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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4. 수필

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안대회 옮김, 태학사)

by handaikhan 2023. 9. 12.

태학 산문서 1

 

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아! 청운에 높이 오른 선비가 가난한 선비 집을 수레 타고 찾은 일도 있고, 포의의 선비가 고관대작의 집을 소매 자락 끌며 드나든 일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벗을 찾아다니지만 마음 맞는 친구를 얻기는 어려우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벗이란 술잔을 건네며 도타운 정을 나누는 사람이나, 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가까이하여 앉은 자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도 모르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벗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벗에서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끼는 물건이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누구나 사유하고 싶어하는데, 사유의 대상으로는 재물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은 남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나 그런 부탁을 꺼리고, 꺼리는 대상으로는 재물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사유한 재물을 논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 친구라면 다른 것은 오죽 하겠습니까?

<시경>에 "옹색하고 가난한 내 처지! 힘든 줄 아는 자 하나도 없네!"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가도 남들은 털끝만큼도 자기 것을 덜어 보태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베푼 은혜에 감동하거나 원한에 사무쳐 하는 세상사가 일어납니다.

가난한 사정을 감추고 말을 꺼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남에게 부탁할 일이 전혀 없을까요? 하지만 그는 집문 밖을 나서서는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을 하고 만나는 사람과 정담을 나눕니다. 그가 차마 오늘 먹어야 할 밥이나 죽에 대해서 몇 번이나 운을 뗄 수 있을까요?

그는 평소에 하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두루 꺼내면서도 정작 지척에 놓여 있는 쌀궤의 자물쇠를 여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묻지 못합니다. 하지만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대단히 꺼내기 힘든 말이 숨어 있습니다. 정말 부득이하기에 조금 운을 떼기 시작하여 잘 끌어가다 쌀이나 돈을 꾸어달라는 본론으로 화제를 돌릴 찰나 상대방의 미간에서 좋지 않은 반응이 은근히 나타나는 것을 눈치챕니다. 그러면 앞에서 이른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설령 꺼낸다 하더라도 실상은 꺼내지 않은 것과 똑같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사람은 남이 무엇을 그에게 바래는 것이 싫으면 지레 그가 재물 없음을 말해버립니다. 남의 기대를 아예 끊기 위해서 일부러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른바 술잔을 건네며 도타운 정을 나누고 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가까이하여 앉은 벗이라 해도, 대개는 서글픔으로 인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실의와 비감에 차서 제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통하여 알았습니다. 우정의 척도로 가난을 상의한다고 한 말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고, 무언가 격분하여 그렇게 말한 것임을....

곤궁할 때의 벗을 가장 좋은 벗이라고 말하는데 허물이 없고 시시콜콜한 관게라고 경시해서 그럴까요? 또 요행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처한 사정이 같은 고로 지위나 신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근심하는 바가 같은 고로 서로의 딱한 처지를 잘 이해하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손을 맞잡고 노고를 위로할 때에는 반드시 친구가 끼니라도 제대로 잇고 있는지, 또 탈이 없이 잘 지내는지를 먼저 묻고 그 뒤 살아가는 형편을 묻습니다. 그러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도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친구의 처지를 안쓰러워하는 진실한 마음과 또 친구가 마음 써준 데 대한 감격이 그렇게 시킨 것 입니다.

eㅏ른 사람에게는 말을 꺼내기가 지극히 어려웠던 사정도 이제는 망설임없이 입에서 곧바로 솓아져 나와 말문을 막을 길이 업습니다. 어떤 때는 친구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안부를 묻곤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베개를 청하여 한잠 늘어지게 자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 십 년간 사귀며 나눈 대화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벗을 가귐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무슨 말을 나누어도 말을 꺼내지 않은 것과 똑같은 법입니다. 벗을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서로가 묵묵히 할 말을 잊고 있다 해도 좋은 것입니다. 옛말에 '머리가 세도록 오래 사귄 친구라도 처음 만난 것처럼 서먹서먹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사귄 친구라도 엣 친구와 다름없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p.10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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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태학사 2022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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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05년 7월 6일)

