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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3. 시

이육사의 시와 산문 - 이육사 (범우사)

by handaikhan 2023. 2. 1.

이육사의 시와 산문 - 이육사 (범우 사루비아 총서 407)

 

이육사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p.14-15)

 

 

 

이육사 -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p.16-17)

 

 

 

이육사 - 황혼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긴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줄 모르나보다                         (p.26-27)

 

 

 

산문

이육사 - 계절의 표정

 

한여름내 모든 것이 싫었다. 말하자면 속옷을 갈아입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잡아매고 그 귀에 양복을 말쑥하게 손질해 입는 것이 귀찮을 뿐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기실 큰 짐이었다. 어쩌면 국이 덤덤하고 장맛이 소태같이 쓰고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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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도 시문학의 세계적 고전이며 그 광희가 황황한 3천 년 전의 가을을 읊은 시전 [국풍겸가장]을 찾아보고는 곧 번역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 것이나 남의 것을 가릴 것 없이 고전을 번역해 본다는 데는 망령되이 붓을 댈 것이 아니라 신중한 태도를 가질 것은 두말 할 바 아니나, 그것이 막상 문학인 데야 번역 안 될 문학이 어디 있겠느냐는 철없는 생각에 나는 그만 그 일장을 번역해 보고 말았디.

 

갈대 우거진 가을 물가에

찬 이슬 맺어 무서리 치도다.

알뜰히 못 잊을 그 님이시고

이 강 한 가 번연히 계시련만.

물따라 찾아 오르려 하면

길은 아득해 멀기도 멀세라.

물따라 찾아 내리자 하면

그 얼굴 그냥 물속에 보여라

 

蒹葭蒼蒼(겸가창창) 
白露爲霜(백로위상) 
所謂伊人(소위이인) 
在水一方(재수일방) 
遡洄從之(소회종지) 
道阻且長(도조차장) 
遡游從之(소유종지) 
宛在水中央(완재수중앙)

 

이렇게 겨우 3장에서 1장만을 역했을 때다. 홀연히 사지가 뒤틀리는 듯하고 오슬오슬 추우면서 입술이 메마르곤 하였다. 목 안이 갈하고 눈치가 틀리기도 하였지마는 그냥 쓰러진 채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 아침에 자리에 일어났을 때는 머리가 무거운 것이 지난밤 일이 마치 몇천년 전에도 꿈속에서나 지난 듯 기억에 어렴풋할 뿐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병이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가을에 대한 감상만 같으면 심경에나 오지 육체에 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딴은 때가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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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옆 잔디밭에 앉아 숨을 돌리며 생각해 본다. 아무리 해도 올 곳은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마는 길 가는 놈은 어째서 나를 비웃고 지나는 거냐? 대체 제놈이 무엇인데 내가 보기엔 제가 미친 놈이 아니냐? 그 꼴에 양복이 무슨 양복이냐? 괘씸한 녀석하고 붙잡아 쌈이라도 한판 하지 않으면 내 화는 풀릴 것 같지 않아서 보면 벌써 그 녀석은 어딘지 가고 없다.

이 분을 어디다 푸느냐? 곰곰이 생각하면 그놈 한 놈뿐만 아니라 인간 놈이란 모두가 괘씸하다. 어째서 나를 비웃고 업신여기는 거냐, 내가 누군줄 알고,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네까짓 놈들 하고 나서 있지 않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네까짓놈들 하고 나서 있지 않다. 또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날는지도 모르는 현현한 존재이다. 아니꼬운 놈들이로군 하고 별러댈 때에는 책상에 엎어진 채로 열이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한 때였디...  (P.102-109)

[참고]

시경(詩經) 국풍(國風) 제11 진풍(第十一 秦風)

                     129 겸가(蒹葭)

 

蒹葭蒼蒼(겸가창창) : 짙푸른 갈대
白露爲霜(백로위상) : 흰 이슬 서리가 되었다
所謂伊人(소위이인) : 내가 말하는 그 분
在水一方(재수일방) : 강물 저 한 쪽에 계시네
遡洄從之(소회종지) : 물결 거슬러 올라가 그분을 따들려 해도
道阻且長(도조차장) : 길이 험하고도 멀도다
遡游從之(소유종지) : 물결 거슬러 헤엄쳐 그분을 따들려 해도
宛在水中央(완재수중앙) : 희미하게 물 가운데 계시네

 

蒹葭萋萋(겸가처처) : 무성한 갈대
白露未晞(백로미희) : 흰 이슬에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
所謂伊人(소위이인) : 내가 말하는 그 분
在水之湄(재수지미) : 물가에 있다
遡洄從之(소회종지) : 물결 거슬러 올라가 그분을 따들려 해도
道阻且躋(도조차제) : 길이 험하고 비탈지다
遡游從之(소유종지) : 물결 거슬러 헤엄쳐 그분을 따들려 해도
宛在水中坻(완재수중지) : 멀리 모래섬 가운데 계시네

 

蒹葭采采(겸가채채) : 더부룩 우거진 갈대
白露未已(백로미이) : 흰 이슬에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所謂伊人(소위이인) : 내가 말하는 그 분
在水之涘(재수지사) : 물가에 있다
遡洄從之(소회종지) : 물결 거슬러 올라가 그분을 따들려 해도
道阻且右(도조차우) : 길이 험하고 오른쪽으로 돈다
遡游從之(소유종지) : 물결 거슬러 헤엄쳐 그분을 따들려 해도
宛在水中沚(완재수중지) : 멀리 강물 속 섬 가운데 계시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시경 - 정상홍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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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1]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20대 초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 베이징 대학이 아님)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1933년 6월 상하이에서 들렀던 한 중국 국민당 인사의 장례식 자리에서 루쉰을 우연히 한 번 보게 되었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 이육사는 루쉰의 1921년작 단편 소설 《고향》을 식민지 조선에 번역해 내놓기도 했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핑(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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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육사 시집 - 이육사 (그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