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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3. 시

사슴 - 노천명 (미래사)

by handaikhan 2023. 2. 5.

노천명 시집

 

<노천명 - 사슴 (1938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작품해설 - 이인복 (숙명여대교수)>

노천명은 <결손의식>의 두 가지 존재양ㅅ힉, <고독>과 <향수>를 문학정신(시세계)의 양대 지주로 하여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그 두 개의 <결손의식>이 가장 성공적으로 배합된 작품이 바로 <사슴>이다.

이 시는 한 마리 사슴을 스케치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 시는 사슴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가지 잇아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지체가 어떻게 생겼든 관여하지 않는 의식 위주의 선언이 도사리고 있다. 아울러, 두상의 외형적 동작을 묘사함으로써 지성적 사유의 우위성을 들고 나온 그는, 다시 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자신의 과거, 자신의 정신적 고향을 찾으려 함으로써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연에서 시인은 사슴에게 거는 일방적인 대화를 통하여 사슴이 누구인가를 밝힌다. 이 대화는 앞서 말한 바 자기존재의 탐구 -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ㅎ여식을 취한다. 노천명이 사슴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사슴에 동일화시킨다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노천명이 그 많은 동물 가운데 사슴을 자기동일화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유는 모가지가 길다는 것과 점잖다는 것과 관이 향기롭다는 세 가지였다. 그리고 그 길다, 점잖다, 향기롭다는 세 가지 형용사로부터 자기존재의 고독을 풀이한다. 먼저 모가지가 길다는 사실부터 주의해보자. 목이 길다는 육체적 조건이 슬프다는 정감적 결과를 가지고 와야 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다고 말한다. 이 과감한 단언에 빨려듦으로써 우리는 이미 노천명의 논리에 압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 전개되는 점잖다는 속성과 말없다는 속성이 슬픈 짐승, 곧 노천면의 특성이라고 강조할 때 우리는 아무런 이의도 내세울 수가 없게 된다. 목을 길게 늘이고 항상 슬픈 마음 때누에 말도 없ㅂ이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는 시인은 이제 자신의 정신적 고고성을 관이 향기롭다는 공감각적 수법으로 나타낸다.

두 번째 연에서 노천명은 사회현실의 탐구, 즉 왜 사느냐? 내지는 어떻게 살겠느냐? 라는 인생관을 밝히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노천명은 인생관에 대한 해답으로 들여다본다, 생각한다, 바라본다는 세 개의 동사를 마련하고 있다. 우선, 목을 길게 늘이고 다시 한 번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그가 행하는 첫번째 동작이다.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습, 그것도 그림자의 형태를 바라봄으로써 자애적 정체성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잊혀졌던 전설,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밖에는 없는 법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천명의 문학정신은 흔히 불만이란 형식으로 표현되는 결손의식이었다. 그리고 이 결손의식은 고독과 향수라는 두 개의 정서적 양식으로 노천명 시작품의 형성인자를 이루어왔다고 하겠다. (p.143-148)

 

<노천명 - 자화상 (1938년)>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러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고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처럼 꺾이는 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노천명 - 포구의 밤 (1938년)>

 

마술사 같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무거운 걸음새로 기어드니

찌푸린 하늘엔 별조차 안 보이고

바닷가 헤매는 물새의 울음소리

엄마 찾는 듯......내 애를 끓네

 

한가람 청풍, 물 위를 스치고 가니

기슭에 나룻배엔 등불만 조을고

사공의 노랫가락 마디마디 구슬퍼

호수같이 고요하던 마음바다에 잔물살 이니

한때의 옛 곡조 다시 떠도네

 

이 바다 물결에 내 노래 띄워 -

그 물결 닿는 곳마다 펼쳐나보리

바위에 부딪치는 구원의 물소리

 

내 그윽한 느낌에 눈감고 듣노니

마산포의 밤은 말없이 깊어만 가는데....

 

<노천명 - 동경 (1938년)>

 

내마음은 늘 타고 있소

무엇을 향해선가 -

 

아득한 곳에 손을 휘저어 보오

발과 손이 매여 있음도 잊고

나는 숨가삐 허덕여보오

 

일찍이 그는 피리를 불었소

피리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나는 몰라

예서 난다지....제서 난다지.....

 

어디엔지 내가 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몰라

허나 아득한 저곳에

무엇이 있는 것만 같애

내 마음은 그칠 줄 모르고 타고 또 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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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盧天命, 1911년 9월 1일 ~ 1957년 6월 16일)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 작가, 언론인이다.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京城)으로 이사, 진명(進明)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신동아(新東亞)』 1932년 6월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조선아동예술연구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같은해 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잡지 『여성(女性)』(조선일보사 발생)의 편집을 담당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고, 잡지 『신세기(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고, 그해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決戰文化大講演會)에 참가하여 시를 낭독했다. 그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았고, 후방인 '총후(銃後'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시작 -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매일신보』 1941.12.12)를 기고했다. 1942년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기원(祈願)」(『조관(朝光)』 1942.2),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한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2.19)·「노래하자 이 날을」(『춘추(春秋)』 1942.3) 등의 시를 썼고,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라는 주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와 「출정하는 동생에게」(『매일신보』 1943.11.10)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에 발표한 「병정」(『조광(朝光)』 1944.5) 및 「천인침(千人針)」(『춘추(春秋)』(1944.10)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944년 12월에는 '가미카제[神風]특공대'로 나가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모·미화하는 「신익(神翼) - 마쓰이오장[松井伍長] 영전(靈前)에」(『매일신보』 1944.12.6)와 「군신송(軍神頌)」(『매일신보』(사진판) 1942.12 ) 등의 시들을 썼다. 이외에도 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강조한 「싸움하는 여성」(『조광(朝光)』 1944.10)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두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했다.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서 1946년까지, 이후 부녀신문사의 편집차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수필집 『산딸기』를 출간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및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참가와 같은 부역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9·28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거,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고 가톨릭에 입교, 영세를 받았다.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었다」를 발표했고, 1953년 「영어(囹圄)에서」와 같이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옥중시들을 담은 세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발간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했고, 수필집 『여성서간문독분(女性書簡文讀本)』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에는 미발표 유작시를 포함한 네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가, 1960년에는 170여 편의 시를 모은 『노천명 전집 : 시편』이 간행되었고,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다.노천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29∼26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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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노래 - 노천명 (더스토리)

사슴의 노래 - 노천명 (스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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