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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거울 - 이디스 워튼 (김이선 옮김, 생각의나무)

by handaikhan 2023. 2. 5.

기담문학 고딕총서 11

목차

케르폴
홀리다
벨소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미스 메리 파스크
미스터 존스
거울
모든 영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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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 - 케르폴

 

돌 위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그런데 불을 붙인 순간 내가 참으로 철없고 꺼림칙한 짓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집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고, 빈 가로수 기들이 모두 내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아닌가. 스스로 내 행동을 그렇게 의식하게 된 것은 아마도 깊고 깊은 침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게 소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고, 시계를 풀밭 위에 살짝 내려놓았더니 흡사 그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환청마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앉아 머나먼 과거의 얼굴속으로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으니, 나의 행동이 너무나 우습고 하찮고 ㅆ흘데없는 허세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케르폴의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브리타뉴 지방은 처음이었고 랑리뱅이 그 이름을 언급한 것도 기껏해야 어제였다. 그러나 그 안에 축적된 기가닌 역사에 대한 느낌 없이 그 웅장한 공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역시일지 추측할 준비가되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오래된 집들에 장엄함을 부여해주는 수많은 삶과 죽음의 무게 정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르폴의 면면은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시작되는 회색 가로수 기들처럼, 근엄하고 잔인한 기억의 원경이 흐릿한 어둠을 향해 뻗어 있었다. (p.10)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의내릴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돔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따. 좀 더 '보고' 싶다는 것과는 달랐다. 문제는 보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그때도 있었다. 나는 좀 더 느끼고 싶었다. 그 집이 가지고 잇는 모든 것을 느끼고 교감하고 싶었다. (p.12)

 

"이런 지긋지긋한 짐승들 같으니라고!"

내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메아리쳐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개들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쯤 되니 내가 집으로 접근해도 그들이 나를 막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 편하게 그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 편하게 그들을 관찰할 ㅅ후 있었다. 굉장히 겁을 먹어서 저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배가 고픈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학대받은 개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털은 가지런했고, 떨고 있는 그레이하운드를 제외하곤 야위지도 않았다. 외려, 말을 걸어준 적도 쳐다봐준 적도 없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살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마치 그 공간 속을 또더는 침묵이 끊없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들의 본성을 차츰차츰 마비시켜나간 것처럼. 인간의 타내함에 비견할 만한 이들의 이상한 비활동성은 굶주리고 두들려 맞은 동물으리 비참한 몰골을 보는 것보다 더 슬게 느껴졌다. 나는 한순간이라도그들의 감정을 일깨우고 싶었다. 잘 달래어 장난을 치거나 달리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지친 눈옹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창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개들이 나보다 나았다. 그들은 그 집이 무엇을 참아줄지 무엇을 참지 않을지 알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그들이 내 머릿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착각에 사로잡힌  자신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런 생각마저도 생기 없이 자욱한 무기력함의 안개를 뚫고 그들에게 가 닿는 듯했다. 나에게서 떨어져 있는 그들의 물질적 거리감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그들의 감정적 소원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여 이후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한 번 으러렁거리거나 한 번 꼬리를 흔들어줄 정도의 가치마저도 없어진, 그런 깊고 어두운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이것들 봐."

나는 불쑥 움직임 없는 원형의 무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너희들 전부 말이야. 너희들은 꼭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어. 그렇게 보인다고, 알아들어? 이곳엔 유령이 있는 거 같은 생각이 들어. 유령이 자기처럼 보이게 하려고 너희들만 남겨 놓은 거야? 그런 거야?"

개들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p.17-19)

 

"에르베가 케르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나요? 시댁 쪽 조상 중 한 분도 관련되어 있거든요. 브르타뉴 지방 집들엔 늘 유령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건 아시죠? 간혹 가다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고요."

"네....하지만 이 개들은?"

"그게 그러니까. 그 개들은 케르폴의 유령들이랍니다. 여기 농부들 말로는 일 년에 한 번 많은 개들이 그곳에 나타난다고 해요." (p.2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캔터빌의 유령 - 오스카 와일드 (김미나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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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질문에 안느 드 코르노는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지독하게 외로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황량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남편이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때리거나 위협한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마치 죄인처럼 케르폴에 잡아두었고, 그가 모를래나 캥페르 혹은 헨느로 떠날 때에도 그녀에 대한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아, ,,그녀는 뒤따르는 하녀 없이는 정원에 있는 꽃 한 송이 꺾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한번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왕이 아니에요. 그런 영광은 필요치가 않아요."

