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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길위의 집 - 이혜경 (민음사)

by handaikhan 2023. 9. 7.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 길위의 집 (1995년)

 

낯선 진동음이 은용의 몸을 들까부른다. 은용은 우무처럼 점성이 강한 공기에 갇혀 있어서, 진동은 제 파장을 한 번 굴절시킨 다음에야 전달된다. 은용은 팔을 헤집어, 끈덕지게 들러붙는 공기층을 걷어낸다. 저 소리, 저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지. 그런데 공기가 왜 이리 끈적거리지? 이걸 어떻게 걷어내지? 은용은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뜬다.

"아가씨, 아가씨, 전화 받아요."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외침을 흡, 삼키며 은용은 눈을 떴다. 흐릿한 빛살 아래 올케의 얼굴이 대각선으로 비쳤다.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키자, 쪼그리고 앉은 올케가 제대로 보였다. 은용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링거 방울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새 잠들었던가. 손은 여전히 윤 씨의 손을 잡고 있었고, 거꾸로 매달린 링거 병의 용액은 잠들기 전에 본 수위와 거의 같아 보였다. (p.7)

 

"시간이 얼마든지 걸려도 좋으니 튼튼하게만 지어주쇼."

도급제 아닌 일당제로 맡기면서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다는 주문을 한 건, 그만큼 공사비가 늘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효기가 그 점을 지적했을 때, 길중 씨는 입을 막았다.

"재촉하지 마라. 하루 이틀 살 집도 아니고, 사람이 짓는 집이다. 일하는 사람에게 그만큼 정성을 보이면 집도 눈에 안 보이는 데서 부터 단단해지는 법이다. 왜정 때, 내가 만주에 갔을 때도 그랬다. 저수지 둑을 쌓는 일이라 누구 손 갈 것 없이 사람들이 달려들어 하는 일인데도, 그때 일하던 사람들은 그랬더니라. 나중에 우리 자식들하고 두루마기 입고 와서 이 둑 우리가 쌓았다고 말하려면,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고. 일하는 사람 마음은 그런 거니라."

일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런 거였다. 자기가 짓고 있는 게 무어든, 그게 완전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일.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건, 일을 맡기는 사람의 정성과 신뢰였다. 집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람에게 공력을 들이면 그만큼 집을 짓는 손길에도 정성이 깃들이리라. 길중 씨는 그렇게 믿었다.

'저 앨 남의 밑에서 몇 년 일하게 하는 건데 그랬어. 그래야 남의 돈 먹는 사람 심정을 알 텐데. 내가 나 기운 딸리는 것만 생각해서 매어뒀더니...'

강파르던 얼굴에 결혼하면서부터 살이 붙어. 효기의 유한 성질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올 가는 머리카락에서 둥그런 눈, 반듯하나 오뚝한 맛이 없어 퍼져 버린 콧대. 장님이 손으로 만져서 형체를 알아내듯, 길중 씨는 어스름 속에서 아들의 얼굴을 읽어버렸다. 힘이나 패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 그저 온건하고 유함만이 느껴지는 얼굴. 저런 얼굴로 이 세파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길중 씨는 염려스럽다. 서른 살이다. 서른 살 된 아들을 염려해야 한다는 게 스스로 역정이 났다. 윤기가 옹골차서 그나마 마음을 놓았더니, 옹골참을 지나쳐서 앞질러 가려고 한다. 걷기도 전에 뛰려 하는 격이다. (p.37-38)

 

"윤기는 어디 갔냐?"

"집으로 먽 들어간다고 갔어요."

"그런 일이 있으면 네가 말렸어야지. 형이 돼가지고 그게 무슨 꼴이냐?"

"걔, 걔가, 어디 제 마, 말을 듣나요."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걸 게다. 효기의 말에는, 장자의 지게에서 아버지가 얹은 무거운 나뭇단인 형제들, 아무리 간추려 지고 가려 해도 불쑥불쑥 떨어지거나 비어져 나오는 생솔가지들을 짐스러워하는 마음이 불쑥 퉁겨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뭇단을 밀어내거나 두 번째 나눠 지고 갈 요량은 없는 사람을 지켜보는 답답함이 오히려 길중 씨의 성미를 눅여 버렸다.

"정 그랬다면 알리기다로 했어야지."

"..."

침묵으로 불편한 심사를 드러낸 효기는 길가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보았다. 빛이 죽어가면서 거뭇해진 집, 창에 켜진 불빛들, 그 안에서 머리 맞대고 살고 있을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서 들끓는 마음들. 가로등 옆을 지나갈 때, 길중 씨의 그림자가 효기를 덮었다. 그걸 보자 효기는 숨이 답답해졌다. (p.38-39)

 

고개를 돌리려다, 길중 씨는 소방서 망루를 올려다본다. 망루 위, 망루 구멍 속에 날아와 씨를 묻은 벽오동 한 그루가 망루 안에서 바깥으로 힘겹게 가지를 뻗어올린 채 자라고 있다. 그걸 볼 때마다 길중 씨는 안타깝고 대견스럽다. 살려고, 어쩌다가 엉뚱한 곳에 뿌리를 내렸지만 시들시들 망루 안에서 시들어가는 게 아니라 해를 향해, 망루 구멍 바깥으로 자기를 밀어올리는 그놈이 대견스러운 것이다. 돌로 쌓아올린, 첨성대를 닮은 망루 구멍에 삐죽 솟은 푸른 잎을 보았을 때,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면서 그 푸른 잎으로 쏠리던 마음. 좀 더 자란 뒤에 보니 벽오동 나무였다. 망루가 있는 경찰서와, 큰길을 사이에 두고 대각이 되는 지점에 있는 약국 앞의 벽오동 나무에서 날아와 발을 내렸으리라. 오가며 그 나무를 볼 때마다, 바람을 타고 한길을 건너 날아와 망루 구멍 속으로 들어갔을 그 씨앗을 생각할 때마다, 몇십 년 전, 이 읍에 와 두리번거리며 걷던 소년이 떠오르는 것이다. (p.40)

 

아직 어린 벽오동 나무가 어둠 속에서 제법 퍼진 잎을 너울대는 듯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다 그렇게, 힘겹게 제 한 생을 버팅기려고 한다. (p.43)

 

변하지 않는 건 하늘뿐이다. 은용은 층계를 내려오기에 앞서 하늘을 본다. 말 그대로 가을 하늘이다. 구름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안 움직인 것 같다. 솜사탕을 뜯어서 펼쳐놓은 것 같은 구름. 이부자리를 정리해야겠구나. 그러다가 픽, 웃음이 나왔다. 맑디맑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며 하필 묵어서 무거워진 솜을 탈 생각을 하다니.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은 참 우스워. 자기가 생각한 것만큼만 보려고 해.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몸담은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 사람이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제 생각과 잇닿은 곳에서만 반응해 엉뚱해 보이듯,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온 은용에겐 모든 게 살림살이와 결부되었다. 날씨가 좋으면,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식중독 이야기가 나오면, 당분간은 어패류는 사지 말아야겠구나. (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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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1960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태어났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2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82년 중편소설 《우리들의 떨켜》를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작품을 많이 쓰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95년에 제19회 오늘의 작가상, 1998년에 한국일보문학상, 2001년에 현대문학상, 2006년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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