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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유예 - 오상원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5. 24.

큰 한국문학 413 (60)

 

목차

 

송병수

쑈리 킴

저 거대한 포옹 속에

 

오상원

유예

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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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 - 유예 (1955년)

 

몸을 웅크리고 가마니 속에 쓰러져 있었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손과 발이 돌덩이처럼 차다. 허옇게 흙벽마다 서리가 앉은 깊은 움 속, 서너 길 높이에 통나무로 막은 문 틈 사이로 차가이 하늘이 엿보인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냄새로 짐작하여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며칠 전까지 있었던 모양이군. 그놈이나 매한가지지, 하고 사닥다리를 내려서자마자 조그만 구멍으로 다시 끌어올리며 서로 주고받던 그자들의 대화가 아직도 귀에 익다.

그놈이라고 불린 사람이 바로 총살 직전에 내가 목격하고 필사적으로 놈들의 사수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던 그 사람이었을까...만일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또 어떤 사람이었을까....몸이 떨린다. 뼛속까지 얼음이 박힌 것 같다.

소속 사단은? 학벌은? 고향은? 군인에 나온 동기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미국에 대한 감정은? 그럼...동무의 말은 하나도 이치에 당치 않소.

동무는 아직도 계급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소. 출신 계급을 탓하지는 않소. 오해하지 마시오. 그 근성이 나쁘다는 것뿐이오. 다시 한 번 생각할 여유를 주겠소. 한 시간 후, 동무의 답변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것요. (P.82-83)

 

누가 죽었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에겐 모두가 평범한 일이다. 나만이 피를 흘리며 흰 눈을 움켜쥔 채 신음하다 영원히 묵살되어 묻혀 갈 뿐이다. 전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추위 탓인가....퀴퀴한 냄새가 또 코에 스민다. 나만이 아니라 전에도 꼭같이 이렇게 반복된 것이다.

싸우다 끝내는 죽는 것, 그것뿐이다.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위한다는 것, 그것도 아니다. 인간이 태어난 본연의 그대로 싸우다 죽는 것,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P.85)

 

"소대장님, 인제는 제 차례가 된 모양입니다."

그는 조용히 선임 하사의 얼굴을 지켰다. 슬픈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오랜 군대 생활에 이겨 온 굳은 의지가 엿보일 뿐이다.

선임 하사, 그는 이차 대전 시 일본군에 소집되어 남양 전투에 종군하다 북지로 이동, 일본 항복과 더불어 포로 생활 2개월을 거치고 팔로군, 국부군, 시조가 변전되는 대로 이역을 표류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군문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군대 생활이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그, 전투가 자기 생활 속에서 제일 신이 나는 순간이라는 그였다.

"사람은 서로 죽이게끔 마련이오. 역사란 인간이 인간을 학살 해 온 기록이니까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오? 난 전투가 제일 재미있소. 전투가 일어나면 호흡이 벅차고 내가 겨눈 총구에 적의 심장이 아른거릴 때마다 나는 희열을 느낍니다. 나는 그 순간 역사가 조각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거든요. 사람이란 별게 아니라 곧 싸우는 것을 의미하고, 싸우다 쓰러지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P.93)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동무....총살, 이 두 마디가 그의 머릿속에 못박혔다. 눈앞이 아찔하다. 그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살폈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야윈 얼굴에 내의 바람의 한 청년이 양 손을 등 두리로 묶인 채 맨발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동무는 우리 인민의 처사에 대하여 이의가 있소?"

그 위엄으로 보아 대장인가 싶다.

"생명체와 도구와는 다른 것이오. 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고 싶겠소? 나는 포로가 되었을 때 내가 확실히 호흡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나는 기쁘오. 내가 한 개의 기게나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살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죽어 간다는 것, 이것이 한없이 기쁠 뿐입니다."

명확한 차가운 음성이었다.

"좋소."

경멸적인 조소가 입술에 어렸다.

