 존재는 평생 영원히 혼자로 남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p.111-112)

<코르시카Corsica>

코르시카는 지중해에 위치한 프랑스의 섬이자 레지옹으로 중심 도시는 아작시오이며 면적은 8,680km2, 인구는 322,120명(2013년 기준)이다. 지중해에서 4번째로 큰 섬이며 프랑스 본토 남동쪽,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북쪽에 위치한다. 2개 주(오트코르스주, 코르스뒤쉬드주)를 관할한다.
코르시카는 프랑스를 구성하는 27개 레지옹 중 하나이지만 법률에 따라 "영토 집합체"(Collectivité territoriale)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다. 섬 전체가 산이어서 목축업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편이며 관광지로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마테오 팔코네 - 프로스페르 메리메 (정장진 옮김,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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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해 뜰 무렵에 출발했고, 곧 웬 숲을 마주하고 멈춰섰다. 자줏빛의 화강암 숲이었다. 뽀족한 봉우리와 기둥, 첨탑, 시간과 바람, 그리고 바다 안개가 만들어 낸 놀라운 형상들이었다.

높이가 3백 미터까지 달하는 가늘고 둥글며, 삐뚤삐뚤하고 휘어져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환상적이고 기괴한 바위들은 나무, 식물, 짐슴, 기념비, 인간, 승복 차림의 승려, 뿔 난 악마, 거대한 새, 온갖 괴물 등, 어떤 기상천회한 신의 의지가 돌로 만들어 버린 악마의 동물원 같았다.

잔느는 심장이 조여 와 말문이 막혔다. 그 아름다운 사물들을 마주하니 사랑하고픈 욕망이 엄습해 와 쥘리앵의 손을 꼭 쥐었다.

그 혼돈의 풍경에서 벗어나자 그들 눈앞에는 붉은 화강암 암벽에 둘러싸인 새로운 만이 펴쳐졌다. 파란 바다에 진홍빛 바위가 비쳤다. (...) "모르겠어요. 감동 받았어요. 너무 행복해서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려요."

그는 그렇게 들뜨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감동하고, 열광하면 마치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충격 받고, 미세한 감정에도 마음이 발칵 뒤집히고, 미칠 듯 기뻐하거나 절망하는 예민한 존재의 동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눈물이 그에겐 우스워 보여 그는 그저 험한 길에만 온통 신경을 쓰며 말했다. "당신 말이나 잘 감시하는 편이 좋겠어요.? (p.116-117)

 

그녀는 이젠 아무 할 일이, 영원히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수녀원에서 보낸 젊은 시절엔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몽상하느라 분주했다. 그 시절엔 연신 솟구치는 희망이 시간을 채워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지 못했다. 그 후 그녀의 환상이 꽃을 피웠던 엄격한 수녀원 담을 벗어나자마자 사랑에 대한 기대는 실현되었다. 꿈꾸던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갑작스러운 결단으로 성사된 혼례처럼 단 몇 주 만에 결혼까지 했다. 남자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데려가 버렸다.

그런데 이제 신혼 초의 달콤한 현실은 무한한 희망에, 매혹적인 미지의 불안에 문을 닫는 일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 기대는 끝났다.

그러니 이젠 할 일이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그녀는 어떤 환멸감을, 꿈의 소멸을 느끼고 이 모든 걸 막연히 감지했다. (p.129)

 

그녀는 일어나서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댔다. 먹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갈 마음을 먹었다.

저것이 5월과 똑같은 들판, 똑같은 풀, 똑같은 나무란 말인가? 햇빛에 반짝이던 나뭇잎들의 발랄함은 어디 있으며, 민들레가 만발하고, 개양귀비가 선혈을 흘리고, 데이지꽃이 찬란하게 빛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실 끝에 매달린 듯 환상적인 노란 나비들이 팔딱이던 초록 시는 어떻게 되었나? 생명력과 향기, 번식력 왕성한 원자들을 품은 대기의 취기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내리는 가을 소나기에 젖은 가로수길이 거의 헐벗고 떨고 있는 포플러나무들 아래 두터운 나뭇잎 양탄자를 덮고 길게 이어졌다. 가녀린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떨며 금세라도 떨어져 허공에 흩어질 것 같은 잎사귀들을 흔들었다. 울고 싶도록 구슬프게 끊임없이 내리는 비처럼, 납작한 금화처럼 노하게 변한 마지막 잎새들은 온종일 쉬지 않고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펄럭이며 허공을 맴돌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동산까지 갔다. 그곳은 죽어가는 사람의 침실처럼 참담했다. 꼬불꼬불 정겨운 오솔길 가장자리에 세워져 길을 비밀스럽게 만들던 초록 담장의 나뭇잎도 이미 떨어졌다. 섬세한 나무 레이스처럼 뒤어킨 소관목의 앙상한 가지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바람에 떨어져 군데군데 소복이 쌓인 마른 낙엽의 속삭임은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한숨처럼 들렸다.

작은 새들이 추운 듯 여린 울음을 울며 여기저기 팔딱팔딱 날아다니며 숨을 곳을 찾았다.

두터운 느릅나무 장벽이 바닷바람을 막고 보호해 주는 보리수와 플라타너스는 아직 여름 옷을 입고 있었는데, 수액의 성질에 따라 첫 추위에 물들어 하나는 붉은색 벨벳을, 다른 하나는 오렌지색 실크 옷을 걸치고 있었다.

잔느는 느린 걸음으로 쿠야르 농가를 따라 어머니의 산책로를 오갔다. 시작된 단조로운 생활의 긴 권태에 대한 예감처럼 뭔가가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얼마 후 그녀는 쥘리앵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비탈에 앉았다. 그리고 마음까지 나른해져 몽상에 잠긴 채 거의 아무 생각 없이 머물렀고, 이날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워 잠들고 싶었다.

문득, 돌풍에 실려 하늘을 나는 갈매기 한 마리가 보였다. 코르시카의 어두컴컴한 오타 계곡에서 본 독수리가 떠올랐다. 이미 끝나 버린 멋진 일에 대한 기억이 주는 마음의 동요가 강렬히 일었다. 불쑥 야생의 향내를 풍기던 눈부신 섬이 햇살에 이기어 가는 오렌지와 시트론, 분홍빛 봉우리가 우뚝 솟은 산, 쪽빛 만, 급류가 흐르는 협곡과 함께 눈앞에 떠올랐다.

쓸쓸하게 떨어지는 낙엽, 바람에 쓸려 가는 회색 구름, 자신을 둘러싼 축축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자 더없이 짙은 슬픔이 엄습해 와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일상의 우수에 길이 들어 더는 그걸 느끼지 못하는 어머니는 벽난로 앞에서 몽롱하게 졸고 있었다. 아버지와 쥘리앵은 사업 얘기도 할 겸 산책을 나갔다. 밤이 내리자 넓은 거실에 침울한 어둠이 깔렸고, 벽난로 불빛이 번득이며 어둠을 밝혔다. (p.130-132)

 

사랑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아무리 생각해도 매일같이 보던 습관을 잃고 나면 다시 만나도 공동생활의 끈이 다시 이어지기까지는 애정의 정지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p.133)

 

방으로 올라온 잔느는 자신이 좋아한다고 믿었던 동일한 장소로 돌아온 두 번의 귀환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왜 이렇게 가슴 아픈 느낌일까? 이 집, 정겨운 이 고장, 지금까지 그녀의 마음을 전율하게 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왜 이토록 울적해 보일까?

문득 그녀의 눈길이 추시계에 걸렸다. 작은 꿀벌은 언제나 진홍빛 꽃밭 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언제나 재빠르고 한결 같은 움직임으로 날았다. 그런데 갑자기 잔느는 시간을 노래하고 가슴처럼 고동치는 그 기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작은 기계 앞에서 눈물이 맺힐 정도로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녀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끌어안을 때도 이렇게 가슴 뭉클한 적은 없었다. 사람은 마음엔 어떤 추론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있다. (p.134-135)

 

하루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흘러갔다. 습한 대신 추울 뿐이었다. 그주의 다른 날들도 이 이틀과 닮았고, 그달의 모든 주가 첫 번째 주를 닮았다.

그렇지만 먼 나라에 대한 그리움은 차츰 가라앉았다. 어떤 물이 사물ㅇ레 석회질 피막을 남기듯이 습관은 그녀의 삶에 체념의 피막을 입혔다. 일상생활의 온갖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괸심이, 단순하고 시시한 규칙적인 일들에 대한 염려가 그녀 마음속에 다시 생겨났다. 명상에 젖은 우울감이, 산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환멸이 마음속에서 커져 갔다.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했을까? 무얼 갈망하는 걸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떤 세속적인 욕구도 그녀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녀는 어떤 쾌락에 대한 갈증도, 있을 법한 기쁨을 향한 어떤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 대체 어떤 기쁨이 있을까? 세월에 빛바랜 거실의 낡은 안락의자들처럼 그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조금씩 퇴색하고 지워져 흐릿하고 점차 음울한 색조를 띠었다.