전설서 별제, 오위도총부 오위장, 경기도 양평 현감 등을 지낸 조선 시대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초정 박제가는 1750년 아버지 박평(朴玶)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출신의 자식이다 적모를 통해 낳은 이복형 박제도가 있다 박평의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그의 선대는 고려 충렬왕 때 박척(朴陟)이다 박제가의 가계는 조선 후기의 소북 계열로 박율(朴栗)의 6대손으로, 현조부는 박심(朴尋)이다 고조부는 박수문(朴守文)이다 증조부는 박순(朴純)이다 조부는 박태동(朴台東)이며 아버지는 박평(朴玶)이다
박제가는 어릴적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변소에가면 그 옆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 한다. 훗날 박제가 자신의 회상에 의하면 "내가 글을 처음 배운것은 막 젖을 먹던 때였지"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평은 만년에 얻은 서자인 그에게 각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11세 때 죽고 본댁에서 나오게 되면서 가난해졌으나 시문과 그림에 능해 유명해졌다. 그의 가계는 당색으로는 소북이었으나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인이 되면서 노론 북학파로 당적을 옮겼다.
일찍부터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글재주를 알아본 아버지 박평은 그가 서자임에도 공부를 하게했다 그들 모자를 돌보아주던 아버지 박평이 사망하자 한성부 본댁에서 나와 거처를 자주 옮겨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박제가는 밤을 새워가며 품풀이하여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지극 정성을 가슴깊이 새겼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모든것을 바쳤다. 박제가는 당시의 생활을 회상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본다. 과부로 가난하게 살면서 10여년동안 성한 옷을 입어보지 못했고 입에 맞는 음식을 자셔보지도 못했으며 밤을 새워가며 삯바느질을 하여 공부하는 이 아들의 뒤바라지를 하였다. 내가 사귀는 사람중에는 이따금 선생과 나이 든 분,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인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반드시 그들을 초청케 하여 술과 안주를 극진히 대접한 관계로 그 아들을 대하는 사람으로서는 집안형편이 빈한한것을 모를 정도였다. ”
이와 같은 사회적환경과 가정정황은 그가 커서 사회적 천대와 멸시, 양반 제도와 계급적 모순에 대해 불만을 갖고 비판하며 빈곤한 농민과 서민을 동정하는 입장에 서게 하는데 대해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우연한 기회에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그의 문하에 출입하게 된다. 또한 이순신의 5대손인 선비 이관상(李觀祥)의 문하에도 출입하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이관상은 1766년 자신의 첩이 낳은 둘째 서녀를 박제가에게 출가시켜 서녀사위로 삼는다.
1766년 16세에 이관상의 서녀와 혼인하고 한때 그의 집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비록 서출이고, 서녀의 남편이었지만 이관상은 그를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고 독서를 지원할만큼 그를 아꼈다. 이관상은 그가 서자임을 애석히 여겼다. 이관상은 서녀 내외를 자신의 집에 특별히 거주하게 했고, 그에게도 계속 자신의 서실에 출입하게 하여 성리학과 글을 가르쳤었다.
1769년 19세 때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 많은 실학자와 만났다. 이중 이덕무와는 절친한 벗이었다
“ 우리를 믿지 않고 소인이라 하니, 무한한 마음속 계책 누구에게 말해 볼까?[3] ”
신분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박지원 문하에서 많은 동료들을 만났고 이덕무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 그의 재능을 알아주었다. 이때 만나 교류했던 인물들 중 홍대용은 후일 박제가의 문하생이 되는 김정희의 장인 홍담용의 사촌간이 된다. 그러나 그는 늘 고민했다. 장인 이관상과 사람을 가리지 않던 연암 박지원의 배려로 전통적인 양반 교육을 받았지만, 서자라는 신분적인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사상을 전개하였다. 남인인 정약용과도 친교를 맺고 교류하였다.
청년기에 그는 박지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독자적으로도 탐독하였다. 그는 유형원이나 이익 등의 토지경제사상과 중농사상을 비판하고, 선진적인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과, 상공업을 천시하지 말고 국가가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는 수레(車)를 쓸 수 있도록 길을 내어야 하고 화폐 사용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73년(영조 50년) 3월 음서로 출사하려 하였으나 서얼이라 하여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 세 사람과 합작(合作)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년)인 29세 때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의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되돌아왔다. 귀국 직후 그는 도구의 개량과 사회, 정치 제도의 개혁에 관한 내용인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맹자를 일부 인용하였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내편(內篇)에서는 실생활에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을 다루고, 외편(外篇)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서술했다.
그는 정조에게 국력의 부강을 위해서는 교역로를 열어야 되고, 청나라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며, 생산 기술과 도구를 개선하고 상업을 장려하여 대외 무역을 조정에서 장려해야 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중신들에 의해 당치않은 소리라는 면박을 당하였다.
1779년(정조 3년) 3월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하고 특명으로 규장각검서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를 비롯한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이 등용되었다. 숙직을 자청하여 책을 읽다가 잠든 그를 보고 감동한 정조는 격려의 차원에서 약식을 내리고, 그에게 자신의 담요를 덥혀주기도 했다. 이때부터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마음껏 탐독하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하기도 하였다.
1779년 서자였으나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려는 정조의 방침에 따라 규장각 검서관 등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많은 저서를 썼다. 1786년 음력 1월 박제가는 조선 사회를 뒤흔들 만한 장문의 개혁책을 정조에게 올렸다.
1785년(정조 9년) 전설서별제(典設署別提)가 되었다. 그는 사직하려 하였으나 정조의 간곡한 만류로 취임하였다. 이때 그는 시정 개혁 상소를 올려 서자들 중에도 유능한 인재가 있으나 출사를 막는 것은 부당하다며 서자들의 허통을 상소하였다. 주변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정조는 그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1786년(정조 10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정의 폐단을 고칠 방안을 구언하는 한편 폐단을 고칠 구폐책(救弊策)을 올리게 했을 때, 전설서별제의 직에 있으면서 '병오소회 丙午所懷'를 상소로 올렸다. 여기서 그는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당시 지배층의 이해와는 상반된 것이었으므로 묵살되었으며, 오히려 노론 벽파 세력의 심한 반발과 비판을 받았다. 또한 노론은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공격, 당시의 심한 당쟁에 휘말려 비판을 받고 급기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1790년(정조 14년) 5월 건륭제의 팔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절이 파견될 때 박제가는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徐浩修)의 수행원으로 유득공 등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도중 원자(元子, 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준 건륭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한 정조의 특명으로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되어 다시 말머리를 돌려 연경에 다녀왔다. 1791년(정조 15년) 귀국 후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었다. 그해 겨울 청나라에 동지사(冬至使)가 파견되자 동지사를 수행하여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792년 부여현감으로 나갔다가 1793년 승정원에서 보낸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비옥희음송 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반성문인 자송문(自訟文)을 왕에게 지어바쳤다.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1796년 양평현감(陽平縣監)이 되고, 1796년 영평 현감(永平縣令)으로 부임하였다. 1798년에는 왕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했다.