"이 둑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닿는 길이오. 그처럼 가고 싶어 하던 길이니 유감은 없을 것이오."

피해자는 돌아섰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기 시작하였다. 뒤에서 두 놈이 총을 재었다.

바야흐로 불길을 붐으려는 총구를 등 뒤에 받으며, 주저 없이 정확한 걸음걸이로 피해자는 눈길을 맨발로 헤쳐 가고 있었다. 인제 몇 발의 총성과 더불어 그는 무참히 쓰러지고 말 것이다. 똑바로 정면에 눈 준 채 조금도 흩어질 줄 모르는 그의 침착한 걸음걸이...

눈앞이 빙빙 돈다. 그는 마치 저 언덕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자기인 것만 같았다. 순간 그는 총을 꽉 움켜쥐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싸움을 피한다는 것은 비겁한 수단이다. 지금 저 눈길을 걸어가고 있는 피해자는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지금 피살당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쏴야 한다. 그는 사수를 겨누었다. 숨죽이는 순간 이미 그의 총구에서는 빗발같이 총알이 쏟아져 나갔다. 쓰러진다. 분명히 두 놈이 쓰러졌다. 그는 다음 다음 연달아 쏘았다. 일순간이 지나자 응수가 왔다. 이마에선 줄곧 땀이 흐른다. 눈앞이 돈다. 전신의 근육이 개머리판의 진동에 따라 약동한다. 의식이 자주 흐려진다. 그는 푹 고개를 묻고 쓰러졌다. 위기 일발, 다시 겨눈다. 또 어깨 위에 급격한 진동이 지나간다. 다자꾸 흩어지는 의식, 놈들의 사격이 뚝 그쳤다. 적은 전후좌우방으로 흩어져서 육박하여 오고 있다. 의식을 잃은 난사.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푹 쓰러졌다. 의식이 깜박 사라진다. 갓 지나간 격렬한 총성의 여음이 귓가에 감돈다. 몸 어느 한 곳이 쿡쿡 찔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다. (P.100-101)

 

눈에 함빡 쌓인 흰 둑길이다. 오! 이 둑길...몇 사람이나 이 둑길을 걸었을 거냐....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 선 언덕, 흰 눈이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닿는 길이오. 그처럼 가고 싶어하던 길이니 유감 없을 거요.

걸음마다 흰 눈 위에 발자국이 따른다.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히 걸어야 한다.

사수 준비!

총탄 재는 소리가 바람처럼 차갑다. 눈 앞에 흰 눈뿐, 아무것도 없다. 인제 모든 것은 끝난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끝을 맺어야 한다. 끝나는 일 초, 일각까지 나를, 자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걸음걸이는 그의 의지처럼 또한 정확했다. 아무리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걸음걸이가 죽음에 접근하여 가는 마지막 길일지라도 결코 허튼, 불안한, 절망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흰 눈, 그 속을 걷고 있다. 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 선 언덕, 흰 눈이다.

연발하는 총성, 마치 외부 세계의 잡음만 같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흰 눈 속을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정확히 걸어가고 있었다. 군 속에 부서지는 발자국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난다. 누가 뒤통수를 잡아 일으키는 것 같다. 뒤허리에 충격을 느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흰 눈이 회색빛으로 흩어지다가 점점 어두워 간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놈들은 멋쩍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부로 돌아들 갈 테지.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 가며 방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몇 분 후면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우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누가 죽었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평범한 일인 것이다. 의식이 점점 그로부터 어두워 갔다. 흰 눈 위다. 햇볕이 따스히 눈 위에 부서진다. (p.106-107)

 