쥘리양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배역을 끝낸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잔느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에게 말할 때조차 그랬다. 사랑의 흔적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그녀의 침실로 들어오는 밤은 드물었다. (p.136-137)

 

그녀도 스스로 놀랄 만한 태도로 체념하고 그 변화를 받아 들였다. 그는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다. 영혼도 마음도 그녀에게 닫혀 버린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만나서 사랑하고 애정의 격정 속에 결혼한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함께 잠을 잔 적 없는 것처럼, 거의 모르는 사람처럼 되었을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 (p.138)

 

그들은 마차를 대령하도록 하인을 부르려고 벨을 누르려 했다. 벨이 작동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재빨리 나가더니 돌아와서 말이 마구간에 매여 있다고 알렸다.

기다릴 수밖에 없어따. 저마다 할 말을 찾았따. 이번 겨울엔 비가 많이 온다고 말했다. 자느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에 몸서리치며 집주인 내외가 단둘이서 1년 내내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브리즈빌 부부는 그 질문에 의아해했다.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있는 귀족 친인척에게 편지를 많이 쓰고, 이런저런 사소한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며, 서로 낯선 사람을 대하듯 상대에게 격식을 차리며 하찮은 이들에 관해 위엄을 갖추고 얘기하느라 는 분주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지 않아 모두 덮개가 씌워진 드넓은 거실의 높고 시커먼 천장 아래 자리한 저렇게 작고 깨끗하고 단정한 남녀가 잔느에게는 귀족계급의 통조림처럼 보였따. (p.147)

 

배는 자갈밭 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아가 거품을 가르며 파도에 올라탔고, 몇 순간 기우뚱거리더니 거무죽죽한 날개를 펼치고 돛 끝에 작은 불을 단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얇은 옷 아래로 억센 골격이 드러나는 뱃사람의 아낙들은 마지막 어부가 떠날 때까지 남아 있다가 괄괄한 목소리로 어둔 거리의 무거운 잠을 깽우며 마을로 돌아갔다.

남작과 잔느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는데도 참으로 가난해서 굶어 죽지 않으려고 매일 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가는 그 사내들이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p.152-153)

 

잔느는 마음이 푸근해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들판에 흩어진 작은 불빛들이 문득 모든 존재의 고립을, 모든 것이 반목시키고, 갈라놓고,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인간의 고립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이 늘 유쾌하진 않네요."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겟니, 얘야. 우리가 어쩔 수 있겠어."

다음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떠나고, 잔느와 쥘리앵만 남았다. (p.154)

 

쥘리앵이 권위에 대한 욕구와 절약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집안 관리를 도맡았기에 그녀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는 극도로 인색하게 굴어서 팁을 주는 법이 없었고, 음ㅁ식도 꼭 필요한 것으로 제한했다. 잔느는 푀플에 온 뒤로 매일 아침  빵집에 작은 노르망디식 갈레트를 주문해 왔는데, 그는 이 지출마저 없애고 구운 빵만 먹게 했다.

그녀는 설명과 논쟁, 말다툼을 피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인색함을 드러낼 때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집안에서 자란 그녀에겐 그런 모습이 천박하고 추해 보였다. "돈이란 쓰라고 있는거야." 어머니에게 얼마나 자주 들어온 말인가. 이제 쥘리앵은 거듭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당신은 돈을 함부로 갖다 버리는 버릇 좀 버리지 못하겠소?" 임금이나 계산서에서 몇 푼을 깎을 때마다 그는 미소 짓고 주머니 속에 동전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작은 개울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지."

그럼에도 잔느가 다시 꿈을 꾸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늘어뜨린 채 몽롱한 눈길로 소녀 시절의 소설 중 하나를 다시 몽상하며 매혹적인 모험을 떠났다. 그러다 갑자기 시몽 영감에게 명령을 내리는 쥘리앵의 목소리가 몽상의 다독임에서 그녀를 끌어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이 모든 게 이젠 끝났어."라고 혼잣말을 하며 끈기를 요하는 일감을 다시 쥐었고, 바늘을 놀리는 그녀의 손가락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p.155-157)

 

잔느는 어느 날 아침 하녀를 앉힌 다음, 두 손을 잡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얘야, 모든 걸 말해 보렴."

로잘리는 떨기 시작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뭘 말이에요, 마님?"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지?"

그러자 하녀는 지독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러곤 얼굴을 가리기 위해 극구 손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잔느는 그녀를 억지로 끌어안고 위로했다. "닥친 불행인데 어쩌겠니, 안 그래? 네가 약했던 거지. 많은 사람들에게 닥치는 일이야. 아이 아버지가 너랑 결혼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너랑 같이 있도록 우리가 일을 주면 되지."

로잘리는 학대라도 당하는 것처럼 신음을 뺕었고, 자꾸만 빠져나가 달아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잔느가 다시 말했다. "네가 부끄러워하는 건 이해하겠어. 하지만 보다시피 내가 화내지 않고 조용히 묻지 않니. 남자의 이름을 묻는 건 너를 위해서야. 네가 슬퍼하는 걸 보니 그 사람이 너를 버리려는 것 같아서 내가 그걸 막아 주고 싶어. 쥘리앵이 그 사람을 찾아낼 거야. 그 사람이 너랑 결혼하게 만들 거야. 우리가 너와 그 사람을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너를 행복하게 해주게 할 거라니까."

로잘리는 이번엔 아주 거세게 힘을 줘서 여주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고, 미친 여자처럼 달아났다. (p.164-165)

 

로잘리도 곧 완전히 회복되어 덜 슬퍼 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쫓기는 듯 겁에 질려 보였다.

잔느가 다시 물으려고 했지만, 로잘리는 두 번이나 더 달아났다.

갑자기 쥘리앵도 한결 상냥해 보였다. 그래서 잔느는 막연한 희망을 붙들고 활기를 되찾았다. 이따금 묘한 불안감이 엄습해 괴로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해빙은 오지 않았지만, 벌써 5주째 낮에는 하늘이 파란 수정처럼 맑았고, 광활한 공간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붙은 밤에는 서릿발 같은 별이 총총 박힌 하늘이 굳어 반들거리는 눈밭 위로 펼쳐졌다.

네모난 마당 안에 고립된 농가들은 서리를 뒤집어쓴 키 큰 나무 커튼 뒤에서 흰 잠옷을 입고 잠든 것처럼 보였다. 사람도 짐승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가집 굴뚝만이 차가운 대기속으로 가느다란 연기를 곧게 내뿜어 꼭꼭 숨은 생명을 폭로했다.

벌판, 생울타리, 느릅나무 담장, 모든 것이 추위에 얼어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 나무에서 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마치 껍질 속에서 나무의 사지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이따금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무적의 서리가 수액을 얼어붙게 해 섬유질을 끊어 놓은 것이다.

잔느는 몸을 파고드는 막연한 고통을 혹독한 날씨 탓으로 돌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따뜻한 바람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때로 그녀는 음식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때로는 맥박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때로는 식사를 조금만 해도 체해서 속이 메슥거렸다. 곤두선 신경이 쉬지 않고 꿈틀거려 견디기 힘들 만큼 계속 들뜬 상태로 지내야 했다.

온도가 더 떨어진 어느 날 저녁, 쥘리앵은 식사를 마치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오늘 밤 둘이서 자는 게 좋겠지, 안 그래요, 여보?"

그가 예전처럼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짓자 잔느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하필 그날 저녁 그녀는 몸이 불편했고, 너무 아프고 이상할 만큼 신경이 곤두선 상태여서 그의 입술에 입 맞추며 혼자 자게 해달라고 나지막이 부탁했다. 그녀는 몇 마디로 자신의 상태를 말했다. "여보 부탁이에요. 몸이 정말 안 좋아요. 분명히 내일은 괜찮아질 거에요."

그는 고집 부리지 않았다. "당신 좋을 대로 해요. 아프면 몸을 보살펴야지."

그러곤 다른 얘기를 했다.

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쥘리앵은 예외적으로 자기 방에 불을 피우게 했다.

"불이 잘 타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아내의 이마에 입 맞추고 떠났다.

