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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 현대 인문, 교양, 역사/1. 동양 - 인문, 교양, 역사

장자, 나를 깨우다 - 이석명 (북스톤)

by handaikhan 2023. 7. 19.

이석명 - 장자, 나를 깨우다

 

목차

1장 自由 낯선 것과 마주하다
물고기가 새로 변화한 까닭

 

이야기에서는  물고기가 새로 변한 외형적 변화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물'이라는 제한된 상황에 갇혀 있던 물고기가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된 질적인 변화, 여기에 초점이 있다. 장자가 보기에 물고기와 새는 존재의 차원이 다르다. 물고기는 물을 벗어나면 옴짝달싹 못한다. 바다의 왕인 고래도 바다를 벗어나면 개미의 밥이 될 수밖에 없듯이, 물고기는 '물'이라고 하는 지극히 제한된 상황에 구속돼 있다. 그러므로 곤이 아무리 커도 물이라는 구속에 갇힌 제한된 존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곤은 장자가 바라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장자는 한 줌의 부와 권세를 잡고 위세를 과시하려 드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곤의 가련함을 보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세와 부귀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외적인 '거대함'에 불과하다. 내면의 변화, 영혼의 질적 상승이 없는 사람은 외물에 갇혀 평생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곤이 봉새로 변했다는 것은 기존의 구속과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곤은 물을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맘음대로 훨훨 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기존의 낡은 세계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붕새는 수평적 삶을 뛰어넘어 수직적 삶으로 새롭게 진입했음을 상징한다.

자유와 깨달음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일단 자발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또는 놓여 있는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물고기 곤에서 붕새로 변했다는 것은 자발적 각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곤이 물고기 상태에 만족하고 물속에서 아무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유유자적 노닐었다면 아마 영원히 그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곤은 물고기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고 물이 주는 불편함과 제한을 인식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새가 되기를 꿈꾸었다. 어쩌면 수백 년 수천 년이 걸렸을 수도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물고기 곤은 끊임없이 갈망하고 염원했다. 새가 되어 바다에 비치는 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로운 붕새가 되었다.

물고기가 새로 변했다는 것은 일단 자유의 경지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물이라는 한게를 벗어나 허공을 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점에서 붕은 질적인 비약 내지는 존재 차원의 상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붕이 얻은 자유는 아직 미약하고 불완전하다. 이대로라면 매미나 참새와 무엇이 다른가? 비록 붕새가 수천 리에 달하는 몸집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단지 새가 된 것에만 만족한다면 다른 새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 거대함에 걸맞은 또 다른 질적인 비약이 필요하다.

이에 장자는 다시 붕새의 힘찬 비상을 독려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장자는 대붕의 비상에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형세'다. 장자는 말한다. "바다가 일렁여 큰 파도가 일면 이 새는 남명으로 날아갈 준비를 한다." 붕새는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높이 날아오를 수 없다. 따라서 태풍 같은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출렁일 때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갈 준비를 한다. 마침내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면 그것을 잡아타고 9만 리 상공으로 솟구쳐 날아오른다.

또 장자는 말한다. "물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이는 붕새가 9만 리 상공까지 날아오른 이후에야 비로소 남명으로 향하게 되는 이유를 말한다. 마루 위의 오목한 곳에 물을 부어놓고 잔을 띄우면 잔이 바닥에 둘러붙고 말듯이,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붕새의 거대한 날개를 실을 힘이 없다. 붕새는 9만 리 상공에 솟구쳐 배 아래로 풍부한 바람이 떠받치게 될 때 비로소 먼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장자의 관점에서 인생의 성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외적인 환경, 장자는 이를 명이라 불렀다. '명'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내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회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세>편에서 말한다.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편안히 명에 따르라."

그러면 곤이 붕새로 변한 다음 또다시 9만 리 상공으로 날아올라간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9만 리 상공에 도달한 후 6개월 동안 날아서 다시 '남명'으로 내려온다는 이야기는 또 무슨 의미인가?

