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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3. 시

사평역에서 - 곽재구 (창비)

by handaikhan 2023. 3. 19.

 

곽재구 - 사평역에서 (1981)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중앙일보,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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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郭在九, 1954년 1월 1일~ )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54년 1월 1일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와 숭실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사평역에서》,《서울 세노야》,《참 맑은 물살》 등이 있고, 기행 산문집으로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이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하여 1995년 시집 《참 맑은 물살》을 펴냈으며,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곽재구의 시는 화려한 문구로 꾸미거나 치장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생의 풍경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작동시킨다는 평을 받는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과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을 냈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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