집 안 전체가 냉기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냉기가 스며든 벽이 몸서리라도 치듯 가벼운 소리를 냈다. 잔느는 침대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그녀는 두 번이나 일어나서 난로에 장작을 넣고, 드레스며 치마며 낡은 옷가지를 가져와 이불 위에 쌓았다. 아무리 그래도 몸이 덥혀지지 않았다. 발이 곱았고, 장딴지며 허벅지까지 떨려서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 뒤척이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곧 이마저 딱딱 부딪쳤고, 손이 떨려 왔다. 가슴이 조여 오고, 심장이 느리고 둔탁하게 고동치면서 이따금 멈출 것만 같았다. 목구멍은 공기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헐떡였다.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면서 무시무시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안이어서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숨ㅁ을 내쉬고 죽는구나 싶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죽는구나...난 죽어가고 있어...."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는 침대 밖으로 뛰쳐나와 로잘리를 불렀고, 기다리다가 다시 벨을 눌렀고, 얼어붙은 채 오들오들 떨며 다시 기다렸다.

하녀는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무엇으로도 깨울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잔느는 정신없이 맨발로 계단으로 갔다.

그년느 소리 없이 더듬어서 층계를 올라가 문을 찾아 열고 불렀다. "로잘리!" 계속 앞으로 나아가 침대에 부딪치자 손으로 더듬었고, 침대가 비어 있는 걸 깨달았다. 침대는 비어 있었고 아무도 누운 적 없었던 것처럼 싸늘했다.

그녀는 놀라서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런 날씨에 밖에 돌아다니는 거야!"

그런데 별안간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숨이 막혀서 그녀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다시 내려와 쥘리애을 깨우러 갔다.

곧 죽는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의식을 잃기 전에 그를 보려는 마음으로 그녀는 세차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ㄷ.

꺼져 가는 난로 불빛에 비친 남편의 머리 옆 베개에 로잘리의 머리가 보였다.

잔느가 내지른 비병 소리에 두 사람 모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그 발견에 아연실색해서 한순간 움짝달싹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달려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당황한 쥘리앵이 "잔느!"하고 불렀지만, 그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해명을 듣고, 거짓말을 듣고, 그의 눈길을 마주하려니 끔찍한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그녀는 다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이제는 어둠 속을 마구 내달렸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팔다리가 돌에 부딪쳐 부러질 위험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는 절대적 욕구에 이끌려 그녀는 앞으로 내달렸다.

아래층까지 내려오자 그녀는 계단에 앉았다. 여전히 맨발에 잠옷 차림이었다. 그녀는 넋을 놓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쥘리앵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황급히 옷을 입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그가 어느새 게단을 내려오며 외쳤다. "잔느, 내 말 좀 들어 봐!"

아니다. 그녀는 듣고 싶지 않았고, 그의 손가락 끝 하나 몸에 닿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살인자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달려서 식당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출구를, 숨을 곳을, 어두운 구석을, 그를 피할 방법을 찾았다. 식탁 밑에 웅크리고 숨었다. 그러나 그가 이미 문을 열었고, 등잔을 손에 들고 연신 불렀다. "잔느!" 그녀는 다시 토끼처럼 뛰쳐나가 부엌으로 달아났다. 쫓기는 짐승처럼 부엌을 두 번이나 돌았다. 그가 다시 따라오자 그녀는 정원 문을 벌컥 열고 들판으로 내달렸다.

이따금 무릎까지 푹푹 빠지며 맨발이 차가운 눈과 접촉하자 갑자기 그년느 필사적인 힘이 솟구쳤다.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지만 춥지 않았다. 정신의 혼란이 몸을 마비시켰는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눈밭처럼 하얀 모습으로 달렸다.

그녀는 큰 가로수길을 따라가다가 숲을 가로질렀고, 도랑을 건너 황야로 갔다.

달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하늘에 불씨를 뿌려 놓은 듯 별들만 반짝였다. 무한한 고요 속에 얼어붙은 듯 꼼짝 않는 들판이 희끄무레 빛났다.

잔느는 숨도 쉬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빨리 달렸다. 그러다 절벽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멈춰 섰고, 모든 생각과 의지를 비운 채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 앞 어두컴컴한 절벽 아래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말 없는 바다가 썰물에 드러난 해조류의 짠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몸도 마음도 무기력한 생태로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다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돛처럼 미친 듯이  떨렸다. 그녀의 팔, 손, 다리는 보이지 않는 힘에 휘둘려 들썩였고, 빠르게 펄쩍 뛰며 요동쳤다. 그러다 갑자기 칼로 찌리는 듯 명료한 의식이 돌아왔다.

곧이어 그녀 눈앞에 지난날의 환영이 지나갔다. 라스티크 영감의 배를 타고 그와 함께한 나들이, 함께 나눈 이야기, 막 생겨나던 사랑, 배의 명명식, 더 멀리 그녀가 푀플에 도착해 꿈에 부풀었던 날 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이젠! 이젠! 오! 그녀의 삶은 부서졌고, 기쁨은 끝났으며, 기대는 불가능해졌다. 고통과 배신과 절망으로 가득한 끔찍한 미래가 눈앞에 보였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바로 끝 날 테니.

멀리서 웬 목소리가 소리쳤다. "여기예요. 발자국이 있어요. 빨리, 빨리, 여기요!" 쥘리앵이 그녀를 찾고 있었다.

오!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앞 심연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였다.

그녀는 이미 몸을 던질 각오를 하고 절망한 이들의 작별 인사를 삶에 고하고 몸을 일으켰고, 죽어가는 이들의 마지막 말, 전장에서 배가 갈라진 젊은 병사들이 던지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엄마!"

불현듯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우는 모습이 보였다. 물에 빠진 자신의 시신 앞에서 무릎 꿇고 앉은 아버지도 보였다. 그들의 절망에 찬 고통이 대번에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는 눈밭에 힘없이 쓰러졌다. 쥘리앵과 시몽 영감이, 등불을 들고 뒤따라온 마리우스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뒤로 잡아 끌었을 때 더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었기에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데려다 침대에 눕히고 뜨거운 헝겊으로 몸을 문지르는 걸 느꼈다. 그 후론 모든 기억이 지워졌고, 모든 의식이 사라졌다. (p.166-173)

 

그녀는 생각만 하려 들면 무거운 졸음이 덮쳐 와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지낸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다시 떠오를 현실이 막연히 두려웠는지 무엇이건 기억해 내려 애쓰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잠에서 깼는데, 그녀 곁에 홀로 앉아 있는 쥘리앵이 보였다. 별안간 과거 삶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힌 것처럼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 순간 심장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닷히 달아나고 싶었다. 그녀는 시트를 내던지고 바닥에 뛰어내렸는데,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넘어졌다.

쥘리앵이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그가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못하도록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비틀고 굴렀다. (p.175)

 

두 사람이 침대 앞에 앉자, 잔느는 곧장 마을 시작했다. 그녀는 힘없느 목소리로, 천천히, 모든 걸 명료하게 말했다. 쥘리앵의 이상한 성격, 그의 난폭함, 인색맘, 그리고 부정不貞까지.

잔느가 말을 끝내자 남작은 딸이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알았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결하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p.178-17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안나 카레니나 - 톨스토이 (윤새라 옮김, 펭귄클래식)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오블론스키가에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남편이 프랑스인 전 가정교사와 바람을 비운 걸 알아챈 아내가 남편에게 더 이상 한 집에서 살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상황이 벌써 사흘째 계속되었고 부부는 물론 다른 식구들, 그리고 고용인들까지도 고통스러워했다. 다들 한 지붕 아래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느꼈고 함께 살아온 그들보다 여인숙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차라리 더 가깝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아내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버려진 것처럼 온 집 안을 뛰어다녔다. 영국인 가정교사는 가정부와 말다툼을 벌이고는 친구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요리사는 이미 어제, 그것도 점심시간에 집을 나갔다. 요리사 조수와 마부는 임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1권,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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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더니 극도로 흥분해서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로잘리를 만나겠어요. 그 애를 만나겠다고요!"

그러자 의사가 그녀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정하세요, 부인.. 흥분하시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부인께선 지금 임신 중이에요."

그녀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고, 그 순간 몸 안에서 뭔가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곧 그녀는 입을 다물고 사람들이 하는 말조차 듣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기 뱃속에 아이가 살고 있다는 그 새롭고 기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그 아이가 쥘리앵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슬프고 괴로웠다. 그 아이가 아버지를 닮았을까봐 불안하고 겁이 났다. 날이 밝자 그녀는 남작을 불렀다. "아버지, 저는 결심했어요. 저는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지금 당장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제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제 뜻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 아시지요. 그러나 제 말 잘 들으세요. 가셔서 신부님을 불러오세요. 로잘리가 거짓말을 못하도록 신부님이 필요해요. 그런 다음 신부님이 오시면 로잘리를 올려 보내세요.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여기 계세요. .무엇보다 쥘리앵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하세요." (p.180-181)

 

기진맥진한 잔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자기 하녀의 아이와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같다니! 화조차 나지 않았다. 음울하고, 느리고, 깊고, 무한한 절망이 온몸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p.185)

 

그는 여전히 격분해서 방 안을 오가며 말했다. "내 딸을 그렇게 속이다니 파렴치해요. 파렴치해! 저놈은 비열하고 천박하고 역겨운 인간이에요. 그자에게 이 말을 하고 따귀르르 때리고 지팡이로 쳐 죽이고 말겠어요!"

