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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길위의 생 - 나쓰메 소세키 (김정숙 옮김, 이레)

by handaikhan 2023. 2. 2.


나쓰메 소세키 - 길 위의 생 (한눈팔기) (1915년)

 

아내는 이때의 쓸쓸함이 마음에 걸려 며칠 뒤 겐조에게 옷감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보, 당신 옷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거 어떠세요?
아내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겐조의 눈에는 어설픈 기교로 비춰졌다. 그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의식적으로 그녀의 애교를 무시하려고 했다. 아내는 쓸쓸히 자리를 떴다. 그녀가 사라진 후, 그는 아내를 외롭게 만들어버린 자신의 심리상태가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결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냉정한 인간이 아니야. 내가 지닌 따뜻한 마음을 밖으로 못 드러내게 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거라구.
아무도 그런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없는데도요.
당신이 늘 그렇게 하고 있잖아.
아내는 원망스러운 듯 겐조를 보았다. 겐조의 논리는 아내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당신 요즘 아주 이상해요. 어째서 온당하게 저를 관찰해 주시지 않는 거죠?
겐조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느껴지는 자신의 냉정함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도 어쩌지 않는데, 자기 혼자서 괴로워하고 계시니까 말도 안 돼요.
두 사람은 피차 터놓고 상대방에게 자기를 말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현재의 자신을 뒤돌아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겐조가 새로 찾아낸 일은 그의 학문이라든가 교육 경험으로 볼 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거기에 허비하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인다는 건 지금의 그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인가를 완수하고, 또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였다. (p63-64)

 

겐조는 자신의 배후에 또 다른 세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 세계는 평소의 그에게는 먼 과거의 지나간 일이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갑자기 현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질을 띠고 있었다.

옛날, 그 세계의 사람이었던 그는 그후 스스로의 힘으로 그 세계를 훌훌 벗어나올 수 있었고, 거기서 벗어난 후로는 오랫동안 도쿄 땅을 밟지 않았다. 겐조는 지금 다시 그 속에 되돌아가 오랫만에 과거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싫은 감정과 약간의 그리움이 뒤섞인 상태였다.

겐조는 또 그 세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때때로 그의 앞을 가로지르는, 젊은 피와 반짝이는 눈을 가진 청년들이 있었다. 그는 그 청년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래의 희망을 밝혀주는 종소리처럼 맑디 맑은 그 소리가 겐조의 어두운 마음을 약동시켰다.

실은 나도 청춘 시절을 전부 감옥에서 보냈으니까.

감옥이라니요?

학교, 도서관. 생각하면 양쪽 다 지옥 같은 곳이야.

그러나 내가 만약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었을 테지.

겐조의 말은 반은 변명조였고, 반은 자조적이었다. 그는 과거의 감옥생활에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미래의 자기를 쌓아올려야 했다. 그게 그의 방침이었고 확신이었다.

그러나 그 방침에 따라 앞으로 전진해간다는 게 지금의 그에게는 헛되이 늙어간다는 결과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p85-87)

 

형은 과거의 사람이었다. 이미 그에게는 밝은 앞날이란 없었다. 말끝마다 옛날을 회상하려는 그와 마주앉은 겐조는, 자기가 나아가야 할 생활의 방향에서 거꾸로 끌려나오는 느낌이었다.

외로워.

겐조는 형의 길동무가 되기에는, 미래의 희망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현재의 그는 몹시 외로움을 탔다. 그 현재로부터 점점 다가갈 미래 역시 외로움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p109) 

 

누님은 이제 좋아지셨습니까?

응 정말이지 천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더라. 그렇게 괴로워하다가도 또 금방 나으니까.

그럼 이제 말도 해요?

하다마다.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예전 그대로. 누님 생각으로는 시마다가 오누이한테 가서 그런 지혜를 얻어가지고 온거라는데 말이야.

그는 옛날에 있었던 푸른 논과 그 사이로 곧게 뻗어 있던 샛길을 떠올렸다. 논이 끝나는 곳에 초가집 서너 채가 옹기종기 보였다. 방갓을 벗고 평상에 걸터앉아 우무가사리를 먹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앞에는 벌판같이 넓은 종이 공장이 있었다. 그곳을 돌아 동네로 접어들면 폭 좁은 강에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강 양쪽 옆으로 높다란 돌방축이 쌓여 있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면 강물은 의외로 멀리 보였다. 다리 옆에 있는 고풍스러운 공중목욕탕 휘장과 그 옆 야채가게 앞에 주르르 놓여져 있던 가지는 젊은 시절의 겐조에게 늘 히로시게의 풍경화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한바탕 꿈처럼 깨끗이 사라져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남아 있는 건 오직 대지뿐이었다.

언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인간의 변모에만 정신을 쏟고 있던 겐조는 그보다 더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에 놀라고 말았다.

나 자신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

늙어가기는 해도 의외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 변해가기는 해도 날마다 번영해가는 교외의 모습이 저도 모르게 대조적으로 비쳤을 때, 겐조는 이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p206-207) 

 

개인으로서의 노기씨는 의를 지키고 정이 깊은, 실로 훌륭한 이눌일세. 그러나 총독으로서의 노기씨가 반드시 적임자일까 하는 문제에 이르면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네. 개인의 덕망은 자신과 가까이 접촉하는 사람에게는 잘 미칠지 모르겠지만,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에는 부족한 법일세. 그걸 생각하면 역시 수완이라구. 수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을 테니까. (p230) 

 

저는요, 어떤 남편이라도 괜찮다구요. 그저 저한테 잘해 주기만 한다면.

도둑놈이라도 괜찮아?

그렇구말고요. 도둑놈이면 어떻고 사기꾼이면 어때요. 그저 마누라 애지중지 위해 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그만이죠. 아무리 훌륭하고 존경받는 인간이면 뭐해요? 집에서 못하는 남자는 아내한테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죠. (p231)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일단 한 번 일어난 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그저 여러가지 형태로 모양만 바꾸는 거니까 남도 나도 느끼지 못할 뿐이야. (p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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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1월 11일 ~ 1916년 1월 9일)

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四谷)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市ヶ谷学校)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錦華小学校)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成立学舎)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七草集)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大助)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榮之助)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和三郎)의 아내 도세(登世)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菅虎雄)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文学論)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修善寺の大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雑司ヶ谷霊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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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1월 11일 ~ 1916년 1월 9일)

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四谷)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市ヶ谷学校)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錦華小学校)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成立学舎)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七草集)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大助)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榮之助)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和三郎)의 아내 도세(登世)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菅虎雄)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文学論)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2].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修善寺の大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雑司ヶ谷霊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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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한눈팔기 - 나쓰메 소세키 (조영석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한눈팔기 - 나쓰메 소세키 (서은혜 옮김, 을유 세계문학)

한눈팔기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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