그러자 그는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열쇠를 꽂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그럼 자기도 데려가라고 요구하자, 그는 도시는 사악한 장소라 젊은 부인은 자신의 난롯가에 모무르는 편이 낫다고 대답했다. (p.35-36)

 

"에르베 드 랑리뱅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입니까?"

재판관이 물었다. 

"저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불륜한 마음을 먹고 그에게 내려갔단 고백을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그가 당신을 데리고 가기를 운한 겁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두려웠단 말입니까?"

"제 남편이 두려웠습니다."

"왜 남편이 두려웠습니까?"

"그 사람이 제 작은 개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입니다." (p.36-37)

 

"그렇다면 피고가 남편을 살해한 이유가 남편이 애완견을 기르지 못하게 해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저는 남편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그랬습니까? 에르베 드 랑리뱅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입니까? 말해줄 수 있습니가?"

"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들...."

그 순간 그녀는 기절하여 재판정 밖으로 옮겨졌다. (p.47-48)

 

"위쪽으로 올라갔을 때는 아주 깜깜했습니다. 나는 남편의 부싯돌과 부시를 찾아 불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개들은요?"

"개들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라지다니요, 어디로 말입니까?"

"모르닏. 출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케르폴에는 개가 없습니다." (p.54-55)

 

"피고는 개들의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고에게 묻겠습니다. 만약 그 개들이 피고가 아는 개였따면, 피고는 그 개들이 짖는 소리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네."

"당시에도 그랬습니까?"

"네."

"피고는 그 개들이 어떤 개들이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은 나의 개들이었습니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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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 - 벨소리

 

장티푸스를 앓고 난 가을이었다. 석 달 병원생활 끝에 퇴원을 한 터라 비리비리 약해 보였던지. 일을 해볼까 하고 전갈을 넣어두었던 두서너 명의 부인이 나를 고용하길 꺼려했다. 나는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흉해 ㅂ이지만 않으면 사람 구한다는 데는 다 기웃거리고 다녔다. 가지고 있는 돈은 다 떨어져가는데 그런 식으로 두 달 하숙생활을 하며 지내다 보니 진이 쑥 빠졌다. 애가 타서 그랬는지 살도 오르지 않았고 내 인생이 왜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걸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인생이 너무 고단했다. 아니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p.111-112)

 

좀 지루할지는 몰라도 불행하지는 않을 거예요. 내 조카딸은 천사예요. 전에 시중들던 여자도, 그러니까 작년 봄에 죽었지요. 이십 년 동안이나 같이 지내면서 본인이 발을 디디고 다니던 그 공간을 숭배했었으니까요. 조카딸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요. 주인이 친절하면, 잘 알겠지만 밑에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성격이 좋아지게 마련이니까, 나머지 식구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가씨야말로 내가 조카딸아이에게 찾아주고 싶었던 바로 그 타입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조용하고 공손하고 처지에 비해서 교육도 받은 것 같고, 글을 잘 읽는 거 같은데 맞지요? 그게 아주 좋아요. 조카딸아이는 책 읽어주는 소리 듣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앤 뭐랄까, 친구처럼 지내면서 자기를 돌봐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작년에 죽은 그 여자가 그랬지요.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에요. 그곳은 아주 외로운 곳이랍니다....자 어때요, 결정을 했나요? (p.113-114)

 

내가 들어가자 그가 몸을 홱 돌리고 나를 위아래로 훓어봤다. 전에 있던 곳에서도 한두 번 경험이 있던지라 나는 그의 시선이 무얼 듯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내게 등을 돌리고는 부인에게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흥미를 느끼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장티푸스가 나를 성심성의껏 모셨다고도 할 수 있다. 브림튼 씨 같은 신ㄴ사분들의 관심으로부터 나늘 멀어지게 했으니까. (p.124)

 