그러나 울고 있는 남작 부인 곁에서 천천히 코담배를 흡입하고 있던 신부는 진정시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궁리를 하며 다시 말했다. "남작님,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그자도 다른 사람처럼 한 겁니다. 정조를 지키는 남편을 남작님은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그러더니 장난기 어린 순박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보십시오. 남작님께서도 짖궂은 짓 하신 적 있으시죠.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해보세요. 사실 아닙니까? 남작은 머쓱해서 신부 앞에 멈춰 섰다. 신부가 말을 이었다. "보세요, 남작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한 겁니다. 남작님께서도 저 애처럼 어린 하녀를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모두가 그러고 있지요. 그렇다고 남작님의 부인께서 남들보다 덜 행복하지도 않았고, 덜 사랑받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작은 당황해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이었따. 그도 그랬다. 그것도 자주 그랬고, 그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부부가 사는 지붕 아래서도 그랬다. 예쁘기만 하면 아내의 하녀들 앞에서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비열한 인간이었던가? 자신의 행실은 범죄라고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 없으면서 왜 쥘리앵의 행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하게 판단했을까?

여전히 흐느낌으로 숨을 헐떡이던 남작 부인은 남편의 탈선을 떠올리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연애사건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며, 감상적이고 쉽게 감동하고 너그러운 그런 부류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p.187-188)

 

로잘리가 한 말이 다시 떠올라 영혼을 할퀴고 송곳처럼 심장에 박혔다. '저는 그분이 신사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 역시 그를 신사라고 생각했었다. 바로 그래서 자기 몸을 내주며 일생을 걸었고, 다른 모든 희망을, 어렴풋이 예감한 모든 계획을, 미지의 미래를 포기했다. 그녀도 로잘리처럼 그를 신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디고 올라설 발판도 없는 심연 같은 이 결혼 속에, 이 비참함, 이 슬픔, 이 절망 속에 떨어진 것이다! (p.188-189)

 

잔느는 악문 이 사이로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으며 끊임없이 로잘리를 생각했다. 로잘리는 전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거의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으며, 사생아인 그 아이는 고통도 고문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그녀는 혼란스럽고 참담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과 하녀를 비교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공정하다고 믿었던 신을 저주했다. 운명의 온당치 못한 편애에, 정직과 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악한 거짓말에 분개했다.

이따금 통증이 너무 격렬해지면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기운과 생명과 지식이 오직 고통을 느끼는 데 쓰였다.

통증이 좀 가라앉는 순간이면 그녀는 쥘리앵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녀가 바로 같은 침대 발치에서 다리 사이로 아이를,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을 내장을 찢고 있는 어린 존재의 형제가 되는 아이를 떨어뜨렸던 날을 떠올리자 다른 통증이, 영혼의 고통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쓰러진 하녀 앞에서 남편이 보인 행동을, 던진 눈길을, 했던 말을 그림자 한 점 없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이 그의 몸짓에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행동에서 하녀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권태를, 똑같은 무관심을 읽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성가신 이기적인 남자의 똑같은 무심함이었다. (p.199-200)

 

그녀 내면에서 새로운 행복을 향한 충동이 막 깨어났고, 기쁨이 온몸을 훑고 지났다. 순식간에 그녀는 해방되고, 진정되고, 행복했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마음과 육신이 되살아났고, 그녀는 어머니가 된 느낌이 들었다! (p.201)

 

이제 그녀에겐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 아이, 돌연 그녀는 사랑에 실망하고 희망에 배신당한 만큼 열성적이고 극성스러운 어머니가 되었다. 아기 요람은 항상 그녀의 침대 옆에 있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창을 등지고 아이 요람 곁에 앉아 요람을 흔들며 온종일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녀는 유모를 질투했다. (p.201-202)

 

9월 초에 리종 이모가 소리도 없이 떠났다. 그녀의 부재는 그녀의 존재만큼이나 눈에 띄지 않았다. (p.203)

 

웃음이 족므 가라앉자 잔느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상해요. 그런 말을 들어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는 그 사람이 낯선 사람처럼 보여요. 제가 그 사람 아내라는 걸 믿지 못하겠어요. 보시다시피 그 사람의....상스러운 태도를 보고 재밌어하잖아요." (p.207)

 

쥘리앵이 격분해서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장인 장모의 푀플 체류가 단축되었다. 잔느는 부모가 다시 떠나는 걸 보면서 그리 깊이 슬퍼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폴이 마르지 않는 행복의 원천인 것이다. (p.212)

 

검푸른 빛을 띠는 녹음 때문에 연못은 깊고, 근엄하고, 음산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면 나무숲이 내는 신음 소리가 늪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p.215)

 

기분이 좋아진 백작이 운동선수 같은 팔로 아내를 안고 아이처럼 들어 올리더니 양 볼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이 콧수염만 보고 식인귀 같다고 말하는 그 선량한 거인을 잔느는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모든 사람에 대해 얼마나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 몰라. (p.217)

 

한 해 밑바닥의 어두운 구멍 같은 검은 달 12월이 천천히 흘러갔다. 지난해처럼 유폐된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잔느는 늘 폴에 몸두하느라 조금도 지루할 줄 몰랐다. 쥘리앵은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흘겨보았다.

잔느는 폴을 품에 안고 자식들을 향한 여자들 특유의 광적인 애정을 쏟으며 쓰다듬고,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여 주며 종종 말했다. "안아 봐요. 당신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나 봐요." 그는 싫은 표정을 짓고 주먹 쥔 채 꼬물거리는 작은 손에 닿지 않으려는 듯 온몸을 동그랗게 휘고 입술 끝으로 아이의 매끈한 이마를 살짝 스쳤다. 그러곤 불쑥 가버렸다. 마치 형오감에 쫓기는 겉 같았다. (p.220-221)

 

봄이 유난히 빨리 찾아와서 날이 따뜻했다.

온화한 아침부터 고요하고 포근한 저녁까지 태양이 온 대지를 비춰 싹을 틔웠다. 온갖 싹이 동시에 갑자기 힘차게 움텄고, 수액이 억누를 길 없이 분출해서 자연이 이 특혜 받은 시기에 종종 보여 주는 재생의 뜨거운 열정으로 마치 세상이 다시 젊어지는 것 같았다.

잔느도 이 생명의 술렁임에 막연히 동요되었다. 풀숲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보면 갑작스레 나른해졌고, 달콤한 우수에 빠져 몽상하며 무기력하게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랑이 처음 시작되던 때의 감동 어린 추억도 떠올랐다. 쥘리앵에 대한 새삼스러운 애정이 다시 찾아와서가 아니었다. 그 애정은 끝났다. 영원히 끝났다. 그런데 봄바람이 스치고, 봄 향기가 스며들자 그녀의 온몸이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다정한 부름을 받은 듯 술렁였다.

그녀는 홀로 햇살을 만끽하는 게 좋았고, 막연하고 평온한 감각과 즐거움이 몸을 훑고 지나도 아무 상념이 일지 않는 것이 좋았다. (p.225-226)

 

풀 한포기,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그런 고요한 날이었다. 바람이 죽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미동조차 없을 것만 같았다. 곤충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태양으로부터 당당하고 뜨거운 고요가 황금 분무처럼 서서히 내려왔다. 잔느는 조랑말의 걸음에 흔들리며 기분 좋게 나아갔다. 이따금 눈을 들어 하얀 조각구름을 바라보았다. 목화솜 같은 수증기 뭉치가 잊힌 듯 저 높이 파란 하늘 한가운데 홀로 떠 있었다. (p.226-227)

 

처음의 흥분 상태가 가라앉자 그녀의 마음은 다시 거의 평정을 되찾았다. 질투심도 증오심도 없이 경멸감만 들었다. 그녀는 쥘리앵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었다. 친구인 줄 알았던 백작 부인의 이중적 배신에는 화가 났다. 모든 사람이 신의 없고, 거짓말쟁이요, 위선적이란 말인가. 눈물이 흘렀다. 인간은 죽은 이들 때문에도 울지만 때론 착각 때문에도 그만큼 슬프게 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기로, 통상적인 애정에는 마음을 닫기로, 오직 폴과 부모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타인들을 견기디로 결심했다. (p.229)

 

이제 그녀는 자신의 양심이 그 모든 꺼져 가는 양심들에 둘러싸인 채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갑자기 속마음을 감추는 법을 터득해서, 백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고 미소 지으며 맞이해도, 인간에 대한 경멸과 공허감이 점점 커져서 자신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매일 들려오는 그 고장의 자잘한 소식들은 그녀의 마음에 커져 가는 혐오감을, 인간에 대한 지독한 경멸감을 불러일으켰다. (p.230)

 

이 뜨거운 봄은 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수액도 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감각이 꺼져 버린 잔느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고, 상처 입은 그녀의 마음, 감상적인 영혼만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봄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욕정 없이 들뜨고, 꿈에는 열정적이지만 육체적 욕구에는 죽어 버린 그녀의 마음은 증오심 어린 혐오감에 가득 차서 그 추잡한 동물성에 질겁했다.

