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비곗덩어리 - 모파상 (임미경 옮김, 열린책들)

by handaikhan 2023. 2. 5.

열린책들 세계문학 274

기 드 모파상 - 모파상 단편선 (19세기)

목차

시몽의 아빠

비곗덩어리

달빛

의자 갈이 하는 여자

시골살이

두 친구

보석

여로에서

쥘 삼촌

노인

전원시

목걸이

귀환

투안 영감

마드무아젤 페를

오를라

파리

쓸모없는 아름다움

누가 알랴?

역자 해설: 뜨거운 냉소를 지닌 작가
기 드 모파상 연보

<모파상 - 시몽의 아빠>

하지만 세간의 평판이란 한번 땅에 떨어지면 주워 담기 힘들고, 또 언제라도 쉽게 상처가 나는 법이라서, 라 블랑쇼트가 몹시 몸을 사리는데도 불구하고 마을에는 이미 뒷말이 돌고 있었다. (p.17)

 

<모파상 - 비곗덩어리 (1880년)>

프랑스군 패잔병 행렬이 꼬리까지 마침내 센강을 다 건너왔다. 이들은 생스베르와 부르아샤르를 거쳐 퐁토드메드로 향하고 있었다. 행렬 맨 뒤에서는 절망한 장군이 눈앞의 오합지졸로는 뭔가 시도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자신도 이 대대적인 패주에 그저 넋이 나간 채 부관 두 명 사이에 끼여 걸어갔다. 그동안 승리에 익숙했던 이 나라는 그 대단한 용맹이 무색하게도 무참하게 패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깊은 정적이, 겁먹어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기다림이 이 도시를 떠돌았다. 장사 수완을 붙이다 보니 혈기가 말라 버린 배불뚝이 부르주아들은 정복군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혹시 자기 집 주방의 꼬치구이용 쇠꼬챙이나 큼지막한 부엌칼들이 무기로 비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삶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는 적막했다. 이따금 주민 하나가 이 적막감에 지레 움츠러들어 담장에 몸을 바싹 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기다림의 불안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차라리 어서 적이 나타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p.24)

(참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7월 19일 ~ 1871년 5월 10일)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제2제국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보불전쟁(普佛戰爭)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제2제국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세워졌으며,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연방 내 모든 회원국을 통합해 독일 제국을 세웠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불거진 엠스 전보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와 프로이센 국민간에 감정이 격해지고 여론이 악화되자 프로이센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고 유럽내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패배시킨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프랑스와의 전쟁 명분만 찾고 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세력확장을 경계하던중 대독일 감정이 악화되자 호전적인 측근들이 나폴레옹 3세를 부추킴으로 인해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당전투에서 패배한후 나폴레옹 3세는 생포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파리의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폐위 당했으며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71년 1월 18일, 파리 시 교외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수립이 선포된후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초대 독일 제국 황제로 추대되었다. 항전하던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1871년 1월 28일에 항복했고 같은해 5월 10일에 양국간 종전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종료되었다. 승전으로 인해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하였으며 50억 프랑의 전쟁 보상금을 받았다.
이 전쟁을 통해 프로이센 군대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많은 국가에서 프로이센처럼 군에 참모본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 제1군사강국이 되었으며 세계적인 군사사상의 흐름도 프랑스로부터 프로이센으로 바뀌게 되었다. 독일-프랑스 관계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한편 로마에 상주하던 프랑스 군이 참전을 위해 퇴각하자 이탈리아 군이 로마를 점령하였고 교황청의 세속권력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

 

인근의 길은 모조리 독일군으로 메워졌다. 그들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박자에 맞춰 포석을 딱딱 울려 대며 이 도시로 들어오고 있었다.