박제가는 상업과 무역의 장려와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청나라를 오가며 아랍, 베트남 등의 무역상들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면서 그는 새로운 문물 전파와 문화 교류 방법의 하나는 상업과 무역이라고 봤다. 따라서 그는 농업보다 상업에서 사회발전의 계기를 찾으려 했다. 상업과 무역을 천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러한 장사와 무역이 국가 경제 개선에 도움을 준다고 봤다. 그는 무조건 근검절약만이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대의 지배층들로부터 사치를 권장하느냐는 반박을 받았다. 그는 상업을 발달시키려면 대부분의 실학자들조차 미덕으로 여겼던 봉건적 절검사상을 배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북학의>> 내편 시정(市井)조에서도 '소비는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을 자극하는 것'이라 주장했고, '생산과 소비의 유기적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이를 연결하는 장사와 무역의 중요성을 천명했다. 따라서 그의 생각도 상업이 발달하면 농업과 수공업도 아울러 발달한다는 중상적 경제이론에 도달해 있었다.
또한 화폐 유통을 정조에게 여러번 건의하였다. 화폐 유통은 장사와 무역을 활발하게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박제가의 화폐경제 발달론의 본질은 국가의 경제력을 증대시켜 이용후생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상업이 주가 되면서 농업·공업이 유기적으로 발전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상인들과 무역상들에 대한 지나친 천대와 편견을 자제할 것, 수공업자에 대한 국가적 수탈의 금지, 대량 생산체제의 구축, 농업기술의 개량을 통한 농업생산성의 증진과 상업적 농업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국가경제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통상을 통한 재화의 증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밀무역을 근절할 방안으로도 국가가 상업과 무역에 대한 천대와 경멸, 제재를 줄여야 된다고 건의하였다. 무역과 상행위에 대한 제재가 사라진다면 밀무역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근절될 것이라고 하였다. 밀무역을 양성화시켜 정상적인 외국무역을 발전시킬 것과 개성, 인천과 충청도·전라도 일대의 서산, 태안, 장진, 은진, 강경, 여산 등지의 강가를 끼고 있는 지역에 무역항을 열고 중국 남부 및 산둥(山東) 지방과 통상을 확대하고, 상권이 커지고 국력이 자라면 일본·안남·위구르 등 무역대상국을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 위에서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체제를 재조하자고 하였다.