생명체의 교접은 자연에 반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그녀를 분노에 빠뜨렸다. 그녀가 질베르트를 원망하는 건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취해서가 아니라 그 보편적인 진창에 빠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저급한 본능이 지배하는 천박한 족속에 속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천박한 무리들과 똑같은 식으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p.23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로렌스의 성과 사랑 - D.H.로렌스 (정승호 옮김, 범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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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젠 거의 웃지 않았는데, 지난해에 온몸이 흔드릴 정도로 웃었던 일들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러나 시력은 여전히 좋아서 라마르틴의 <명상시집>이나 <코린>을 다시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추억'서랍을 가져다 달라고 청했다. 그러곤 감미로운 옛 편지들을 무릎에 쏟아 놓고 서랍을 옆 의자에 올려놓은 뒤, 자신의 유물을 하나씩 천천히 다시 읽고는 옆 의자에 올려놓은 뒤, 자신의 유물을 하나씩 천천히 다시 읽고는 서랍에 담았다. 혼자 있을 때는 사랑했던 고인의 머리카락에 남몰래 입 맟주듯이 몇몇 편지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이따금 잔느는 불쑥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가 울고 있는, 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잇는 어머니를 보곤 했다. 그녀는 외쳤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그러면 남작 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내 유물이 날 이렇게 만드는구나. 이제는 끝나 버린, 참으로 좋았던 일들이 떠올라! 게다가 거의 생각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지. 그 사람들이 눈앞에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러면 마음이 정말 아프구나.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렇게 우수에 젖은 순간에 들이닥친 남작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잔느, 내 딸아. 내 말 들어. 네가 가진 편지들을 모두 태워 버리거라. 네 어머니 편지든 내 편지든 몽땅. 늙어서 자신의 젊은 시절에 코를 박고 지내는 것보다 더끔찍한 일이 없어." 그러나 잔느도 자기 편지를 간직했고, 자신만의 '유물함'을 준비해 뒀다. 그녀는 어머니와 모든 점에서 달랐지만, 몽상적인 감상만은 유전적 본능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p.234-23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비밀의 화원 -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곽명단 옮김,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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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잔느는 폴을 품에 안고 들판으로 나갔다. 그녀는 길을 따라가며 때로는 아들을 바라보고, 때로는 꽃이 지천으로 널린 풀밭을 바라보며 무한한 행복을 느끼고 감동했다. 이따금 그녀는 아이에게 입 맟추고 열정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러다 들판의 어떤 향긋한 향기가 스치면 무한한 평온 속에 정신을 잃은 듯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들을 위한 미래를 꿈꿨다. 아이는 무엇이 될까? 아이가 저명하고 권세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으면 싶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헌신적이고 다정해서 엄마를 향해 언제나 두 팔을 벌리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그녀 곁에 머물렀으면 싶었다. 어머니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아들을 사랑할 때는 그 아이가 그저 자기 아들이기만을 바랐다. 그러자 열정적인 이성으로 아이를 사랑할 때는 아들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물이 되었으면 하는 야심을 품었다. (p.236)

 

그녀는 침대 옆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축 늘어진 차가운 손을 잡고, 어머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머니는 쓰러지던 순간보다 부기가 빠져 있었다. 이제는 그 어는 때보다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보였다. 촛불의 창백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려 그녀 얼굴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자꾸 일렁이는 바람에 꼭 그녀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잔느는 탐욕스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의 머나먼 시간의 바닥에서 기억이 무더기로 달려 나왔다.

그녀는 수녀원의 면회실로 찾아온 어머니의 방문을 떠올렸다. 케이크가 가득 든 종이 가방을 내밀던 모습, 수많은 사소한 사실과 자질구레한 일들, 소박한 애정 표현, 말, 억양, 친근한 몸짓, 웃을 때 생기는 눈가 주름, 자리에 앉으면서 크게 내쉬던 숨찬 한숨 등을 떠올렸다.

그녀는 망연자실 응시하며 거듭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겼어." 그 말이 주는 공포가 고스란히 다가왔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 엄마, 아델라이드 부인이 정말 죽었단 말인가? 어머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아버지와 마주 앉아 저녁식사도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안녕, 자네트'라는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는 돌아가셨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관에 가두고 땅에 묻을 테고, 그러면 완전히 끝날 것이다. 더는 어머니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어떻게? 그녀에겐 이제 엄마가 없다? 눈만 뜨면 보였던 그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얼굴, 팔만 벌리면 사랑해 주었던 그 큰 애정의 배출구, 하나뿐인 존재, 모든 존재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어머니가 사라졌다. 어머니의 얼굴을, 움직임도 생각도 없는 저 얼굴을 바라볼 시간도 이제 몇 시간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면 추억 하나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절망이 엄습해 와 그녀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두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고 비틀었으며, 입을 침대에 댄 채 찢어지는 목소리를 시트와 이불로 틀어막으며 외쳤다. "오! 엄마, 가련한 엄마, 엄마!" (p.242-244)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로잘리, 질베르트 등, 씁쓸한 환멸을 안겨 준 그녀 삶의 기억들이었다. 모든 것이 비참하고, 슬픔이며, 불행이고, 죽음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배신하고, 속이고, 고통과 눈물을 안겼다. 어디서 조금이나마 안식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다른 생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지상의 시련에서 영혼이 해방될 때나 가능할 것이다. 영혼이라! 그녀는 그 헤아릴 길 없는 신비에 관해 몽상했고, 별안간 시적 믿음에 빠져들었는데, 그것만큼이나 모호한 다른 가설들이 즉각 뒤엎어 버릴 믿음이었다. 이제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저 꼼짝없이 식어 버린 몸의 영혼은? 어쩌면 아주 멀리 있을지 모른다. 우주 어딘가에? 대체 어디에? 우리에게서 달아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새처럼 증발해 버린 걸까?

신에게 불려갔을까? 아니면 막 움트는 씨앗에 뒤섞여 우엲에 따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흩어졌을까?

어쩌면 아직 아주 가까이 있는지도? 이 방 안에. 버리고 떠난 이 생명 없는 육신 주변에! 불현듯 잔느는 어떤 혼령이 닿는 것처럼 숨결 같은 것이 스치는 듯 느껴졋다. 그래서 무서웠다. 너무도 끔찍이 무서워서 감히 움직일 엄두도 못 내고, 숨 쉬지도 못하고, 고개 돌려 뒤쪽을 보지도 못했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p.245-246)

 

그녀는 그런 자질구레한 사실들에 감동했고, 그런 일들이 그녀에겐 새로운 발견처럼 보였다. 마치 그녀가 불현듯 어머니의 마음속 삶, 비밀스러운 과거의 삶 속으로 뛰어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누워 있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큰 목소리로, 죽은 이를 위해, 죽은 어머니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꼼짝 않는 시신도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편지를 하나씩 침대 발치에 던지면서 관에 꽃을 넣듯이 그 모든 편지를 관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p.24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비밀의 화원 -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공경희 옮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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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예견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임신했다. 

그러자 그녀는 미칠 듯 기뻐하며 매일 저녁 방문을 잠그고, 경회하는 막연한 신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영원한 정절을 맹세했다.

이제 그녀는 다시 행복다하고 느꼈고,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고통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에 놀랐다. 위로받을 길 없는 슬픔이라고 생각햇는데 그 생생한 상처가 겨우 두 달 만에 아물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그녀의 인생에 슬픔의 장막처럼 드리운 아련한 우수뿐이었다. 앞으로는 어떤 사건도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랄 테고,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기쁜 마음으로 늙어갈 것이다. (p.265)

 

봄이 왔고, 그들의 사랑도 되살아나서 두 사람은 때로는 여기서, 때로는 저기서, 산책이 이끄는 모든 신처 아래에서 매일같이 서로의 품에 안겼다. 

나뭇잎들이 아직 여리고 풀이 축축해서 한여름처럼 숲속 잡목림 깊이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대개 그들은 자신들의 포옹을 숨기기 위해 지난가을부터 보코트 언덕 꼭대기에 방치되어 있는 목동의 이동식 오두막을 이용했다.

