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사라진 - 오노레 드 발자크 (선영아 옮김, 민음사)

by handaikhan 2023. 11. 15.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발자크 - 사라진 (1830년)

 

나는 가장 떠들썩한 연회 한복판에서 모든 사람을, 심지어 경박한 사람마저 사로잡는 깊은 몽상 중 하나에 잠겨 있었다. 엘리제 부르봉궁의 괘종시계가 막 자정을 알렸다. 창틀에 걸터앉아 물결무늬 커튼의 일렁이는 주름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나는 내가 저녁나절을 보내는 저택의 정원을 느긋이 감상할 수 있었다. 눈에 다 덮이지 않은 나무들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 흐린 하늘이 만들어 낸 회색빛을 배경으로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냈다.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자니 나무들은 엉성하게 수의를 걸친 유령들, 저 유명한 죽은 자들의 춤의 거대한 이미지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다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면 산 자들의 춤! 은색 금색의 벽과 눈부신 샹들리에, 빛나는 촛불로 휘황찬란한 살롱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파리에서 가장 어여쁘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신분 높은 여인들, 찬란하고 도도하고 다이아몬드로 눈부신 여인들! 얼굴과 가슴과 머리와 드레스에 꽃을 장식하고 발목에 꽃 줄을 단 여인들이 북적대고 들썩이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가벼운 기쁨의 전율과 육감적인 발걸음으로 여인들의 가는 허리에서 레이스 끈과 블론드 레이스, 모슬린이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몇몇 지나치게 강렬한 시선이 여기저기를 꿰뚫어 보고 빛줄기와 다이아몬드의 광채를 압도했으며, 이미 과열된 가슴들을 한층 더 들뜨게 했다. 연인을 향한 의미심장한 고갯짓과 남편에 대한 거부의 몸짓도 감지되었다. 뜻밖의 패가 나올 때마다 터지는 노름꾼들의 탄성, 짤랑대는 금화 소리가 음악과 두런두런한 대화 사이로 섞여 들었다.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온갖 향락에 취한 이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작정으로 향수 냄새와 전반적인 취기가 들뜬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렇게 내 오른편으로는 어둡고 소리 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내 왼편으로는 삶의 격조 높은 바쿠스 축제가 펼쳐졌다. 이편에는 차갑고 음침하고 애도에 잠긴 자연이, 저편에는 흥에 취한 사람들이 있었다. 별의별 방식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며 파리를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철학적인 도시로 만드는 두 이질적인 그림의 경계에서 나는 반은 경쾌하고 반은 을씨년스러운 정신의 혼합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왼발은 장단을 맞추는데 다른 한 발은 관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의 절반을 얼어붙게 만드는 외풍에 내 한쪽 다리는 얼음장 같고 반대쪽 다리는 무도회가 열릴 때면 흔히 그렇듯 살롱의 끈적끈적한 열기를 맛보았다. (p.11-13)

 

동전의 앞뒤와 같은 인간의 양면성 (p.21)

 

키 작은 노인이 독방을 탈출한 미치광이처럼 방을 빠져나와 <탄크레디>의 카바티나를 마무리하는 마리아니나의 목소리에 몰입한 사람들의 대열 뒤로 슬그머니 숨어든 듯했다. (p.22)

(주석)

로시니 - 탄크레디(오페라, 1813년)

이렇게 설레는 가슴

(08) Ruggiero Ricci(vn), Louis Persinger(p) (1954.3.17) Paganini - I Palpiti - Introduction and Variations after Rossini's 'Tancredi', Op.13.mp3
8.91MB

 

.............................................................................................

 

 

 

............................................................................................................................................................................................................................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년 5월 20일-1850년 8월 18일)

프랑스의 작가이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언론인, 인쇄업자로서 활동했다. 발자크는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그는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하여 청년 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완성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창작한 바 있다.
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에게서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 (보들레르)
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발자크가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1840~1848년도 당시 이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썼다.
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당하듯이 살았던 그는 저작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였지만,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 그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인쇄업 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 로(rue Fortunée)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엄청난 사치 속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

 

.........................................

사라진느 - 발자크 (이철 옮김, 문학과지성사)

고리오 영감 - 발자크 (박영근 옮김, 민음사)

어둠속의 사건 - 발자크 (이동렬 옮김, 민음사)

골짜기의 백합 - 발자크 (정예영 옮김, 을유문화사)

나귀 가죽 - 발자크 (이철의 옮김, 문학동네)

사촌 퐁스 - 발자크 (정예영 옮김, 을유문화사)

루이 랑베르 - 발자크 (송기정 옮김, 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