9만 리 상공으로의 비상과 6개월 동안의 비행은 험난하고도 긴 수행과정을 상징한다. 선불교에서 돈오점수를 말하듯이, 물고기에서 새로 변화한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과정이 더욱 절실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붕새는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올라타 구름을 뚫고 비상했고, 거기서 다시 6개월의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9만 리 상공까지 날아오른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날아간다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처럼 험난한 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붕새는 남명에 도달한다.

남명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남쪽에 있는 깊은 바다' 정도의 의미다. 그러나 장자의 구상에서 남명은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붕의 출발지가 북명이고 도착지가 남명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북쪽이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움을 상징한다면, 남쪽은 태양이 머무는 밝음이다. 이를 정신 차원으로 환원하면 북명은 일상에 갇혀 있는 어두운 '미몽'의 상태를, 남명은 미몽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얻은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북명과 남명은 모두 지상의 세계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즉 이 우화는 대붕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지만 결국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구도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현세간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장자는 비록 자유를 사랑하고 초월을 꿈꾸지만 결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혼의 변화를 추구하고 자유로운 정신 경지를 지향하지만 홀로 그 세게를 향유하고자 하지 않았다. 대붕이 9만 리 상공으로의 비상과 6개월 동안의 기나긴 비행을 마감하고 결국 남명으로 내려왔듯이, 장자 또한 오랜 수양과 사유를 통해 깨달은 정신 경지를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p.23-27)


‘작음’에 자신을 가두는 자여!

 

하루 종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폴짝거리며 소소한 즐거움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매미와 비둘기로서는 대붕의 거대 행위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만ㄴ이 최대 관심사인 그들에게 대붕의 거대 행위는 부질없는 짓거리로 보일 뿐이다.

대붕은 '큰' 존재인 반면 매미와 비둘기는 '작음'을 상징한다. 또한 이 '작음'은 일상적 삶에 매몰돼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산다. 한 뼘짜리 현실 세계에 속박된 줄도 모른 채.

그러나 쉽사리 넘겨짚지는 말자. 여기서 문제는 '작음' 자체가 아니다. 작은 것이 작게 되는 까닭은 바로 자신에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작음에 안주하고 만족하며, 또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생각한다. 그 결과 변화를 거부한다. 아니, 변화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곤이 붕으로 변화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초월이었다. 곤은 이미 몸집이 수천 리나 되는 거대한 존재였지만 자신의 한게를 인식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물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변화를 꿈꾸었다. 한 톨의 알에서 시작해 그토록 거대한 몸이 되기까지 곤은 항상 변화를 꿈꾸며, 변화를 준비했다.

그런데 매미와 비둘기는 자신들의 '작음'에 갇혀 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갇힌 몸'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침에 잠깐 생겨났다 사라지는 버섯이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여름 한철 잠시 머무는 매미와 쓰르라미가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듯이 그들은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다. (p.29-32)


나를 가둔 꿈에서 깨어나라

 

어느날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즐기면서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깨어나니 놀랍게도 여전히 장자 자신이었다. 모르겠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것인가?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물화'라 한다. (p.34)

 

장자는 왜 하필 '나비 꿈'을 설정했을까? 왜 위엄 있는 독수리도 아니고 소리가 아름다운 꾀꼬리도 아닌, 작고 나약한 나비인가? 아마도 '나비'가 지닌 특별한 상징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첫째, '변화'다. 꿈틀대며 힘겹게 땅 위를 기어 다니던 애벌레, 사람들이 징그럽고 더럽다고 기피하던 애벌레, 그 힘겨운 삶을 살던 애벌레가 시간의 긴 사다리를 타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하는 것이다. 본원적으로 애벌레와 나비는 동일한 존재이지만 둘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추함에서 아름다움으로!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탈바꿈은, 적어도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비약적인 변화가 실현된 것이다.