그 바퀴 달린 오두막은 절벽에서 5백 미터 떨어진 곳, 계곡의 가파른 내리막이 막 시작되는 지점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들판을내려다볼 수 있었기에 갑자기 들킬 일이 없었다.말들은 끌채에 매인 채 그들이 정사에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 (p.281-282)

 

그는 오른쪽으로 돌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바다에서 파도가 몰아쳤다. 시커먼 먹구름이 미친 듯한 속도로 몰려왔다가 지나갔고, 또 다른 구름이 몰려왔다. 구름이 올 때마다 언덕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구슬프게 신음했고, 풀은 뽑았고, 어린 수확물을 쓰러뜨렸으며, 크고 흰 새들을 마치 거품인 양 멀리 실어가 땅에 내동댕이쳤다.

우박 섞인 소나기가 백작의 얼굴을 후려쳤고, 뺨과 콧수염을 흠뻑 적셨으며, 요란한 소리로 귓속을 채워 심장을 펄떡이게 했다.

저 아래, 그의 앞에, 보코트 골짜기가 깊은 협곡을 드러냈다. 거기까지는 양 없는 목초지에 목동의 오두막 하나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 두 마리가 바퀴 달린 이동식 오두막의 뜰채에 매어져 있었다....이런 날씨에 그들이 무얼 겁냈겠는가?

말을 보자 백작은 땅에 엎드렸다. 그러곤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갔는데, 진흙투성이가 된 거구가 짐승 털ㅇ리 달린 모자까지 썼으니, 그야 말로 괴물 같았다. 그는 외딴 오두막까지 기어가서 나무판자 틈새로 발각되지 않으려고 오두막 밑에 숨었다.

말들이 그를 보고 동요했다. 그는 손에 빼들고 있던 칼로 말의 고삐를 천천히 잘랐다. 그때 돌풍이 불어와 목재 오두막의 기울어진 지붕을 때려 바퀴 달린 오두막을 흔들자 말들은 질겁해서 달아놨다.

그러자 백작은 일어나서 눈을 문 밑에 갖다 대고 안을 살폈다.

그러곤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같았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흙투성이가 된 그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밖에서 빗장을 질렀고, 끌채를 쥐고 오두막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 집을 산산조각 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별안간 끌채를 둘러메고 큰 키를 굽히더니 혼신의 힘을 다해 헐떡이며 소처럼 오두막을 끌었다. 그는 이동식 오두막과 그 안에 든 사람들을 가파른 비탈 쪽으로 끌었다.

오두막 안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모른 채 주먹으로 벽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비탈 꼭대기에 이르자 그는 그 가벼운 오두막을 내려놓았고, 오두막은 가파른 비탈로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두막은 미친 듯이 속도가 붙어 점점 더 빨리 떨어지면서 끌채로 바닥을 치고 짐승처럼 솟구쳤다가 비틀거리며 굴러갔다.

도랑에 웅크리고 있던 웬 늙은 걸인이 그것이 자기 머리 위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무 오두막  속에서 내지른 끔찍한 비명 소리도 들렀다.

갑자기 충격으로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가자 오두막은 옆으로 쓰러지더니 다시 공처럼 굴러 내려걌다. 마치 집 한 채가 뿌리 뽑혀 산꼭대기에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두막은 마지막 협곡 끄트러밀에 이르러 곡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지면서 계란처럼 터졌다. (p.284-286)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한 거야. (p.287)

 

그녀는 쥘리앵의 죽음에 관해 자세한 얘기를 결코 묻지 않았다. 뭐가 중요하겠는가? 충분히 알지 않는가? 모두가 사고라고 믿었지만 그년느 속지 않았다. 그녀는 그 비밀을 마음에 묻어 두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백작이 불륜 사실을 알고 무섭게 화가 나서 갑자기 찾아왔고, 그날 참사가 일어났다.

이제 그녀의 마음엔 남편이 오래전에 안겨 준 짧은 사랑의 기쁨, 다정하고 감미롭고 우수에 찬 기억들만 스며들었다. 그녀는 예기치 않게 남편에 대한 기억이 깨어나 순간순간 소스라치며 놀랐다. 남편은 다시 약혼 시절의 모습으로, 그리고 코르시카의 뜨거운 태양 아래 깨어난 열정의 시기, 그녀에겐 유일했던 열정의 시기에 사랑했던 모습으로 떠올랐다. 모든 결점은 축소되었고, 거친 모습은 사라졌으며, 닫힌 무덤이 차츰 멀어지면서 부정해위들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이 남자가 죽고 나서야 그에 대해 막연하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 잔느는 행복한 순간만 생각하기 위해 겪었던 고통은 용서했다. 게다가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한 달 한 달 쌓여 가는 세월은 켜켜이 쌓이는 먼지처럼 그녀의 모든 기억과 고통을 망각의 먼지로 덮었다. 그녀는 아들에만 온전ㄴ히 몰두했다. (p.292)

 

아이는 열 살이 되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마흔은 된 것 같아보였다. 아이는 튼튼하고, 소란스럽고, 나무에 오를 만큼 대담했지만, 아는 건 별루 없었다. 공부를 지겨워해서 조금 하다가 말곤 했다. 남작이 아이를 조금 오랫동안 책 앞에 붙들어 두려 할 때마다 잔느가 와서 말했다. "이제 그만 놀게 해주세요. 아직 어린데 지치게 하면 안 되죠." 그녀에게 아이는 언제나 6개월이나 한 살 쯤 된 아기였다. 그녀는 아이가 걷고, 달리고, 작은 어른처럼 말한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가 넘어지지 않을까, 추비 않을까, 움직이느라 덥지 않을까, 너무 먹어서 위에 탈이 나는 건 아닐까, 혹은 너무 적게 먹어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건 아닐까 끊임없이 걱정하며 살ㅇ랐다. (p.297-298)

 

"사회는 두 계급으로 나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지요. 믿는 사람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들일지라도 우리의 친구이고 동등한 사람이죠. 믿지 않는 사람은 우리에겐 아무 존재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당에 다니지 않고도 하느님을 믿을 수 있지 않나요?"

"아뇨, 부인. 신도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성당을 찾이요. 사람을 만나려면 그 사람의 집으로 찾아가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세요, 부인. 마음 깊이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믿는 저는 어떤 사제들이 하느님과 저 사이에 끼어들 때 더는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제는 교회의 깃발을 드는 기수입니, 부인. 깃발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제와 맞서는 자요, 우리와 맞서는 자입니다."

"부인께서는 한 파벌의 신을 믿으시는군요. 저는 정직한 사람들의 신을 믿습니다."

농부들도 저들끼리 있을 때는풀레에게 첫 영성체를 받게 하지 않은 걸 두고 잔느를 비난했다. 그들 역시 미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성체도 받지 않았으며, 교회의 형식적 규정에 따라 부활절에만 성사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들에 괜해서는 달랐다. 이 공통된 법 밖에 아이를 기르는 대담함을 보고 모두가 뒷걸음질을 쳤다. 종교는 종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지탄을 잘 느꼈고, 마음속으로 그 모든 타협에, 양심의 절충에, 모든 걸 겁내는 그 보편적 두려움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잠자고 있다가 드러날 때는 온갖 근사한 가면으로 치장하는 크다큰 비겁함에 분개했다. (p.300-301)

 

풀레는 자라서 열다섯 살이 되었다. 거실의 눈금은 158센티미터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는 두 여자의 치마폭과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 사이에서 억눌려 자라서 무지하고 미련했으며,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p.302)

 

어느 날 저녁 마침내 남작이 학교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저 애가 많은 걸 알 필요가 뭐 있어요. 저 애를 시골 사람으로, 시골 신사로 키워요. 다른 많은 귀족들처럼 자기 땅을 가꾸고 살면 되죠.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고 죽게 될 이 집에서 살면서 행복하게 늙으면 되지요. 그 이상 바랄게 뭐 있어요?"

그러나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스물다섯 살이 되어 네게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 거냐? 저는 어머니의 잘못으로, 어머니의 이기적인 모성애 때문에 아무것도 못 되었고,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일할 능력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될 수도 없어요.. 제가 어둡고 비천하고 죽도록 슬픈 삶을 살도록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애정이 내게 이런 삶을 살게 만든 겁니다." (p.302-303)

 

남작은 큰 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잔느, 아이의 인생을 네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네겐 없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범죄나 다름없는 비겁한 짓이야. 그건 네 아이를 네 개인의 행복에 희생시키는 거라고." (p.303-304)

 

그녀는 아이보다 더 애타게 방학을 기다렸다.