목구멍을 긁어 소리를 내는 낯선 언어의 구령들이 길게 늘어선 가옥들을 따라 거리를 거슬러 올라갔다. 집들은 쥐죽은 듯 인기척이 없었지만, 숨은 눈들은 닫힌 덧문들 뒤에서 이 승리자들을 지켜보았다. 이제 이들은 이 도시의 주인으로, '교전권'에 따라 이 도시 안의 재산과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빛을 가린 방 안에 들어앉아 공황에 빠졌다. 천재지변을 만날 때, 땅이 쩍쩍 갈라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대재앙과 맞닥뜨려 그 어떤 지혜나 힘도 무용지물일 때 사람들은 그런 공황을 느끼곤 한다. 사실 이런 심리 상태는 만물의 기존 질서가 뒤집힐 때, 어디서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을때, 인간의 법이든 자연의 법이든 법의 보호를 받던 모든 것이 미쳐 날뛰는 잔혹한 폭력의 손아귀에 굴러떨어질 때면 나타나기 마련이다. 집들이 무너져 내려 마을이나 도시 주민 전체가 그 파편 더미에 파묻히고 마는 지진, 범람한 강물이 농부들을 삼키고 죽은 소며 지붕에서 뽑혀 나온 들보까지 한꺼번에 뒤섞어 휩쓸어 가는 홍수, 혹은 승리한 구대가 방어에 나선 사람들을 살육하고 남은 사람은 포로로 끌고 가면서 무훈을 내세워 약탈하고 대포를 울려 신에게 감사를 올리는 전쟁, 이런 것 역시 그와 같은 참화들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하늘의 보호를 믿고 인간의 이성을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모든 믿음이 날아가고 만다. 영원한 정의를 믿어 봤자 뒤통수나 얻어맞는 것이다. (p.25)

 

이 도시 역시 점차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바깥나들이를 피했지만, 대신 프로이센 병사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우글거린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대기 속에는 뭔가가가 떠돌았다. 미묘하고 낯선 어떤 것, 참아 줄 수 없는 이방의 공기가 섞여 들어 냄새처럼 퍼져 나갔다. 그것은 침략의 냄새였다. 그 냄새가 집집마다 스며들고 광장들을 채웠다. 그것은 음식의 맛을 변질시켰고, 사람들에게 아주 먼 곳, 위험한 야만족의 땅에 와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p.27)

 

어떤 이념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몇몇 대담한 사람들에게 매번 무기를 쥐여 주는 것은, 사실 이와 같은 이방인에 대한 증오심이다. (p.28)

 

오후 1시경 루아조가 정말이지 위장이 텅텅 비어 쪼그라든 것 같다고 대놓고 말했다. 모두가 한참 전부터 같은 고충을 겪는 참이었다.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욕구가 더욱 격렬해지면서 우선 대화가 잡아먹혔다.

이따금 누군가 하품을 하면, 거의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하품을 했따. 저마다 돌아가면서 성격과 몸에 붙은 태도와 지위에 따라 턱뼈가 떨어지게 입을 벌리거나, 아니면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가 흰 김이 퍼져 나오는 입 구멍을 재빨리 손을 들어 가렸다.

비곗덩어리는 여러 번 몸을 굽혀 뭔가를 찾아 몇 겹의 속치마 아래를 더듬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듯 주위 사람들을 슬며시 둘러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몸을 세웠다. 승객들은 창백한 얼굴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아조가 불쑥 입을 열어 햄 한 조각을 구할 수 있다면 천 프랑이라도 내놓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어 남편을 나무랐고, 이어서 다시 기죽은 얼굴이 되었다. 이 여자는 돈 쓰는 일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고통스러워했고, 그 주제에 대해서라면 농담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백작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힘들어지는군. 먹을거리 챙겨 올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자책하고 있었다.

코르뉘데는 수통에 럼주를 가득 채워 온 참이었다. 그가 럼주를 권했다. 다들 싸늘하게 거절했다. 루아조만이 수통을 받아 두 모금 마신 뒤 다시 돌려주면서 말로 인사치레를 했다. "그래도 좋네요 몸ㅁ을 데워 주고 허기도 잊을 수 있으니." 술기운이 작은 배에서 돌자 기분이 나아진 루아조가 농담이랍시고 노랫말 속의 작은 배에서처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노랫말은 승객 가운데 제일 살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내용이었다. 돌려서 한 말이긴 했지만, 비곗덩어리를 암시하는 그 농담은 교양 있는 양반네들을 질색하게 했다. 모두가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코르뉘데 혼자만 실실 웃었다. 두 수녀는 묵주 세는 일을 이미 접어 버린 터라 넓은 소맷자락 속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집스레 눈을 내리깐 품새로 보아 코르뉘데가 그들에게 던져 준 고통을 하늘에 바치는 중인 게 분명했다.

3시쯤, 마을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데, 마침내 비곗덩어리가 재빨리 몸을 굽히더니 좌석 밑에서 흰 상보를 덮은 큰 바구니를 꺼냈다.

