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VI. 현대 인문, 교양, 역사/1. 동양 - 인문, 교양, 역사

희망 탐색 - 크리슈나무르티 (이상원 옮김, 용오름)

by handaikhan 2023. 4. 19.

크리슈나무르티 - 희망 탐색

 

삶의 의미의 발견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는 우리 삶, 일상적 활동, 우리가 하루와 한해를 보내는 방법과 직접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 삶은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태어나고 죽기까지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 끝없는 투쟁과 노력의 세월을 보냅니다. 사무실이나 공장을 드나들며, 성공의 사다리를 애써 기어오르며, 돈이나 즐거움, 경험과 지식을 쌓으며 몇 십 년을 보낸 끝에 죽음을 맞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지식을 통해 인간이 발전한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우리는 생물학, 고고학, 역사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양의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인간을 대대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갈등, 투쟁, 고통, 즐거움, 전투가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 어디나 비슷한 이런 상황을 보면 삶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한 정서적, 낭만적, 신경증적 설명 혹은 지적, 이성적 설명은 아주 쉽게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설명들을 젖혀두고 본다면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나 답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론 여기서 답을 찾는 것은 성직자나 철학자에 의지하지도 않고 단언하거나 믿는 것도 없이 그저 깊이 바라봄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없다면 우리는 대단히 기게적인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두뇌는 기계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해 있습니다. 물론 두뇌의 일부분은,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일상에 사용하는 부분은 기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식은 근본적인 질문, 우리 인생의 의미와 깊이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인류가 완전한 화합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인류가 물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절대로 이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는커녕 정치가들은 애써 분리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쪽이 이익이 훨씬 많으니까요. 인율의 완전한 화합은 법이나 관료주의를 통해서만 얻어지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이 혼돈된 세상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무기를 팔고 국가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이 정신 나간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종교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써 왔습니다. 그러니까 조직화되고 선전과 제례에 의존하는 종교 말입니다. 하지만 이천 년 혹은 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는 몇몇 규칙, 몇몇 이상, 몇몇 결론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모두 언어적, 표면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뿐입니다. 그러니 인생이라는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인생이 가진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문하다 보면 우리 두뇌가 기존의 틀에, 습관에, 전통에, 교육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문제에 깊이 들어가면 커다란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가 만든 종교나 제례, 사상이나 믿음 등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혹과 회의주의는 중요합니다. 사고는 물질적인 과정입니다. 과학자들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고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고 자신 속으로 깊이 파고들 수도 없습니다. 그저 분리된 조각으로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조각내어 버릴 뿐이빈다. 기게적인 것이 필요한 부분은 분명 존재하지만 두뇌가 기게적이 되어버리면 인간의 내면 심리 구조에서 자유가 사라집니다. 신념이나, 이상, 믿음에 묶여 조건화된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자,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젖혀두고 나면, 이론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실제로 사고가 만들어낸 것을 다 부정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이렇게 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고의 본질을 깨닫고 (사고는 시간, 측정, 기억 반응이라는 기계적인 과정이고 우리를 더 큰 고통과 불안, 두려움으로 이끌 뿐입니다) 사고를 부정하고 넘어서보면 거기 무엇이 있을까요? (p.105-107)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년 5월 ~ 1986년 2월 17일)

철학과 영적인 주제를 다룬 인도의 작가이자 연설가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5월 11일 마드라스 관구의 마다나팔레 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텔루구어를 하는 브라만 가족 출신이다. 8살에 그는 힌두교의 신 크리슈나에서 이름을 따게 되었다.
그는 한 사람이 종교 전통이라는 테두리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내적인 탐구만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수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인간이 홀로 독립된 완전한 자유(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에 눈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그 어떠한 권위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체의 권위와 영광도 거부한 일생일대에 대표적인 사건이 별의 교단 해산 선언이다. 지두크리슈나무르티를 중심으로 창설된 '동방의 별의 교단(東方星團)'을 해산한 연설문(별의 교단 해산선언문)의 끝에서 그는, 나의 관심사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사람들을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에 인도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살에 신지학회(애니 베산트 여사)에 의해 발탁되어, 세계의 교사로 준비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힌두교적 풍습에 따라 생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브라만 소년들처럼, 크리슈나무르티도 힌두교의 의례나 경전을 공부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10명의 형제들 가운데 질병과 기근으로 5명만이 살아남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성장할 때까지 리드비터에게서 그리스도, 즉 '세계의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게 된다. 그의 생애과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신지학회가 내세우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개념의 그리스도인 ‘세계의 교사’라는 준비과정을 가졌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미래의 인류를 이끌어 갈 교사로서의 관심이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집중되었다.
이후 몇년간, 크리슈나무르티의 새로운 통찰력과 의식은 계속 발전했다. 신지학적인 술어에서 점진적으로 자유로워진 용어와 함께, 새로운 개념들이 그의 말과 토론, 편지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새로운 지향은, 리드비터와 베산트가 그를 별의 교단에 머무르도록 했던 시도를 단호히 거절한 1929년에 정점으로 향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929년 8월 3일, 네덜란드의 오멘 캠프에서 교단을 해체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사고의 구조와 한계를 밝힌 것은 현대과학이 이루어 놓은 뇌과학의 성과와 일치한다. 생각은 경험과 지식에서 발생한다. 경험과 지식은 시간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인 창조물이다.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지식과 시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자유론의 특징은 간결하고도 명료한 표현에 있다. 즉, 그의 자유론의 핵심적인 표현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고, 자유는 자기만족의 기회가 아니며, 타인 배려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자유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며, 사상과 이념 속에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은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반응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심리적 사고라고 불렀고, 심리적 사고는 기억이 두뇌 속에서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으로, 그러한 반응에는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에 관한 한 어떠한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개인이 향유하는 부분적인 자유는 결코 자유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인식에 의한 결과나 목적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자 출발이라는 것이다. 자유는 어떤 권위의 추종 사이에도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목적이 자유라면 시작 자체가 자유스러워야 한다. 끝과 시작은 하나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면, 거기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유는 시간과 사고의 운동 범주 안에서 존재하지 않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며, 의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완전한 자유는, 시간과 인식의 범주 안에서 자유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는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자기로부터의 혁명 - 크리슈나무르티 (범우사)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 크리슈나무르티 (청어람)

세속에서의 명상 - 크리슈나무르티 (산해)

오늘을 살기 위하여 - 크리슈나무르티 (판미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