점점 커져 가는 불안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공허감에 빠져 몽상하며 개 마사크르만 데리고 홀로 며칠 동안 주변을 배회하고 다녔다. 때때로 오후 내내 절벽 꼭대기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때로는 숲을 가로질러 이포르까지 내려가서 추억을 좇아 옛 산책을 다시 하곤 했다. 처녀 시절 꿈에 취해 그곳을 거닐던 때가 참으로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들을 다시 볼 때마다 마치 10년 동안 아들과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아들은 나날이 어른이 되어 갔다. 그녀는 나날이 늙어 갔다. 아버지는 그녀의 오빠 같았고, 리종 이모는 스물다섯 살에 시든 그대로 더 이상 늙지 않아서 그녀의 언니처럼 보였다. (p.307)

 

잔느가 보기에 아들은 어딘지 모르게 변한 것 같았다. 활기차 보였고, 훨씬 남자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은 아주 당연한 일인 양 불쑥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오늘 오셨으니까 다음 일요일에는 푀플로 가지 않을게요. 또 파티를 할 거예요."

그녀는 그가 신대륙으로 떠난다고 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충격받고 숨이 막혔따. 마침내 말문이 트이자 그녀가 말했다. "오! 얘야, 무슨 일이냐? 나한테 얘기해 봐. 무슨 일이야?" 아들은 웃으며 엄마를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친구들과 좀 즐길 거예요. 그럴 나이잖아요."

그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마차에 올라 혼자 있게 되자 이상한 생각이 마구 몰려왔다. 그녀는 아들 풀레를, 옛날의 어린 풀레를 이제 알아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녀는 아들이 다 컸으며, 이젠 그녀의 소유가 아니고, 노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 눈에는 아들이 하루아침에 변한 것처럼 보였따. 어떻게! 자기 의지를 주장하는 저수념 난 건장한 청년이 자신ㅇ늬 아들이라니, 옛날에 상추를 함께 심던 그 꼬마 아이라니! (p.309-310)

 

 

이튿날 그들은 도시의 어느 창녀 집에서 아들을 만났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를 푀플로 데려왔고, 오는 길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잔느는 얼굴을 손수건에 묻고 울었다. 폴은 무심한 표정으로 들판만 바라보았다. (p.312)

 

아들이 편지를 썼다! 엄마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돈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돈이 없다니 돈을 보내 줄 것이다. 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엄마에게 편지를 썼지 않나! (p.315)

 

"편지를 썼으니 돌아올 겁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조금 더 침착한 남작이 말했따. "마찬가지야. 그 애는 그 여자를 위해 우리 곁을 떠났어. 그러니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하는 거야. 망설이지도 않았으니까."

극심한 통증이 갑자기 잔느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들을 훔쳐 간 그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 그녀 마음속에서 즉각 타올랐다. 가라앉힐 길 없는 야만적인 증오, 질투하는 어머니의 증오였다. 그때까지 그녀의 모든 생각은 폴을 향했다. 웬 뻔뻔한 여자가 아들이 일탈한 원인이었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남작의 생각이 그 경쟁자를 환기했고, 그 여자의 치명적인 힘을 드러내 주었다. 그녀는 그 여자와 자신 사이에 거센 싸움이 시작되었으며, 아들을 다른 여자와 공유하느니 차라리 아들을 잃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다.

그들은 만5천 프랑을 보냈고, 다섯 달 동안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p.316)

 

잔느가 다시 말했다. "촛불을 켜 봐. 네 얼굴을 좀 보게." 침대 옆 탁자로 불을 가져오자 두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오래토록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 잔느가 손을 엣 하녀에게 내밀며 웅얼거렸다. "너를 도저히 못 알아봤을 거야. 많이 변했어. 그렇지만 나만큼 변한 건 아냐."

그러자 로잘리는 자신이 떠날 때만 해도 젊고 아름답고 생생했는데 잊 깡마르고 시들어 버린 백발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잔느 마님,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너무 많이 변하셨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 못 본 지가 24년이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두 여자는 입을 다물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잔느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적어도 넌 행복했겠지?"

로잘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될까 두려워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네...네...마님. 크게 불평할 정도는 아닙니다. 마님보다 행복했던 건...확실해요. 제 마음을 늘 괴롭힌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건 이곳에 남아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이 말을 하고 그녀는 불쑥 입을 다물었따. 미처 생각없이 그 일을 건드렸다 싶어 흠칫했던 것이다. 그러나 잔느는 다정하게 말했다. "어저겠니, 얘야.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늘 하고 사는 건 아니잖니. 너도 혼자가 된 거지?" 그러곤 문득 불안감에 사로잡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 다른 아이도...있어?"

"아뇨, 마님."

"그럼, 그 아이.... 네 아들은 어떻게 되었어? 그 애를 대견하게 생각해?"

"네, 마님. 열심히 일하는 착한 아이예요. 6개월 전에 결혼했는데, 제가 이렇게 마님 곁에 돌아왔으니 농장은 그 애가 맡을 겁니다."

잔느는 감격해서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넌 이제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로잘리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마님.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걸 다 정리해 두었어요."

두 여자는 얼마간 말이 없었다.

잔느는 자신도 모르게 둘의 삶을 비교해 보았으나, 이제는 운명의 불공평한 잔인함에 체념한 터라 씁쓸한 마음은 없었다. (p.323-324)

 

"웃을 일이 아닙니다, 마님. 돈이 없으면 천한 평민이 되는 거예요."

잔느가 로잘리의 두 손을 잡더니 꼭 쥐었다. 그러곤 자신을 강박적으로 사로잡고 있던 생각이 여전히 쫓기며 천천히 말했다. "오! 나는 운이 나빴어. 모든 불행이 내계 쏟아졌지. 운명이 평생 악착스레 나를 따라다녔어."

그러나 로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셍, 마님. 그렇게 말해선 안 되죠. 결혼을 잘못 하신 겁니다. 그뿐이에요. 그런 식으로, 약혼자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결혼하면 안 되지요."

두 여자는 오래된 친구처럼 신세타령을 이어갔다. (p.32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윤지관, 전승희 옮김, 민음사 세게문학)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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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잔느는 발작하듯 지독한 절망에 사로잡혀 성의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며 양탄자의 크고 휜 새들, 낡은 촛대들이며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을, 마주치는 모든 것을 격앙된 사랑의 충동으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리며 미친 듯이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다가 바다에 '작별 인사'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9월 말 무렵이어서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이 세상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누르스름한 슬픈 물결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녀는 괴로운 생각을 떠올리며 절벽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어둑해지자 그동안 살면서 겪은 더없이 큰 슬픔들을 그날 하루에 다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

로잘리는 이미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도로와 접해 있지 않은 이 큰 성보다 새집이 훨씬 더 유쾌하다며 좋아했다.

잔느는 저녁 내내 울었다.

성이 팔렸다는 사실을 안 뒤로 소작인들은 그녀에게 꼭 필요한 존중만 보였고, 저들끼리는 딱히 이유는 알지 못한 채 잔느를 '미친 여자'라고 불렀다. 아마도 촌부들 특유의 본능으로 점점 커져 가는 그녀의 병적인 감상, 지나친 몽상, 불행에 휘둘린 가련한 영혼의 혼란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p.336-337)

 

그녀는 기차의 속도에 질겁한 채 들판이, 나무가, 농가가, 마을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ㅅ휩쓸린 채, 평온했던 젊은 시절과 단조로운 삶의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실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p.353)

 

이튿날 그녀는 경찰서로 가서 아들을 찾아 달라고 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약속할 순 없지만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만날 희망을 품고 거리를 쏘다녔다. 인적 없는 들판 한가운데보다 그 바쁜 군중 속에서 더 외롭고, 더 절망적이며, 더 비참한 느낌이 들었따. (p.360)

 

며칠 전만 해도 슬픔에 짓눌려 그곳에서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울적한 습관이 뿌리를 내린 그곳이 아니고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p.362)

 

언제나 헤어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죠. 늙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이 계속 함께 살 수는 없어요. (p.367)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무섭도록 지속적이고 집요한 강박관념으로 변했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이 해 온 일을 거의 하루하루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벽에, 장식 융단 위에, 그 누렇게 변한 달력을 하나씩 걸었고, 이 달력 혹은 저 달력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몇 시간씩 보냈다. "이 달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그녀는 자기 삶에서 기억할 만한 날짜들에 줄을 그어 두었는데, 그래서 중요한 가선에 앞서거나 뒤이은 모든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하나씩 재구성하고, 한데 모으고 서로 결부시켜, 때로는 한 달 전체를 온전히 되살리기도 했다.

요한 관심을 기울여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의지를 집중해서 푀클에서 산 첫 두 해는 거의 고스란히 복원해 냈다. 그녀 삶의 먼 기억들은 이상하리만큼 쉽게 부각되어 떠올랏다.