여자는 바구니에서 우선 작은 자기 접시와 은제 잔을 꺼내고, 이어서 큼직한 도기 단지를 꺼냈다. 닭 두 마리를 토막 내어 요리한 냉육이었다. 차게 식혀서 몽글몽글해진 육즙이 고깃덩어리 사이를 넉넉히 채우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함께 싸온 뭔가 다른 맛있는 것들, 파테, 과일, 사탕 과자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음식을 준비해 온 것으로 보아 사흘간의 여행 중에 여인숙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 같았다. 뭉치로 싸놓은 음식들 사이로 술병 네 개가 주둥이를 삐죽 내밀었다. 여자는 닭 날개를 하나 들더니 섬세한 입맛을 과시하듯 작은 빵을 곁들여 먹기 시작했다. 노르망디에서 '레장스'라고 부르는 빵이었다.

모두의 눈이 여자에게로 모였다. 음식 냄새가 퍼져 나가면서 콧구멍들의 치수를 넓혀 놓았고 입안에는 침이 흥건히 고이게 했다. 다들 침이 넘어가지 않도록 귀 아래 턱관절을 고통스럽게 수축시켜야 했다. 그러잖아도 이 여자를 향해 있던 부인네들의 경멸감은 이제 사나워지기까지 해서, 여자를 죽여 버리든가 아니면 덥석 들어 그 은제 잔이며 바구니며 음식물과 함께 마차 바깥 눈 더미 위에 메다 꽂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루아조는 그 닭 냉육을 눈으로 삼키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준비를 잘해 오셨네요. 우린 부인만큼 대비하지는 못했지 뭡니까. 언제나 모든 것에 대비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법이죠."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좀 드실래요? 아침부터 계속 빈속이니 힘드시겠어요." 루아조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렇죠, 솔직히 어떻게 사양하겠습니까. 못 하죠. 전쟁 때는 전쟁 때땁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인?" 그러고는 주위를 힐끔 돌아보면서 덧붙였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일 경우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기쁜 일ㅇ리죠." 그는 바지에 얼룩을 만들지 않으려고 갖고 있던 신문을 펼치더니, 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는 칼을 꺼내 육즙이 듬뿍 묻은 넓적다리 하나를 칼끝으로 찍어 들고 이로 살점을 쭉 찢어 입안 가득 우물거리면서 만족스러워했다. 그 만족감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마차 안 여기저기에서 탄식의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비곗덩어리가 겸손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맞은편 수녀들을 향해 음식을 함께 들자고 권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녀들은 음식을 받아 감사의 말 비슷한 것을 웅얼거린 뒤 눈도 들지 않고 재빨리 먹기 시작했다. 노르퀴데 역시 옆자리 여자가 음식을 권하자 사양하기는 커녕 신문을 척척 펼쳐 무릎 위에 깔았고, 그럼으로써 맞은편 수녀들과 더불어 이제 한 상 벌려 놓은 형국이 되었다. 

입들이 쉴 새 업이 열렸다 닫히면서 맹렬하게 욱여넣고 씹고 삼켜 댔다. 루아조는 자기 자리에 앉아 열심히 우물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춰 아내에게 저 상차림에 끼어들라고 부추겼다. 아내는 한참을 버텼는데, 버티느라 배 속에 경련까지 일으키다가 결국 굴복했다. 그러자 남편은 말투를 한껏 둥글려 그 '상냥한 길동무'에게 자기 아내에게도 작은 고기 조각을 하나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길동무가 대답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그러면서 다정한 미소와 함께 냉육이 담긴 단지를 내밀었다.

난처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첫 번째 보르도 포도주 병을 땄을 때였다. 잔이 은제 잔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한 명씩 포도주를 마신 뒤 잔을 닦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다만 코르뉘데는 옆자리 여자의 입술 자국이 여전히 촉촉하게 남은 자리에 자기 입술을 냉큼 갖다 냈는데, 이웃을 친절하게 대하려는 일념으로 그런 게 분명했다.

이렇게 해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 포위되고, 음식물이 풍기는 냄새에 공략당한 브레빌 백작 부부와 카레라마동 부부는 탄탈로스의 이름이 붙은 이 끔찍한 형벌에 고통스러워했다. 별안간 방적 공장주의 젊은 아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낯빛이 마차 바깥의 눈만큼이나 새하얘져 있었다. 두 분이 스르르 감기더니 고개가 앞으로 꺾였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남편은 당황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각자 허둥거리는 사이에 나이 든 수녀가 기절한 여자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비곗덩어리의 은잔을 여자의 입술 사이로 기울여 포도주 몇 방울을 흘려 넣었다. 예쁜 부인이 움질거리더니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수녀는 여자가 다시 기절할까 봐 포도주 한 잔을 다 마시게 한 뒤 덧붙였다. "속이 비어서 그래요. 달리 이유가 없죠."

