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한국문학 413 (54권)
목차
강용준
철조망
고향사람
정한숙
금방벽화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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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준 - 고향 사람
수위실 앞을 지나가는데 예기했던 대로 젊은 수위 하나가 소란하게 통화를 하다 말고,
"아, 여보시오, 여보시오."
하고 불렀다. 내가 대답하였다.
"왜 그러시오?"
"뭐요?"
"아, 왜 그러냐니깐?"
"어디 가십니까?"
"보다시피."
"뭐요?"
"여기가 퍼시픽코리아 전자주식회사는 맞소?"
"맞는데요."
"그럼 잘못 온 건 아니로군. 나 여기 사장 좀 만나러 왔어요."
"감가만, 그러면 선생님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면 그렇겠지. 나는 대단히 기분이 흡족하였다. 나는 이름을 대주고, 어제 여기 사장께서 좀 만나자고 전화 연락이 있었노라고, 그래서 오는 길이노라고, 역시 대단히 기분이 좋아서 대단히 우월감에 차서 (사실 이제 보니 수위란 참으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나대로 한번 해 본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사장이라는 직함에 기대서 한번 지어 본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솔직한 얘기가 어제 번화를 먼저 한 것은 내 쪽이었고, 그랬더니 인사치레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그럼 제가 찾아뵙지요, 하고는 오늘 아침 서둘러 집을 나선 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나는 결코 수위보다 나을게 쥐뿔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이놈의 방문 문제를 놓고 거의 10여 일 동안이나 선뜻 해소가 되지 않는 마음의 갈등 때문에 망설여 온 참이다. (p.79-81)
"알았어요, 빌어먹을."
나는 분하고 부끄럽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고향 사람을 기피하는 그 청년의 입장이 나대로 일차 납득은 갔다. 좀 벌었다고 하니 고향 사람이라고 하며 어지간히들 꼬여들 것이었다. 참 귀찮은 터이고, 나중에는 아마 진저리도 날 것이다. 이번에 고향 사람들을 몇 만나면서 느낀 일이지만, 바로 그 놈의 고향을 필요 이상으로 고무풍선만 하게 부풀려 가지고 나타나는 사람 쳐 놓고 대개는 별볼일이 없었다. 몇 번 만나다 보면 그놈의 고향을 내세워 귀찮게 군다. 대신 치부를 해서 여유가 있거나 출세를 해서 권세가 있거하 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 쪽에서 먼저 서둘러 전화를 한다거나 만나자고 하는 법이 없다.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의 청년의 몸에 밴 듯한 고향기피증이 나대로 일차 납득은 갔다.
그러나 납득이 간다는 얘기와 당장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감과는 결코 동질 선상에 놓고 따질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이 무너지는 데서 오는 이 참담한 고통감은 납득하는 일 정도로 쉽게 해소되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경망하게 책을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한 일이 분하고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나 역시 그 귀찮은 고향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비참해서 죽을 지경인 것이다. 물론 처음 나는 나의 행동이 동향인으로서의 순수한 애정에 근거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소박하게 고향 사람이니 우선 반갑고 비록 멀기는 한 대로 인척 간이기도 하여서 추호의 사심 없이 나는 책을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실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때 나는 알아차렸다. 같은 기간에 다른 고향 사람들을 여럿 만나면서 하필이면 다른 쪽은 다 젖혀 놓고 굳이 이쪽만 쏙 빼서 책을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한 그 행위의 이면에는 나 스스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종의 비열한 거지근성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을. 비록 멀기는 한 대로 인척간이 된다는 애기는 이 경우 어차피 구차스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고, 그 귀찮은 고향 사람이 돈 번 고향 사람에 대하여 가짐 직한 어떤 열등감 혹은 그 허황한 기대가 나의 의식 속 깊숙히 잠재해 있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나는 참으로 자신이 혐오스럽고 불쌍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이후 거의 한 달 동안을 늘 우울한 상태에서 자신의 가난을 저주해야 하였다. 감히 말한다면 나는 이때 그놈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나도 물론 부자가 되고 싶지만 그럴 가망은 이게 눈곱만큼도 없고, 그러니 앞으로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가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어떻게 써 나가야 될 것인가, 나는 참으로 암담하였다 (좀 다른 얘기지만 세상에는 무슨 가난의 문제를 자기들이 떼 놓은 상표나 되는 것처럼 들고 다니며 써먹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나에게는 보인다. 왜냐하면 우선 그들은 대개 가난하지가 않으며, 따라서 그들으리 직업은 극히 피상적이거나 지나치게 허황한 과장법에 근거해 있는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은 자기들의 타고난 빈약한 재능을 그것으로 호도하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p.89-91)