그러나 그다음 해들은 안개 속에서 깅를 잃고, 뒤섞이고, 포개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종종 달력을 향해 머리를 기울이고 정신을 옛날에 집중한 채 무한히 머물렀지만, 떠올리려는 기억을 그 달력에서 되찾을 수 있는 건지조차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녀는 십자가의 길을 그린 판화처럼 이미 끝난 날들이 실린 달력 그림들에 둘러싸인 거실에서 이 그림 저 그림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갑자기 한 그림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기억을 찾느라 몰두한 채 그걸 바라보며 밤이 내릴 때까지 꼼짝 않고 머물렀다.

그러던 중 돌연, 태양의 열기에 온갖 수액이 ?깨어나고, 밭에 수확물이 자라기 시작하고, 나무가 푸르러지고, 마당의 사과나무들이 분홍빛 공처럼 꽃을 피워 들판이 향기로워지자 잔느의 마음에도 큰 술렁임이 일었다.

그녀는 더 이상 한 자리에 있지 못했다. 왔다 갔다 서성였고, 하루에 스무 번도 더 밖으로 나갔다 들어왓으며, 때로는 그리움의 열기에 들떠서 농가를 따라가며 멀리까지 배회했다.

풀숲에 웅크린 데이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수레바퀴 자국이 만든 웅덩이에 비친 푸른 하늘을 보면 젊은 시절 들판에서 꿈을 꿀 때 느꼈던 감동의 메아리처럼 아득한 감성이 되살아나면서 마음이 설레고 뭉클해지고 동요했다.

ㅐ를 기다리던 시절, 그녀는 이런 포근한 날들의 혼곤한 취기와 김미로움을 음미했고, 똑같은 동요에 전율했었다. 미래가 닫혀 버린 지금에 와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되찾았고, 마음속으로 다시 만끽했따. 그러나 동시에 그 때문에 괴로웠다. 깨어난 세상의 영원한 기쁨이 그녀의 메마른 살갗 속에, 식어 버린 피 속에, 짓눌린 영혼 속에 스며들면서 이제는 미약하고 고통스러운 매혹밖에 안기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 주변의 곳곳이 어딘지 조금씩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청춘기 때보다 태양은 조금 덜 뜨겁고, 하늘은 조금 덜 파랗고, 풀은 덜 푸르며, 꽃은 훨씬 창백하고 덜 향기로워서 예전처럼 완전한 취기를 안기지 못했다.

그래도 어떤 날에는 삶의 행복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그녀는 다시 몽상하고, 희망하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운명이 제아무리 가혹해도 화창한 날에는 언제나 희망을 품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f

달뜬 여혼이 채찍질이라도 하는지 그녀는 몇 시간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따금 갑자기 멈춰 서서 길가에 앉아 슬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받지 못했을까? 왜 평온한 삶의 단순한 행복조차 누리지 못했을까?

때로는 자신이 늙었으며, 앞으로 음산하고 고독한 몇 년의 세월 외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길을 모두 걸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 옛날, 열 여섯 살 때처럼 마음에 드는 달콤한 계획을 세웠다. 매혹적인 미래의 조각들을 맞춰 보았다. 그러다 냉혹한 현실감각이 덮쳐오면, 마치 무거운 물건이 떨어져 허리라도 부러진 듯 욱신거리는 몸으로 일어섰다. 그럴 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더 천천히 걸으며 중얼거렸다. "오! 미친 늙으니! 미친 늙으니!" (p.368-371)

 

잔느는 앞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로켓처럼 아치를 그리며 날고 있는 제비들의 비상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문득 감미로운 온기가, 생명의 열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 다리에 닿더니 살 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어린 생명의 온기였다.

그러자 무한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는 별안간 포대기를 열고 아직 보지 못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 아들의 딸이었다. 여린 생명체가 밝은 빛에 놀라 파란 눈을 뜨고 입술을 오물거리자 잔느는 광적으로 아이를 끌어안았고, 품에 안고 들어올려 마구 입맞춤을 쏟았다.

로잘리가 기뻐하면서도 퉁명스레 그녀를 말렸다. "자, 자, 잔느 마님, 그만하세요. 그러다 아기가 울겠어요."

그러곤 아마도 자기 생각에 대답하려는 듯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p.279-28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귀여운 여인 - 안톤 체호프 (김규종 옮김, 시공사 세계문학)

카프카 - 변신 (전영애 옮김, 민음사 셰계문학)

그러고 나서는 셋이 다 함께 집을 떠났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리하여 전차를 타고 교외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탄 칸은 따뜻한 햇볕이 속속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뒤로 기대고, 장래의 전망에 대해 논의했는데 좀더 자세히 관망해 보니 장래가 어디까지나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실은 서로 전혀 상세히 물어보지 않았던 세 사람의 직장이 썩 괜찮았으며 특히 앞으로는 상당히 희망적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 가장 큰 상황의 개선은 물론 집을 한번 바꿈으로써 쉽게 이루어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제 좀더 작고 값싼, 그러나 위치가 낫고 전반적으로 보다 실용적인 집을 갖고자 했다. 마치 지금 집은 그레고르가 찾아냈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들이 그렇게 환담하고 있는 동안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은 점차 생기를 띠어가는 딸을 보고 거의 동시에 딸이, 이즈음 들어 워낙 고달프다보니 두 뺨이 창백해지기는 했건만,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로 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어지며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초리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내외는 이제 딸을 위해 착실한 남자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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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1850 ~ 1893)

프랑스 문학가.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인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노르망디의 미로메닐 출생이다. 아버지 귀스타브 드 모파상은 로렌 지방 가문 출신인데 18세기부터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했다. 어머니 로르 르 푸아트뱅의 오빠 알프레는 플로베르의 절친한 친구였다. 모파상의 부모는 계속되는 불화로 인해 1860년 헤어졌고, 모파상은 어머니, 동생과 함께 노르망디의 에트르타에서 자란다. 1868년 루앙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자주 플로베르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플로베르는 모파상을 졸라, 위스망스, 도데 등 당대의 위대한 문인들에게 소개한다. 1869년부터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지원·입대하였다. 전쟁 후에 심한 염전사상(厭戰思想)에 사로잡혔는데, 이것이 문학 지망의 결의를 굳히는 동기가 되었다.
1872년 아버지의 도움으로 해군성, 문부성에 취직,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머니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귀스타브 플로베르에게서 직접 문학지도를 받았다. 1874년 플로베르의 소개로 에밀 졸라를 알게 되었고, 또 파리 교외에 있는 졸라의 저택에 자주 모여 문학을 논하던 당시의 젊은 문학가들과도 사귀었다.
1875년 처음으로 지역신문에 단편 〈박제된 손〉을 발표한다. 1880년 졸라는 모파상을 포함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 야화(夜話)》를 간행하였는데, 모파상은 여기에 《비계덩어리》를 실어 날카로운 인간관찰과 짜임새 등에서 어느 작품보다도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문단 데뷔를 확고히 하였다.
1883년에는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 Une vie》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선량한 한 여자가 걸어가는 환멸의 일생을 염세주의적 필치로 그려 낸 작품으로서 그의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파상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단편에 나타나는 외설적인 묘사가 지나치게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톨스토이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파상은 이미 27세경부터 신경질환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증세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그리고 《죽음처럼 강하다》(1889년), 《우리들의 마음》(1890년) 등의 장편 소설을 썼다.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지병인 신경질환이 더욱 악화되어 1892년 1월 2일 니스에서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이듬해 7월 6일 42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표면적·물질적이어서 깊은 정신면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무감동한 문체를 통해서 일관한 감수성과 고독감은 인생의 허무와 싸우는 그의 불안한 영혼을 나타내고 있다.
모파상의 작품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무감동적인 문체의 사용, 이상 성격자나 염세주의적 인물의 등장 등이다. 이러한 특징은 모파상 자신의 생애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는 환상 단편들처럼 복잡하고 기이한 인생을 살았는데, 27세에 이미 신경질환을 자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신경질환 증세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약 300편의 단편 소설을 남겼고, 그 밖에 기행문, 여러 장편 소설 등을 쓰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에서는 전체적으로 이상한 고독감을 느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환상 단편 《오를라》의 등장인물이 겪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그런 심리 상태를 형상화한 문체가 비단 등장인물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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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 모파상 (신인영 옮김, 문예 세계문학)

여자의 일생 - 모파상 (이춘복 옮김, 동서월드북)

여자의 일생 - 모파상 (김은영 옮김, 꿈과희망) - 명화 에세이 수록

여자의 일생 - 모파상 (이정림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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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

골짜기의 백합 - 발자크 (정예영 옮김, 을유 세계문학)

적과 흑 - 스탕달 (이규식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마담 보바리 - 플로베르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목로주점 - 에밀 졸라 (유기환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