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4. 수필

뜬 세상의 아름다움 - 정약용 (박무영 옮김, 태학사)

by handaikhan 2023. 4. 7.

정약용 - 뜬 세상의 아름다움

 

<부암기(浮菴記) - 뜬 세상의 아름다움>

나산처사 나 공은 연세가 거의 팔십인데도 홍안에 푸른 눈동자로 태연자약한 품이 신선 같으시다. 다산의 암자로 나를 방문하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름답구려, 이 암자는! 꽃과 약초가 나뉘어 심겨 있고, 시내와 바위가 환하게 둘려 있으니 세상사에 아무런 근심이 없는 사람의 거처로세. 그러나 그대는 지금 귀양살이 중인 사람일세. 주상께서 이미 사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니 사면의 글이 오늘이라도 도착하면 내일엔 이곳에 없을 터, 무엇 때문에 꽃모종을 내고 약초 씨를 뿌리고 샘을 파고 도랑에 바위를 쌓으며 이처럼 구원의 계획을 세우는가?

내가 나산의 남쪽에 암자를 튼 지 이제 삼십여 년일세. 사당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자손들이 그곳에서 성장했네. 그러나 거칠게 깎아 기둥을 꽂고는 썩은 동아줄로 동이어 놓았을 뿐이라네. 동산과 채마밭도 가꾸지 않아 쑥대와 콩잎이 우거져도 임시변통으로 대충 수리할 뿐 아침에 저녁을 생각지 않는다네.

왜 이렇게 하겠는가? 우리의 삶이란 것이 떠다니는 것이기 때문이지. 혹은 떠다니다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혹은 떠다니다 서쪽으로 가기도 하며, 혹은 떠서 다니기도 하고 혹은 떠서 멈추기도 하며 혹은 떠서 떠나가기도 하고 혹은 떠서 돌아오기도 하니 그 떠다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치지 않는다네. 이런 까닭에 나는 스스로를 부부자(子, 둥둥 떠다니는 사람)라 하고 내 집을 부암(浮菴, 떠다니는 집)이라 부른다네. 나도 오히려 이렇거늘 하물며 자네임에랴. 이러니 그대의 일이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아아, 통달하신 말씀이십니다. 삶이 떠다니는 것임을 선생께선 이미 아십니다. 그렇지만 호수와 연못이 넘치면 부평초의 잎은 도랑물에도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나무인형도 따라 흘러 갑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며 선생게서는 더욱 잘 아시는 것입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물고기는 부레로 떠다니고, 새는 날개로 떠다니며 물거품은 공기로 떠다니고 구름과 노을은 증기로 떠다닙니다. 해와 달은 움직여 굴러다님으로써 떠다니고 별들은 밧줄로 묶여서 떠 있습니다. 하늘은 태허로서 떠 있고 땅은 작은 구멍들로 떠 있어서 만물을 싣고 억조창생을 싣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천하에 떠다니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큰 배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배 안에서 물 한잔을 선창 안에 붓고 겨자를 배처럼 띄워놓고는, 자기 자신이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그것이 떠있다고 비웃는다면 어리석다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떠다닌다는 사실에 홀로 상심하셔서 자신을 '떠다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기 집에 '떠다니는 집'이란 이름을 붙이며 떠다니는 것을 슬퍼하고 계시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조 꽃과 약초, 샘과 바위들은 모두 나와 함께 떠다니는 것들입니다. 떠다니다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떠다니다 서로 헤어지면 시원스레 잊어버리면 그만일 뿐입니다. 무어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떠다니는 것은 전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어부는 떠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고 상인은 떠다니면서 이익을 얻습니다. 범려는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에 떠다님으로써 화를 면했고, 불사약을 찾아 떠났던 서불은 섬나라에 떠가서 나를 열었습니다. 당나라의 장지화는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에 떠다니면서 즐거워했고, 예찬은 강호에 떠다님으로써 역도들에게 붙잡혀 가는 것을 면하고 안락했습니다. 그러니 떠다니는 것이 어째 하찮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 같은 성인도 또한 떠다닐 뜻을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떠다닌다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물에 떠다니는 것도 그런데, 어찌 땅에 떠 있는 것을 가지고 상심하겠습니까?"