하인들은 바깥주인에 대해서는 말을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주워들은 내용들로 판단가헌대 이 댁 안주인과 바깥주인의 결합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브림튼 씨는 투박하고 목소리가 크고 유흥을 즐겼던 반면, 브림튼 부인은 조곤조곤하고 내향적이고 어찌 생각하면 다소 차가운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부인이 남편에게 늘 상냥하고 싹싹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굉장히 관대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브림튼 씨처럼 자유로운 신사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부인은 다소 새침하고 쌀쌀맞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째됐건 그렇게 몇 주 동안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부인은 친절했고 일은 고단하지 않았으며 다른 하인들과도 허물없이 잘 지냈다. 요약하자면 별달리 불평할 거리 없이 잘 지냈다는 말이다. 그런데 늘 가슴 한구석이 묵직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외로움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곧 그 느낌에도 익숙해졌다. 병치레를 하느라 잃어버린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안정된 생활과 맑은 시골공기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전히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몸이 안 좋았다는 사실을 알고 브림튼 부인은 나보고 주기적으로 산책을 해야 한다면서 부러 심부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에 가서 리본을 한 마 끊어오라든지 편지를 부치고 오라든지 아니면 랜포드 씨에게 책을 돌려주고 오라는 심부름이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살짝 축축한 냄새가 나는 숲길을 걸어가는 산책 시간이 마냥 기다려졌다. 그리고 숲길을 지나 다시 브림튼 가의 모습이 눈에 들오노는 순간이 되면 나의 마음은 도다시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돌멩이마냥 가라 앉았다. 정확히 우울한 분위기의 저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찌만 그 집에 들어설 때마다 나의 마음속엔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p.128-129)

 

그가 내게 부인의 병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찌만, 그즈음 아침에 간혹 부인 얼굴이 밀랍처럼 변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인을 괴롭히는 것은 심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계절은 습하고 침울했다. 그리고 일월이 되자 오랫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 가호간 시련의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바느질감을 들고 자리에 앉아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자기에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복도 건너편에 있는 잠긴 방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인가 길고 긴 비가 오는 밤에 나는 그쪽에서 들려오는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아침 햇살은 내 머릿속에서 그런 허황된 생각을 몰아내주었다. (p.130)

 

아무런 이유 없이 그녀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말해야만 혹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따. 그러나 그게 뭐란 말인가?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아낸단 말인가? 나는 브림튼 부인이나 랜포드 씨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뭔가 끔찍한 일이 그들 앞에 놓여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나에게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ㄴ약 내가 그녀에게 물어본다면 대답해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말을 걸야 한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나는 힘겨운 발걸음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몇 야드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랜포드 씨 댁 문이 열러더니 그나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날 아침 브림튼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밝고 명량해 보였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했다.

"하틀리, 무슨 일이에요? 좀 전에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던데 인기척이 없어서 나와봤어ㅛ. 눈 속에 뿌리를 내린 곳도 아닐 테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가 멈춰 서더니 나를 응시했다.

"뭘 보고 있는 거죠?"

나는 느릅나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선이 닿은 길이란 길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무력감이 찾아들었다. 그녀는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싯ㄴ은 골수까지 나를 뚫고 지났지만 시선만으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순간 그녀가 거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으 때보다 훨씬 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짐작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비밀을 안고 가도록 나 혼자 내버려두고 그녀가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눈발이 내 주위에서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땅에서 멀어져갔다. (p.154-155)

 

아주 고요한 밤이었다. 대지도 공기고 모두 눈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ㄷ었덨다. 일단 이불 속에 들어가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용히 누운 채로 나는 어둠이 내린 집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한번은 아래쪽에서 문 하나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달빛 말고는 온통 어둠뿐이었으며 창유리로 들이치는 눈송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ㄷ. 그리고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미친 듯이 울려대는 벨소리 때문에 벌쩍 일어났기 대문이다. 무슨 일인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는 침대 밖으로 뛰쳐나와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나려나 보다.'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손에 아교 칠이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옷을 입기가 너무 힘들었다. 영원히 옷을 입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방문을 연 나는 복도를 내다보았다. 촛불 빛이 닿은 범위 내에선 이상한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따. 나도 숨을 쉬지 않고 서둘러 발걸음을 채촉했다. 그런데 멩인 홀로 이어지는 문을 민 순간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 계단 머리에 에머 색슨이 서서 쓸쓸히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나는 움직일 수 없었따. 하지만 문을 잡고 있던 손이 풀리고 문이 쾅 닫히는 순간 그녀의 모습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계단 아래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은밀하고 미스터리한 소리, 현관문을 여는 열쇠소리 같았다. 나는 브림튼 부인의 방으로 뛰어가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두드렸다. 이번에는 안쪽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빗장이 풀리고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밤인ㄷ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옷을 벗은 상태가 아니었다. 부인은 깜짝 놀란 표저응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야, 하틀리?"