박제가는 어릴 때부터 통찰력과 판단력, 방대한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났다. 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차별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다. 그는 허울만 가득한 조선의 양반`학자`선비`지식인 등 편협하고 답답한 집단을 비웃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을 부수지는 못했다.
그는 서자라는 이유로 멸시당했고, 그가 속했던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로 취급당했다. 그의 화폐유통론과 국가의 무역 장려론은 상거래를 천시 여기돈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불순한 사상 내지는 이문을 남기기 위한 협잡 정도로 취급되었다. 또한 그의 집안이 원래 소북이었다가 박제가의 대에 노론으로 전향한 것을 두고도 문제가 되었다.
청년 시절 그는 심한 천대와 멸시 냉대에 실망했고 그는 뜻을 펴볼 기회를 잃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되었으나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가로 막힌데다 정조의 죽음 이후에는 유배 생활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 박제가는 그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

시, 그림, 글씨에도 두루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며 청나라의 《사고전서 四庫全書》계열 학자들과 만난 이후 편지 서신등을 통한 꾸준한 교류를 통해 조선에 대련 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 소개하였다. 글씨는 조선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 실을 하였으며,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는 시 재주를 청나라의 문인들로부터도 인정받아 생전인 1801년을 전후해서 그의 시문집인 『정유고략(貞유藁略)』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했다. 추사 김정희 역시 그의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웠는데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체의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강건하였다.
그림에도 능하여 서실을 짓고 학문 외에 화가 제자들도 다수 배출하였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를 한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를 그렸고 중국의 산수화 보다는 조선 국내의 풍광과 경치를 그렸다. 또한 생동감이 넘치는 꿩, 새, 고기, 노루 등을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1798년(정조 22년) 다시 부여현감이 되었으며, 1798년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히 농사에 참여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 일부를 발췌, 골자로 한 '응지농정소 應旨農政疏'와 '소진본북학의 疏進本北學議'를 올렸다.

박제가는 고군분투했다. 틀에 박히고 고루하고 진부한 시와 문장을 혐오하며 나만의 글쓰기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여겨 배웠고, 다음은 당나라 시, 그 다음은 송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시를 배웠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범에 매달리는 글쓰기는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했다. 자기 시대의 현장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만의 글쓰기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 고인의 글쓰기에 다가가는 길이었다.

'형암 선생 시집서'(炯菴先生 詩集序)에서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며 그는 현실에서 보고 듣고 관찰한 것이 좋은 글,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된다고 보았다.

한편 형식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는 노론계 다른 학파의 비난이 빗발치자 정조는 그의 스승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인사들에게 '문체반정'을 하라고 선언하고, 바른 글을 써 내라고 지시한다.
“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 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
스승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동료 문인들은 모두 반성문을 지어 올렸다. 결국 박제가는 '자송문'(自訟文)이라는 반성문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그러나 당대의 문장을 순정한 문체로 되돌리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 부응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자송문'(自訟文)이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반성은 하지 않고 항변하였다.

10여년의 검서관 생활은 결국 그의 시력을 악화시켰다. 밤늦게까지 독서했고 어두운 방에서도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이 원인이었다. 만년의 그는 안경을 썼는데, 결국 왼쪽 눈이 상하여 아무리 안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몇해 뒤에는 오른편 눈의 시력마저 희미해졌다. 또한 시집간 둘째 딸이 그보다 먼저 죽는 일도 겪었다. 그는 관직생활 전후로 서실을 열고 문인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쳤는데, 추사 김정희(金正喜) 역시 그의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
1800년(정조 24년) 정조 사후 노론 벽파에게 소론, 남인과 실학파 계열 학자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 그는 소북에서 노론 북학파로 당적을 옮기고 전향했다. 1801년에는 청나라에 네 번째 연행을 갔다 돌아왔다가 사돈이었던 윤가기(尹可基)가 주모한 흉서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9월 함경북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갔다. 사돈인 윤가기의 흉서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중에는 그의 청나라행을 후원했던 윤행임도 연루됨으로써 그 역시 윤가기, 윤행임의 당여로 몰렸다.
결국 정순왕후(貞純王后)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다.[3] 1805년에 풀려났는데, 그 이후 박제가의 행적과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윤가기의 흉서사건 이후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9월에 함북 회령의 종성(鍾城)에 유배를 갔다가 풀려난 이후 전해지는 행적은 초정(楚亭)지인들의 풍문일 뿐 정확한 사망연대와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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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 박제가 (박정주 옮김, 서해문집)

북학의 - 박제가 (안대회 옮김, 돌베개)

박제가 연구 - 안대회 외 (사람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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