둘째, '자유'다. 애벌레가 땅에서의 힘겨운 삶을 마감하고 마침내 나비가 되는 순간, 나비는 무엇을 느낄까? 힘겹게 꿈틀거리던 무거움을 벗어던지고 가볍게 날아오를 때, '기어 다님'의 구속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 나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를 느낄 것이다. 감히 추측건대 해탈한 고승의 자유로움에 비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숨겨진 욕망이 전이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비는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소망을 충족하기 위한 무의식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비는 <소요유>편에 나오는 '대붕'과 유사한 이미지다. 나비는 애벌레의 한계, 즉 '기어 다님', '추함', '지상에 매인 존재' 등과 같은 온갖 제약과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자유로운 존재로 변신한 것이다. 대붕이 곤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듯이. (p.37-38)

 

이 제물의 세계에서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다가 쉼 없이 출렁이며 시시각각 서로 다른 모양의 파도를 만들어 내듯이, 제물의 바다에서 사물들은 존재의 출렁임에 따라 부단한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떤 사물도 그 사물로 고정될 수 없다. 현재의 나는 언젠가는 바위가 될 수도 나무가 될 수도 있다.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p.39)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꿈'인지도 모른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우리의 삶이 온갖 거짓된 이념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단순한 아집과 편견들로부터 시작해, 사회나 국가에 의해 조장된 온갖 인위적 이념과 관념들이 우리의 삶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이 거대한 꿈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하며 그 길을 제시한다. 꿈에서 깨어나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선사 임제는 말한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라는 말은 우리의 자유로운 정신을 압박하는 모든 거짓된 이념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권위의 무게로부터, 안락함의 위안으로부터, 익숙함의 편리함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신이 특정 시스템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 시스템을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환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신의 성심을 통해서만 모든 타자와 관계하려는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깨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꿈속에 있다는 사실부터 자각해야 한다. 꿈을 꿈으로 파악하는 자발적 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대붕이 북명에서 남명으로 가는 비상을 준비하듯이, 우리 또한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진입할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p.42-4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마음을 버려라-임제 - 오쇼 라즈니쉬 (손민규 옮김, 태일출판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 강신주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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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고, 공을 잊고, 명예를 잊는다

 

저 천지의 바람을 타고 육기의 변화를 부리며 무한한 경지에서 노니는 자라면 그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p.45)

2장 是非 ‘옳다’ ‘그르다’의 덫에서 벗어나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정말로 아는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庸詎知吾所謂知之非知邪(용거지오소위지지비부지사)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용거지오소위부지지비지사)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원숭이들

 

성인은 옳다 그르다 하는 편견을 무너뜨리고 편안히 천균에 머문다. 이를 일컬어 양행이라 한다. (p.54)

 

열자

조삼모사 (간사한 꾀로 남을 희롱하거나 속이는 행위나 말)

성인이 지혜로 우매한 대중을 농락하는 것 또한 저공이 지혜로 원숭이들을 농락한 것과 같다.

 

장자

장자가 비판하는 대상은 저공이 아니라 원숭이들이다. 원숭이들은 아침에 세 개를 준다고 했을 때는 모두 화를 냈고, 아침에 네 개를 준다고 했을 때믄 모두 기뻐했다. 원숭이들은 "아침에 세 걔"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저녁에 네 개"라는 말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단견에 빠져 있는 그들로서는 뒤에 이어지는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받으나 저렇게 받으나 총합은 같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좁은 시야에 갇힌 원숭이들로서는 아침과 저녁을 동시에 고려할 통합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숭이들은 그러한 자기네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강한 아집, 즉 성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형식만 다를 뿐인 동일한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경박함을 보인 것이다. 어리석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저 원숭이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대개 저마다의 입장에서 각자의 안경을 쓰고 사태를 판단한다. 자신의 시각과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에 근거해 해석하고 판단하려 든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그렇게 하면 못마땅해한다. 심지어 상대방에게 그가 갇혀 있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바라보라고 훈수를 둔다. 자신도 똑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는 눈을 감은 채, 나의 주장과 판단이 근시안적일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남의 눈에 티끌은 잘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꼴이다. 세상의 시비 문제는 대개 이런 데서 발생한다.