<작품 해설>

이 작품은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 소설입니다. 포로로 잡힌 국군 소대장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에게 주어진 1시간이라는 삶의 '유예' 기간 동안 느끼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처리하여 생생한 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일인칭 화자의 독백과 현재형에 의한 서술로 박진감과 현장감을 느끼게 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처하여 끝가지 최선을 다하려는 인물의 성격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서술자의 간섭에 의한 과거 회상 수법에 따라 처리된 점이 특징입니다. 서두부터 포로가 되어 움 속에 갇힌 긴박한 현실 상황을 설정해 놓고, 일주일 남 짓 동안 주인공이 포로가 되기 까지의 일을 몇 장면씩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특별한 서사적 사건 없이 주인공이 총살당하기 직전에 유보된 1시간을 중심으로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의식에 떠오르는 회상을 시간의 순서를 무시한 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나'는 1시간 후, 흰 둑길에서 적군의 총에 의해 사형되어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피' 와 '흰 눈' 의 차가운 이미지가 결합되어 앞으로 다가올 '나'의 죽음을 더욱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요. 또한 자신을 죽인 적군들이 사형 집행 후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죽임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보여 주어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을 앞둔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인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라는 표현이 6회나 반복되고 있지요. 비슷한 표현까지 합하면 대략 10여 회나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의 허무함이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나'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사행 집행장으로 가는 길에서 상황 설정에 민감한 재닝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가 처형당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야 할 눈 쌓인 죽음의 길은 막막한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곧 포로가  국군 소대장의 의식의 흐름이 흰 눈 위에 그려지는 동시에, 흰 눈 자체가 절망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차디찬 눈의 무관심과 절망이라는 상황 자체가 이 작품이 그리고자 한 극한 상황에서의 내면 의식과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디찬 무관심의 세계를 상징하는 '눈'의 이미지는 사형 집행을 앞둔 '나'의 절망적인 비극의 상황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작품에서 '흰 눈'은 작품 전체의 배경과 분위기를 드러내는 소재로 총살 직전의 냉혹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제시하면서, 인간 생명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얗고 차가운 눈의 이미지를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요.

[삼성 주니어 한국문학 23 (p.19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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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吳尙源 1930-1985)

대한민국 소설가

평안북도 선천 출생. 1949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53년 극협의 작품공모에 응모한 장막극 「녹쓰는 파편(破片)」이 당선되었고,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예(猶豫)」가 당선됨으로써 작가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 같은 해 「균열」이 『문학예술(文學藝術)』 8월호에 발표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단편 「난영(亂影)」(문학예술, 1959.9.)과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된 「모반(謀反)」, 장편 「백지의 기록」(사상계, 1957.5.∼12.), 그리고 중편 「황선지대(黃線地帶)」(사상계, 1960.4.)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피리어드」(지성, 1958) · 「내일쯤은」(사상계, 1958.7.) · 「부동기(浮動期)」(사상계, 1958.12.) · 「보수(報酬)」(사상계, 1959.5.) · 「표정(表情)」(사상계, 1959.8.) · 「현실(現實)」(사상계, 1959.12.) 등이 있다. 미완성의 장편으로는 「무명기(無明記)」(1961.8.∼11.)가 있다.
그 밖에 「훈장(勳章)」(세대, 1964.1.) · 「암류(暗流)」(세대, 1964.9.) · 「거리(距離)」(사상계, 1964.9.) · 「담배」(사상계, 1965.2.)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앙드레 말로와 행동주의문학」(문예, 1960.6.)이 있다.


문학적 특징은 6 · 25 전후 세태의 사회적 · 도덕적 문제를 다루어 전후 세대의 정신적 좌절을 행동주의적 안목으로 주제화한 데 있다. 잘 알려진 단편 「모반」은 광복 직후 사회적 · 정치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서, 정당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여 청년 당원들 사이에 자행된 테러를 주요 문제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민이 “위대한 하나의 일의 성공보다는 나는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라도 더 소중스러워졌단 말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주인공의 인간주의적 각성이 주제임을 알게 된다.


프랑스 행동주의문학과 실존주의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한국의 전후 세대의 풍토 속에서 독자적인 작품을 이루어 1950년대의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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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 오상원 (문학과지성사)

유예 - 오상원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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