<작품 이해>
<고향 사람>은 실향민인 '나'가 고향 사람을 만나며 겪는 심리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고향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어느 날 나는 좌익 활동을 했던 고향 사람을 만난다. 나는 그가 아버지를 죽인 빨갱이 가운데 한 명이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나는 고향 사람에게 술 한잔 대접하고 싶어 하는 인정과 그의 극빈한 삶을 보고, 인간답게 살려고 가족, 당, 직업 등을 버리고 온 그가 너무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실향민들이 사람들에게 '너절한 떨거지' 취급을 받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게 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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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준(姜龍俊, 1931년 11월 29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
강용준(姜龍俊, 1931∼)은 황해도 안악(安岳)군 용문(龍門)면 매화(?花)리에서 부 강성직(姜聖稷)과 모 이한호(李漢湖)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교명(敎名) 루스로 영세를 받았다. 3, 4세 때 신천(信川)읍으로 이사했다. 6세 때 부모와 헤어져 고향 안악으로 돌아와 조부 및 백부 밑에서 성당 소속의 유치원에 1년 다녔다. 다음 해 신천의 가족들도 모두 고향으로 솔가해 왔다. 성당 소속의 봉삼(奉三)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안악중학교, 안악고등학교, 진남포(鎭南浦)공업전문학교 등을 거쳐, 1950년 평양사범대학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그해 7월 인민군 보충병으로 징집되었다. 이후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부산 동래, 거제도 고현리, 광주 사월산 등지에서 만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1953년 6월 18일 반공 청년 석방일에 사월산 수용소에서 철조망을 뚫고 탈출해, 이후 전남 함평군 대동면 용성리에서 약 3개월간 기식하다가 부산으로 옮겨 부두 노동 등을 하며 전전했다.
1954년 10월 2일 공병 소위(工兵少尉)로 임관해, 경북 영천 1205건설공병단 508철교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958년 오용숙(吳龍淑)과 경북 영천에서 결혼했다.
1960년 7월 <사상계(思想界)> 제1회 신인문학상에 <철조망(鐵條網)>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3년 3월 31일 강원도 홍천에서 수도사단 공병대대 중대장으로 복무 중 전역했다. 출판협회 임시직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1964년 사상계사에 입사해 1966년 퇴사했고, 이어 한국해외개발공사 공보실에 근무하다 1968년 퇴사했다. 같은 해, 장편 ≪태양(太陽)을 닮은 투혼(鬪魂)≫을 간행하고 단편 <악령(惡靈)>을 발표했다. 1969년 장편 ≪밤으로의 긴 여로(旅路)≫를 간행하고, 1970년 중편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했다. 1971년 <광인일기>로 한국일보사 제정 제4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장편 ≪사월산≫ 연재를 시작했다.
1972년 <광인일기>가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세계 10대 소설’로 선정되어 전면에 소개되었고, 장편 ≪흑염(黑焰)≫ 연재를 시작했다. 1973년 단편 <비가(悲歌)>를 발표하고 장편 ≪탈주자들≫을 연재했다. 1974년 창작집 ≪광인일기≫를 간행했다.
1976년 ≪밤으로의 긴 여로≫로 제1 회 반공문학상대통령상을 받았다. 1977년 창작집 ≪거도(巨盜)≫를, 1979년 장편 ≪가랑비≫를 간행했다. 1980년 장편 ≪사월산≫ ≪꼬르넷을 벗은 수녀(修女)≫를 간행하고 장편 ≪천국으로 이르는 길≫을 연재했다.
이후 15년 동안 ≪천국으로 이르는 길≫, ≪무정≫, ≪멀고 긴 날들과의 만남≫, ≪어느 수녀의 수기≫, ≪바람이여 산이여≫, ≪검은 장갑의 부루스≫, ≪낯설은 방≫, ≪파도 너머 저쪽≫, ≪탄≫, ≪광야≫ 등 다수의 장편을 상재하고, 중편집 ≪나성에서 온 사내≫와 작품집 ≪아버지≫를 간행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1988년 ≪바람이여 산이여≫로 한국문학 작가상을, 1996년에는 ≪광야≫로 한무숙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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