그러자 비곗덩어리가 얼굴이 벌개지도록 당황해서는 배를 곯고 앉은 네 승객을 향해 말을 더듬거렸다. "어쩌면 좋아, 제가 이 신사 숙녀 분들께 감히 권해도 될는지..." 그러더니 자기 말을 혹시 모욕으로 받아들일까 봐 말을 뚝 멈췄다. 루아조가 나섰다. "그럼요. 자, 부인들, 체면치레는 넣어두시고 호의를 받아들이세요, 어서! 밤을 보낼 집을 찾을 거라는 보장이나마 있나요? 지금처럼 간다면 내일 정오 전에 토트에 도착하기는 글렀어요." 그렇지만 그 '신사 숙녀 분들'은 망설였다. 어느 한 사람도 "잘 먹겠습니다"라면서 음식을 먼저 받아 드는 책임을 떠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백작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는 비곗덩어리를 향해 몸을 돌려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의 태도로 말했다.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인."

첫걸음을 떼어 놓기가 어려웠을 뿐이었다. 일단 루비콘강을 건너자, 모두 망설임 없이 먹어 댔다. 바구니가 바닥을 보였다. 그래도 거위 간 파테, 종달새 고기 파테, 훈제 소 혓바닥 한 조각, 크라산 배 몇 알, 퐁레베크 치즈 한 덩이, 쿠키 몇 조각이 남아 있었고, 오이 양파 피클도 한 보시가 있었는데, 사실 비곗덩어리도 여자들이 대개 그렇드시 이런 야채를 좋아했다.

음식을 얻어먹으면서 음식 주인인 그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말을 나눴는데, 처음에는 주저하면서, 이어서 비곗덩어리가 응대를 싹싹하게 잘해 주는 덕분에 훨씬 더 편안하게 말을 건넸다. 사교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연마한 브레빌 백작 부인과 카레라마동 부인은 우아함을 곁들여 친절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백작 부인은 아주 고귀한 부인들이 상대가 아랫사람일 경우 기어이 베풀고야 마는 그 관대한 호의를 과시하여 다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굳센 루아조 부인은 여장부 기질이 있는 터라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했고, 말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먹기는 많이 먹었다. (p.39-4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신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

..............................................................................................................................................................

 

전쟁은 평화로운 이웃을 공격하면 만행이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라면 신성한 의무죠. (p.55)

 

카레라마동 씨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비록 그는 유명 장군들에게 열광하긴 했지만, 이 촌부의 말도 일리는 있어서, 전쟁을 한답시고 군사들을 무위도식하게 놓아두고, 그 결과 먹여 살리느나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비생산적인 상태로 보유하고만 있는 그 군사력을 큰 공장의 노동력으로 사용한다면 한 나라에 얼마나 이익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공장들은 앞으로 수백 년간은 여전히 노동력이 필요할 터였다. (p.55)

 

두 사람은 프랑스의 미래를 전망했다. 한 사람은 오를레앙 당에 희망을 걸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미지의 구원자를 기대했다. 이러다가 나라 꼴이 절망적인 지경이 되면 어떤 영웅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뒤 게클랭이나 잔 다르크 같은 인물, 아니면 또 다른 나폴레옹 1세가 나타나지 않을까? 아! 황태자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어도! 코르뉘데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나라의 운명을 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피워 문 파이프 담배 냄새가 주방에 퍼져 나갔다. (p.6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데즈먼드 수어드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나폴레옹 평전 - 조르주 보르도노브 (나은주 옮김, 열대림)

................................................................................................

 

뚱보 여인숙 주인이 나갔따. 일행은 비겠덩어리 주위로 모여들어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장교가 불러서 갔을 때 그로부터 어떤 요구가 있었는지도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비겟덩어리는 처음에는 말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억누를 수 없었는지 돌연 털어놓고 말았다. "그자가 뭘 요구했냐고요? 그자가 뭘 요구했냐고요? 나와 자고 싶다는군요!"