그러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자는 말한다. "옳다 그르다 하는 편견을 무너뜨리고 편안히 천균에 머물러야 한다." 원숭이들은 성심이라는 견고한 성에 갇혀 있었다. 성심은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고,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굳건한 믿음이며, 타인의 접근을 완고히 거부하는 아집의 성이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이러한 성심을 깨뜨리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천균'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균'이란 저절로 그러한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당나라 시대 장자 주석가 성현영은 "천균이란 자연의 균등한 이치를 말한다. 도에 통달한 성인은 마음이 텅 비어 있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시비 이전의 상태에서 시비를 하나로 조화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균형 잡힌 마음의 상태에서 지식의 작용을 그치게 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한다." 옳다 그르다 하는 지식의 작용이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하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한 조화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천균은 일종의 '판단 중지'와 같다. 나의 생각만이 옳다는 아집 또는 성심의 작동을 멈추고 타인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유보적 태도다.

'양행'은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가 아니라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양가적 입장이며, '이것은 저것일 수 있고 저것도 이것일 수 있다'는 전향적 사고다. (p.56-5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열자 - 열구어 (신동준 옮김, 인간사랑)

원시 유가 도가 철학 - 판둥메이 (남상호 옮김,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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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판단 기준이 있는가?

 

미꾸라지는 늪지가 편안하지만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건강을 해친다. 원숭이는 높은 나무 사이를 자유자재로 뛰어다니지만 사람은 나무꼭대기에 올라가면 오금이 저려 부들부들 떤다. 올빼미는 쥐를 잡아 맛있게 먹지만 사람들은 쥐를 보면 기겁한다. 사람들은 절세미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사슴이나 새들은 죽어라 달아난다.

이처럼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바른 거처, 마땅한 음식, 좋아하는 미색에 대한 기준은 종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4대 우상론'은 애초 참된 앎을 확보하기 위해 제기되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 대상을 바라볼 때인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한계를 말한다. '동굴의 우상'은 각자 개인이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대상을 인식하는 한게를 가리킨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다. 명칭만 있고 존재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정의한 표현이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극장의 우상'은 전통이나 유명인의 권위를 이용해 자기 논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베이컨은 이들 4대 우상을 제거해야 비로소 순수 경험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참된 앎이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자의 주장은 베이컨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 조금 다르다. 넓게 보면 장자 역시 '진지' 즉, 참된 앎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상대주의적 논의를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앎을 얻으려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각자가 서 있는 현재의 좌표를 포기하고 '나의 눈'을 떠나 타인의 관점에 서서 바라볼 수 있는 사유의 유연성을 지닐 때 비로소 참된 앎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p.64-6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학문의 진보 - 베이컨 (이종구 옮김,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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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으면 너는 그른가?

 

명철한 이성과 철저한 분별력으로 옳고 그름을 명확히 따지는 일은 수학이나 논리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현실에서 옳다 그러다는 결국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옳고 그를 뿐이지, 무언가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판단은 크게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에 갇혀 있고, 작게는 '개인'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갇혀 있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객관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

우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우리 모두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인의 관점에서는 그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뿐. 이는 곧 각자의 성심 또는 편견에서 벗어나 도의 자리, 즉 자연 자체의 관점에서 바로보는 길로 향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p.70-71)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법

 

3장 價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 머물다
누구의 기준으로 나의 쓸모가 정해지는가?

 


쓸모가 아니라 존재가치를 생각하라
쓸모를 초월하는 자리에 머물라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라

4장 不具 갖추지 못한 자의 온전함을 보다
덕이 충만하면 형태를 잊는다
추함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으라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덕으로 판단하라

5장 養生 마음의 두께를 없애다
빈 마음으로 빈 공간에 들어가라
빈 배처럼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되어라
중(中)의 의미를 기억하라

6장 命 자연의 흐름 안에 편히 머물다
나를 스치는 것들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지 말라
명(命)을 알면 자유로워진다

7장 生死 죽음을 받아들여 죽음을 극복하다
나뭇잎이 진다고 통곡할 것인가?
삶을 미루어 죽음을 짐작하지 말라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죽음을 찬양하는 무리들

8장 修養 마음을 비워 마음을 닦는다
마음을 굶겨라
육신의 욕망을 무너뜨리고, 눈과 귀의 인식을 물리쳐라
생사를 잊고 ‘밝음’을 얻다

9장 眞人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다
나를 잊음으로써 ‘나’를 찾다
눈먼 사람에게는 화려한 무늬를 보여줄 수 없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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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 이석명 (민음사)

노자, 비움과 낮춤의 철학 - 이석명 (천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