오늘 더불어 말씀 나눈 것으로 부암기를 지어 선생의 장수를 축원하는 선물을 삼고 싶습니다. (p.108-111)

 

<기이아(兒) - 자포자기하지 말아라 - 아이들에게>

임술년(1802) 12월 22일 강진의 유배지에서

 

천지 만물 중에는 자연적으로도 완전하고 좋은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이하다고 감탄할 것이 못된다. 무너지고 훼손되었거나 깨지고 찢어진 것을 잘 다독거려 완전하고 좋게 만든 것이라야 그 공덕이 감탄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놓은 자를 훌륭한 의원이라고 부르고, 위태로운 성을 구한 사람을 명장이라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쥐고 흔드는 공경의 자제로 태어나 벼슬자리와 문호를 이어받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너는 지금 폐족이다. 만약 폐족의 처지에 잘 대처해서 처음보다 더욱 완전하고 좋게 된다면 또한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어떻게 하면 페족의 처지에 잘 대처하는 것이겠느냐? 오직 한 가지 독서뿐이다. 독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깨끗한 일이다. 비단옷 입은 권세가 자제들은 그 맛을 알 수가 없고, 궁벽한 시골의 수재들도 그 깊은 경지는 알 수가 없다. 반드시 벼슬하는 집의 자제로서 어려서 듣고 본 바가 있고 중년에 화를 만난 너희 같은 자들만이 비로소 참다운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책을 읽을 줄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한갓 글자만 읽어서는 독서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삼대째 이어오는 의사가 아니면 그의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도 마찬가지도 반드시 여러 대에 걸쳐 문장에 종사한 후에야 글을 잘 짓게 되는 것이다. (p.168-169)

 

독서는 반드시 먼저 기본이 서야 한다. 기본이란 무엇이냐?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할 수 없다. 학문에 뜻을 두려면 반드시 먼저 기본이 서야 한다. 기본이란 무엇이냐? 오직 효도와 우애가 그것일 뿐이다. 반드시 먼저 효도와 우애를 힘써 실천하여 기본을 확립하면 학문은 저절로 몸에 흡족히 스며들게 된다. 학문이 몸에 골고루 배어들면 독서는 층차나 절목을 별도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p.171)

 

근래에 몇몇 젊은이들은 원과 명의 겨악한 자들이 지은 신산스럽고 뾰족하기만 하지 보잘것 없는 글들을 가져다 흉내내어 절구나 오언율시를 지어놓고서는, 세상에 없는 문장이라네 뽐내며 오만하게 다른 이들의 작품을 폄하하여 고금의 모든 문장들을 휩쓸고자 한다. 내가 전부터 이것을 민망하게 여겼었다.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 근본을 다지고 난 후에 앞 시대의 역사를 섭렵하여 그 정치적 득실과 세상이 태평하거나 어지러운 것은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실용의 학문에 유념하여 옛사람들이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하는 것에 대해 적어놓은 서적을 즐겨보고, 항상 만민에게 은택을 베풀고 만물을 잘 육성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독서한 군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 짙은 녹음이나 보슬비가 내리는 좋은 경치를 만나면 갑자기 감흥이 일고 표연이 사상이 떠올라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가의 살아있는 경지다. 나를 고지식하다고 여기지 말아아. (p.173)

 

뜬 세상의 아름다움 - 정약용 (박무영 옮김, 태학사 개정판)

 

....................................................................................................................................................................................................................................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음력 2월 22일)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이다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사망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기에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생애>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주2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 ·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 · 『흠흠신서』 · 『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 · 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학 운동의 목적에서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1938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

다산의 재발견 - 정민 (휴머니스트)

정선 목민심서 (창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 (박석무 옮김, 창비)

다산 산문선 - 정약용 (박석무 옮김, 창비)

삶을 바꾼 만남 - 정민 (문학동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정민 (김영사)

소설 목민심서 - 황인경 (북스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