 비겠덩어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민망한 표현이 거슬린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분개하는 마음이 컸다. 코르뉘데는 식탁에 맥주병을 거칠게 내려놓다가 그만 깨뜨리고 말았다. 비겠덩어리가 강요받은 희생을 자신들도 각자 어느 정도는 강요받은 것처럼 모두가 입을 모아 그 저열한 군인 나부랭이를 비난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한마음으로 저항을 다짐했다. 백작은 역겨움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들의 행동은 고대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고 선언했다. 부인들이 특히 비겟덩어리를 향해 격렬하고 살가운 동정심을 드러냈다. 식사 시간에만 모습을 보이는 수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p.64-65)

 

점심 식사는 우울했다. 일행이 비겠덩어리를 대하는 태도에 어떤 냉기가 돌았다. 밤이란 조언자 역할도 하는 만큼, 그새 판단이 얼마간 달라진 탓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이 여자를 거의 원망하고 있었다. 비곗덩어리가 밤사이 그 프로이센 장교를 몰래 만나러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랬더라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길동무들에게 반가운 선물을 안겨 주지 않았겠는가? 그보다 더 간단한 일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그랫다고 한들 누가 알아차렸겠는가? 일행이 상심하는 게 마음 아파서 생각을 바꿔었다고 둘러댄다면 이 여자도 장교한테 그리 체면을 깎이는 건 아닐 것이다. 둘러대는 일이야 이 여자한테는 식은 죽 먹기일 텐데!

하지만 이런 생각을 아직은 누구도 내비치지 않았다. (p.66-67)

 

일이 돌아가는 낌새를 꿰뚫어 본 루아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앞에 가는 저 '매춘부'가 그들을 이런 상황에 얼마나 더 오랫동안 붙잡아 둘 것 같으냐고 물었다. 백작은 이번에도 역시 궁정풍으로 우아하게 대답하기를, 한 여자에게 그런 고통스러운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으니 그 여자가 스스로 결심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자 카레라마동씨가 말을 받아, 만약 점쳐 본 대로 프랑스군이 디에프에서 회군해 반격해 온다면, 양편이 마주쳐 일전을 벌일 지점은 토트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꺼내 놓았다. 그 생각을 하자 다른 두 남자도 걱정으로 초조해졋다. (p.68)

 

루아조가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비겟덩어리 한 사람만 남기고 다른 이들은 떠나게 해달라고 프로이센 장교에게 청해 보자고 했다.

폴랑비 씨가 또다시 심부름을 맡아 장교의 방으로 올라갔지만, 잠시랄 것도 없이 곧바로 내려왔다. 인간의 마음이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 다르다는 걸 모르지 않는 독일 장교는 그런 제안을 들고 온 심부름꾼을 내쫓아 버렸다. 자기가 원하는 게 채워지지 않는 한 모두를 붙잡아 두겠다는 의미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루아조 부인의 상스러운 기질이 폭발했다. "어쨌거나 여기서 늙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아무 남자하고나 자는 게 저 여자, 저 매춘부의 직업이에요. 그러니 저 여자가 누구는 받고 다른 누구는 마다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도대체 어지간해야지 글쎄. 저 물건은 루앙에서도 누구와도, 심지어 마부들하고도 그 짓을 했다는군요! 네, 부인, 도청의 마부하고도요! 제가 그 작자를 잘 알아요. 포도주를 우리 가게에 와서 사 가니까요. 지금처럼 우리를 곤경에서 끌어내줘야 할 판국에 저 여자가 새침 떠는 꼴 좀 보세요. 못된 계집에 같으니!...제가 보기에 그 장교는 행실이 바른 사람이에요. 아마 오랫동안 여자 없이 지내 왓나 보죠. 마음이 끌리는 대로라면 우리 세 사람을 택했겠지만, 그런 욕심일랑 접고 임자 없는 저 여자로 만족하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결혼한 여자는 존중하겠다는 거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그는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저 '그러고 싶다'라고 말하기만 했어도 우리를 강제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요. 자기 병사들을 동원해서요."

나머지 두 여자가 슬그머니 몸서리를 쳤다. 예쁘장한 카레라마동 부인의 두 눈이 반짝이면서 뺨이 조금 창백해졌는데, 그 장교가 자신을 강제로 범할 때의 느낌이 벌써 상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조금 떨어져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여자들 쪽으로 다가왔다. 루아조는 '저 천한 게집'의 손발을 묶어 장교에게 넘져주자고 노기등등해서 말했다. 하지만 백작은 3대에 걸쳐 외교 사절을 배출한 가문 출신인 데다 타고난 풍채도 이미 외교관에 어울리는 만큼 협상 기술을 발휘하자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저 여자가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백작이 말했다. (p.70-71)

 

그래서 방법을 짜내기로 했다.