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디가 아픈가요? 이 시간에 여기서 무 하는 거죠?"

"아픈 데는 없습니다. 그런데 벨이 울려서요."

그러자 부인의 얼굴이 챙박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잘못 들었나 보네요."

그녀가 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벨을 울리지 않았어요. 꿈을 꾸었나 보네요."

그녀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인이 방문을 닫으면서 "이제 그만 가서 자도록 ㅎ요"라고 말하는데 아래쪽 홀에서 다시 한 번 무슨 소린가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남자의 발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진실을 알 것 같았다. 나는 부인을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이 집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누군가라니?"

"브림튼 씨인 것 같습니다. 아래쪽에서 발소리가 들립니다."

부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내 발밑으로 쓰러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숨 쉬는 모양새로 봐서 흔한 기절이 아니었다. 머리를 받치고 있는데 계단을 재빨리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둠속의 누군가는 이제 홀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방문이 덜컥 열렸다. 방\바닥으로 눈송이들이 떨어졌다. 부인 곁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브림튼 씨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평소보다 더 붉은 얼굴이었고 이마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

"부인이 기절하셨습니다.""

브림튼 씨는 웃으며 내 옆을 지나쳤다.

"좀 편리한 시간대를 택하면 좋았을 것을 안됐군. 방해애서 미안하지만...."

나느 브림튼 씨의 태도에 발꾼하고 말았다.

"어르신, 미친 거 아닙니까? 지금 뭐 하시는거죠?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해서 말이야."

그는 옷 방으로 가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아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뭐가 두려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보세요! 부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안 보이시나요?"

그는 거칠게 내 손을 떼어냈따.

"나 보라고 이러는 거 같군."

그리고 옷 방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안쪽에서 무슨 소린가가 들렸다. 아주 희미한 소리이긴 했지만 그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방문을 덜컥 열었다. 그러나 브림튼 씨는 뒷걸음질을 쳤다. 문턱에 에머 색슨이 서 있었다. 뒤쪽으론 온톰 어둠뿐이었지만 그녀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브림튼 씨의눈에도 그랬으리라. 그는 마치 그녀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숨기려는 듯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내가 다시 그쪽을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모든 힘이 다 빠져버린 듯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브림튼 부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따.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나는 그녀의 얼굴 위로 흩날리듯 떨어지는 죽음의 꽃잎을 보았다.

사흘째 되던 날 우리는 브림튼 부인을 땅에 묻었다. (p.15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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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고독하고 외로운 집에서 하녀가 죽었다. 그러나 하녀의 유령은 여전히 집 안에 존재한다. 시선을 던지고 모습을 보이고 벨을 울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하녀는 여주인과 어떤 관계였을까? 여주인의 남편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주인의 남자와는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남편과 남자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녀는 왜 죽은 것일까? 죽은 하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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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년~1937년)

미국의 소설가.

1862년 미국 뉴욕의 명망가인 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 철학, 종교 서적을 탐독했고, 1878년 처음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1885년에 에드워드 로빈스('테디') 워튼과 애정 없는 결혼을 했고, 불행한 결혼생활과 사회적 지위와 작가로서의 야심 사이의 갈등으로 1894년부터 심각한 신경쇠약을 앓았다. 신경쇠약을 치료할 겸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여러나라를 옮겨다니며 생활했으며, 소설 및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 건축, 미술에 대한 글을 쓰곤 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에서 전쟁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이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13년 남편과 이혼하고 193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75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해 베르사유의 고나르 묘지(cimetiere des gonards)에 묻힐때가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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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이야기 - 이디스 워튼 (성소희 옮김, 레인보우퍼블릭북스)

이선 프롬 - 이디스 워튼 (김욱동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손영미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기쁨의 집 - 이디스 워튼 (최인자 옮김, 펭귄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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