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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3. 시

김영랑 시집 - 김영랑 (범우 사루비아총서 416)

by handaikhan 2023. 2. 1.

김영랑 시집 - 사루비아총서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p.7)

 

 

 

김영랑 -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려다 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p.19)

 

 

 

김영랑 -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니 내 혼자 마음은                    (p.23)

 

 

 

김영랑 - '오 - 매 단풍 들것네'

 

'오 - 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 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 보며

'오 - 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 - 매 단풍 들것네'                                 (p.46)

 

 

김영랑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살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p.59)

 

 

김영랑 - 두견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는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삭이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땅 너 쫓겨 숨은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 가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고나

 

몇 해라 이 삼경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었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겼느니

무서운 정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 밑을 돌아 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 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봄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셨더라니

고금도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 리 망아지 얼렁소리 센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 된 울음 죽음을 흐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물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대잎에 초생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죽어 없으리, 오! 불행의 넑이여

우지진 진다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p.64-67)

 

 

 

김영랑 -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p.68-69)

 

 

 

김영랑 -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 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p.113)

 

 

 

 

김영랑 - 님 두시고 가는 길

 

님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숨 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p.114)

 

 

 

김영랑 - 허리띠 매는 시악시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랑이 낀다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랑이 낀다                         (p.134)

 

 

 

김영랑 - 밤 사람 그립고야

 

밤 사람 그립고야

말 없이 걸어가는 밤 사람 그립고야

보름 넘은 달 그리매 마음 아이 서어로아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 사람 그립고야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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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金永郞, 1903년 1월 16일 - 1950년 9월 29일, 본관은 김해(金海))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의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다.
졸업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간토 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이 때이 문학사조를 문학사학자들은 순수서정시라고 부른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지자 《독(毒)을 품고》등의 저항시를 썼다. 이후 신사참배, 창씨 개명등에 저항하여 두어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고향인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 했다가 낙선하였고, 공보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8세로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사회주의 문인들인 카프 문인들이 쓴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 속을 흐르는 조용한 저항의식이 담긴 민족주의적 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진 일제강점기 말에 쓴 《독(毒)을 차고》가 그 예이다. 주로 ㄴ, ㄹ, ㅁ, ㅇ같은 부드러운 소리(유음, 흐르는 소리), 남도 방언등으로써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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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영랑시집 - 김영랑 (그여름)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디자인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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