여자들이 서로 거리를 좁혀 앉아 남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자 여자 구별 없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저마다 생각을 꺼내 놓았다. 그러면서도 예의는 무척이나 차렸다. 여자들은 아주 낯 뜨거운 내용을 입에 올리면서도 절묘하게 돌려 말하고, 섬세한 표현들을 매혹적으로 구사했다. 만약 누군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들었더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말을 포장했다. 하지만 사교계 여성이 저마다 몸에 두르고 있는 정숙이라는 그 얇은 너울은 표면만 덮어 가릴 뿐이어서, 그들은 이런 음탕한 사건 앞에서 자신의 본성에 딱 맞는 뭔가를 만난 듯 편안한 기분으로 그 어느 때보다 활짝 피어나서는, 이 잠자리 연애사를 주물러 대며 속으로 후끈 달아올라 즐겼는데, 이런 주제를 다루는 그들의 태도에는 식도락가 요리사가 타인의 저녁거리를 조리하며 맛보는 관능이 스며 있었다.

분위기가 저절로 유쾌해졌다. 그만큼 이런 이야기가 그들로서는 사실 아주 재미있었다. 백작은 다소 아슬아슬한 농담들을 풀어놓으면서도 선을 슬쩍 넘었다가 눙치고 넘어가는 기술을 발휘해 모두를 웃게 했다. 이번ㄴ에는 루아조가 나서서 몇 마디 외설적인 말들을 요령도 없이 뱉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상한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 그의 아내가 거칠게 내질러 놓은 말이 모두의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무 남자하고나 자는게 저 여자의 직어인데, 누구는 받고 다른 누구는 마다하는 건 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사랑스러운 카레마라동 부인은 만약 자신이 비겟덩어리 입장이라면 여는 남자보다는 오히려 이 남자를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까지 해보는것 같았다.

일행은 요새를 공략할 때처럼 긴 시간 공들여 포위 작전을 세웠다. 각자 어떤 역할을 맡을지, 어떤 논리를 들이대고 어떤 수법을 부려야 할지 숙지했다. 비곗덩어리라는 살아 있는 이 성채가 적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공격 작전을 세우고, 사용할 전략을 정하고,, 그리하여 기습 공격으로 나아가자고 낙착을 보았다. (p.71-73)

 

백작부인이, 아마도 느닷없이 떠오른 것일 테지만, 종교에 경의를 표할 막연한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두 수녀 중 나이 많은 쪽을 향해 성인들의 위대한 삶의 행적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알다시피 성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우리 눈에 범죄로 비칠 만한 행동을 저질렀지만, 그런 앵동이 신의 영광이나 이웃의 행복을 위해 행해졌을 경우 교회는 그 죄를 기꺼이 용서한다. 이런 예시는 그 여자를 설득하기에 아주 효과적인 논거 였으므로 백작 부인은 놓치지 않고 이것을 이용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녀는 성직자의 옷을 걸치면 탁월학 ㅔ연마하기 마련인 암묵적인 동조의 태도, 그 은근한 아부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몰이해에서, 어리석음에서 나온 말인데도 요행히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행의 합동 작전에 어마어마한 힘을 보태 주었다. 소심한 줄 알았던 그 수녀는 알고 보니 대담하고, 말도 많고 과격했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문제에서도 결의론의 조심스러운 모색과는 아예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 수녀가 따르는 교리는 쇠막대기 같았다. 믿음은 망설임이 없었고, 양심은 가책을 몰랐다. 그 수녀가 보기에 아브라함이 행한 희생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따. 사실 하늘의 지시만 있었다면 수녀 역시 곧바로 자기 부모를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수녀가 보기에는 어떤 행동이든 의도가 칭찬할 만한 것이라면 주님이 마땅치 않게 여길 리가 없었다. 백작 부인은 일행의 작전에 예기치 않게 힘을 보태 주는 이 공모자의 신성한 권위를 활용해 볼 심산으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도덕 명제를 설파하도록 유도했다. (p.76-77)

 

이런 농담들은 상스럽고 저열한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모두 재미있어했고, 아무도 기분 상해 하지 않았다. 사실 기분이 상한다는 건 모든 일이 그렇지만 분위기에 달린것으로, 그들도 일행을 둘러싸고 서서히 형성된 분위기가 외설적인 생각들로 눅진히 흐드러진 덕을 보았다. (p.81)

 

코르뉘데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별 움직임도 없었다. 아주 진지한 생각에 빠진 것 같기도 했고, 이따금 긴 수염을 명렬하게 잡아당기는 폼이 그 수염을 더 길게 늘이고 싶은 듯도 했다. 어쨌거나 자정 무렵, 각자 헤어져 방으로 올라가려 할 때쯤 루아조가 갈지자걸음으로 다가와 별안간 코르뉘데의 배를 두드리며 혀가 꼬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은 영 재미가 없으시네, 한마디도 안 하시는 거요. 시민 동지?" 그러자 코르뉘데는 별안간 머리를 쳐들어 번쩍이는 무서운 눈빛으로 일행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내가 모두에게 말해 두는데, 당신네들은 파렴치한 짓을 저리른 거요!"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문으로 가더니 한 번 더 소리쳤다. "파렴치한 짓이라고!" 그러고는 사라졌다. (p.82)

 

이제 비곗덩어리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여자가 나타났다.

비곗덩어리는 조금 불안해 보였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일행을 향해 소심하게 다가왔다. 그러자 모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거깅 여자가 없는 것처럼, 눈에 띄지도 않는 것처럼 외면했다. 백작은 근엄하게 자기 아내의 팔을 잡더니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행여 불순한 것에 닿을까 몸을 피한다는 식이었다.

비겟덩어리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잠시 후 밑바닥의 용기까지 모두 그러모아 공장주의 아내에게로 다가가서 머뭇거리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따. "좋은 아침인요, 부인." 그러자 상대방은 자신의 정숙함에 들러붙으려는 오물을 대하듯 힐끔 쳐다보면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거만하게 고개를 한 번 까닥해 보였다. 모두가 자기 일에 바쁘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그 여자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여자가 치맛자락에 어떤 전염병이라도 묻혀 온 것 같았다. 그러더니 다들 서둘러 가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여자는 홀로 뒤처져 맨 마지막에 말없이 올라탔다. 앞서 앉아 왔던 그 자리였다.

일행은 그 여자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우라조 부인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분개한 눈으로 훑어보며 남편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옆자리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승합 마차가 육중한 몸을 흔들었따.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말이 없었다. 비곗덩어리는 눈을 들지도 못했다. 이 여자는 옆에 앉은 이들 모두에게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행이 위선을 부리며 자신을 그 프로이센 장교의 품속으로 밀어 넣긴 햇어도 어쨌거나 자신이 굴복했다는 사실이, 그래서 지난 하룻밤으로 인해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p.84-85)

 

세 시간 가량 길을 갔을 때 루아조가 펼쳐 놓은 카드를 거둬들이며 말했다. "배꼽시계가 울리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노끈으로 묶은 꾸러미 하나를 풀어 송아지 냉육 한 덩어리를 꺼냈다. 아내가 그것을 정성스레 저며 얇고 반듯한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뒤 둘은 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요기해 볼까요?" 백작 부인이 말했다. 동의가 돌아오자 부인은 부부 두 쌍이 먹을려고 준비해 온 음식물을 펼쳤다. 길쭉한 모양의 단지가 하나 있었는데, 도자기 토끼가 붙은 뚜껑으로 보아 안에는 토끼 고기 파테가 들어 있는 듯했다. 뚜껑을 열자 과연 사냥해 온 산토끼의 갈색 살코기에 또 다른 고기를 잘게 다져 섞어 넣은 요리 위로 흰색 지방층이 실개천 같은 줄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네모로 잘라 낸 먹음직스러운 그뤼예르 치즈 덩어리는 신문지로 둘둘 말아 온 탓에 연한 속살 단면에 '사회면'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두 수녀는 마늘 냄새가 풍기는 둥그런 소시지를 꺼내 놓았고, 코르뉘데는 외투 양쪽에 달린 큼직한 호주머니 속으로 두 손을 동시에 깊숙히 찔러 넣더니 한쪽에서는 삶은 달걀 네 개, 다른 쪽에서는 딱딱한 빵 조각을 꺼냈다. 그는 달걀껍데기를 벗겨 발밑에 깔린 짚에 던져 버리고 알맹이를 곧장 이로 베어 물었다. 풍성한 수염 위로 떨어져 내린 선명한 노른자 부스러기들이 덤불 속에 박힌 별들 같앗다.

비곗덩어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고, 그런 가운데 출발을 서두르느라 먹을 것을 챙길 정신이 없었다. 편안하게 입속으로 먹을 것을 밀어 넣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 여자는 숨이 턱 막힐 만큼 화가 났다. 처음에는 속이 끓어올라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입을 열어 그들이 하는 짓거리에 욕을 퍼부어 주려고 했다. 사실 욕설이 물줄기처럼 입술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격렬한 분노가 목을 졸라맨 탓이었다.

아무도 이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여자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비곗덩어리는 행세만 번듯한 저 파렴치한들에게 자신이 철저히 멸시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저들은 자신을 희생물로 이용했고, 그런 다음에는 더럽혀져서 쓸모없어진 물건처럼 멀찍이 내쳐 버렸다. 여자는 자신의 큰 바구니를 생각했다. 그 바구니 가득 채워 온, 저들이 게걸스레 먹어치워 없앤 그 맛난 음식들을 생각했다. 몽글몽글한 육즙에 잠겨 윤기가 흐르던 닭 두 마리, 파테, 배, 보르도 포도주 네 병을 생각했다. 그러자 별안간 분노가 가라앉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툭 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여자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온몸이 뻣뻣해졌지만, 그래도 흐느낌이 치미는 족족 아이처럼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삼켰다. 그래도 눈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꺼풀 가장자리에 맺혀 반짝이더니, 곧이어 굵은 눈물방울 두 개가 눈에서 떨어져 나와 뺨을 따라 천천히 굴러 내렸다.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눈물방울들은 속도가 조금 더 빨라서, 바위에서 새어 나오는 물방울들처럼 흘러내려 가슴의 불록한 곡선 위로 일정하게 떨어졌다. 여자는 꼿꼿하게 앉아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앞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눈치를 채고 남편에게 힐끔 눈짓을 보냈다. 남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쩌라고, 내 잘못도 아니잖아'라는 의미 같았다. 루아조 부인이 의기양양하게 소리 없는 웃음을 지으며 속닥였다. "창피해서 우는 거예요."

두 수녀가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먹고 남은 소시지를 종이에 말아 치운 다음이었다.

그대 코르뉘데가 달걀을 소화시키고 있다가 긴 다리를 맞은편 좌석 아래로 쭉 뻗고 눕듯이 몸을 뒤로 젖히면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방금 재미난 장난을 찾아낸 사람처럼 싱긋 웃더니 <라 마르세예즈>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했다.

모두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런 민중의 노래가 이 길동무들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거북해했다. 개들이 손풍금 소리를 들을 때처럼 금방이라도 짖어 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코르뉘데는 일행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도 휘파람을 멈추지 않았다. 간간이 노랫말을 흥얼거리기까지 했따.

신성한 애국심이여,

끌어라, 떠받쳐라, 복수에 나선 우리의 두 팔을,

유여, 사랑하는 자유여,

함께 싸우자, 그대의 수호자들과 함께!

눈이 다져져 노면이 한층 단단해진 덕분에 달리는 마차에 속도가 붙었다. 디에프에 도착할 때까지의 그 길고 지루한 여정 동안,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요동치는 마차의 덜그럭거림 사이로, 저물녘의 어스름 속에서, 이어서 마차 안의 깊은 어둠에 잠겨, 코르뉘데는 복수를 다짐하는 그 단조로운 가락을 사나울 만큼 고집스럽게 휘파람을 게속 불어 댔다. 그러는 바람에 승객들은 지겹고 짜증이 나면서도, 머릿속으로 그 가락으 처음부터 끝가지 따라가며 한 소절 한 소절 해당하는 노랫말을 떠올려야 했다.

비곗덩어리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휘파람 노래 한 절이 끝나고 또 한 절이 시작될 때마다 이따금 억누르지 못한 흐느낌 한 줄기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p.86-90)

 

..............................................................................................................................................................................................................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년 8월 5일 ~ 1893년 7월 6일)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표 작가이다.

초기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리얼리즘 형식의 글을 써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 후 '벨 아미'라고 이름붙인 자신의 요트로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성과 쾌락에 탐닉하다가 매독이 발병, 1877년경부터 시작된 매독의 증상으로 신경증을 앓으면서 점차 환상적인 색채가 강해진다.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비곗덩어리, 어느 인생, 후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를라>가 있다. 이 밖에 모파상의 환상소설들은 우리나라에서 러브크래프트와 함께 공포특급류의 해적판으로 많이 묶여져서 나왔으며 이 중 <모파상 괴기소설 광인?>이라는 단편집이 2007년 '우물이 있는 집'이라는 출판사에서 <박제된 손>이라는 이름으로 개정출간되었다.
말년은 비참했다. 앞서 말한대로 매독에 걸린 것이 문제였는데 20세기 초까지 매독은 사실상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었기에 계속 진행되어 그의 뇌를 망가뜨렸고, 이후 자기 오줌을 성수라면서 모으기도 하는 등 발광이 심해져서 온갖 소동을 일으켰으며 1891년에는 자살까지 기도,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2년 뒤 정신 병원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모파상 단편선 (김동현, 김사행 옮김, 문예 세계문학)

모빠상 단편집 (이형식 옮김, 펭귄 클래식)

비곗덩어리 - 모파상 (정혜용 옮김, 시공사 세계문학의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